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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41 : 고려의 역사 210 (제31대 공민왕실록 1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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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41 : 고려의 역사 210 (제31대 공민왕실록 13)

두바퀴인생 2011. 12. 5. 03:57

 

 

 

한국의 역사 441 : 고려의 역사 210 (제31대 공민왕실록 13)   

 

 

제31대 공민왕실록

(1330~1374년, 재위 1351년 10월~1374년 9월, 22년 11개월)

 

3. 공민왕시대의 반란사건들

 

최유의 난

최유는 동지밀직을 지낸 최안도의 아들이며 몽고식 이름은 첨목아불화이다.

 

그는 충헤왕 때 여러 관직을 거쳐 군부판서로 복무했을 때 재신 조분의 처 마씨가 과부가 되자 상복도 벗기 전에 강간을 하여 조분의 동생에 의해 고발당했다. 이 때문에 최유는 심한 국문을 받았으나 뇌물을 써서 곤장 50대를 맞고 풀려났다. 그 후에도 해평부원군 윤석의 며느리를 강간하는 등 행실이 곱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지도첨의에 올라 있던 그는 파면되고 말았다.

 

그러나 누군가의 중재로 충정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 와서는 왕의 즉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취성군에 봉해지고 참리 벼슬에 오르게 된다. 그때부터 최유는 대신들과 곧잘 말다툼을 벌이다가  어느날 배전, 민사평을 구타하였다. 이 때문에 감찰사가 그를 탄핵하고 수하들을 시켜 최유 대신 그이 여종을 잡아두었는데 그는 종들을 시켜 감찰사의 옥문을 부수고 여종을 데리고 간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최유의 동생 최원이 왕을 원망하다가 투옥되고 우정승 손수경에 의해 국문당한다. 그런데 최원은 국문 중에 "정승은 황제의 숙위에게 모욕도 못하고 국문도 못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하면서 옥문을 빠져나가 버렸다. 이렇게 되자 최유는 더 이상 고려에 머물 입장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아우 최원을 데리고 원나라로 갔다.

 

 

원나라로 간 최유는 그곳에서 어사 벼슬을 하다가 공민왕이 즉위할 무렵 왕을 호종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려로 돌아오던 중 자신이 고려로 돌아가면 신상에 불리할 것으로 판단하고 요양에서 몰래 도망하여 원으로 되돌아 갔다. 원으로 되돌아간 그는 고려에 앙심을 품고 김원지 등과 함게 원나라 왕에게 남방원정군 10만을 고려에서 징발해야 한다고 청원하였다. 그래서 원의 순제는 최유를 고려 조정에 보내 지원군 10만을 징발하게 하였다. 하지만 고려 조정의 거부로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최유는 포기하지 않았다. 순제가 난적들을 정벌하려 할 때 최유는 원나라 중상감승의 자격으로 고려에 와서 군사를 독촉하고 창을 만들 재료를 요구하였다. 이 때문에 공민왕은 그를 달래기 위해 삼사사 벼슬을 내리고 용성부원군의 작호도 주었다.

 

그런데 그 후 고려에서 기철을 제거하는 등 친원 세력들을 대거 숙청하자 순제의 제2비인 기왕후는 오빠의 원수를 갚을 것을 결심하게 된다. 이를 눈치 챈 최유는 기왕후를 설득하여 공민왕을 폐위하고 당시 원나라에 와 있던 덕흥군 왕혜를 고려 국왕으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그 무렵 고려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온 나라가 벌집을 쑤셔놓은 듯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고 거기다 김용의 반란으로 조정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최유는 이것을 기회로 공민왕을 제거하고자 했다.

 

최유는 기왕후와 짜고 "고려는 홍건적의 침입 때 국인을 잃어버리자 자체적으로 만든 국인을 사용하고 있다."고 거짓 보고를 하였다. 이에 기왕후에게 휘둘리고 있던 원 순제는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임명했다. 또 기씨 일족인 기삼보노를 원자로 삼고 김용을 판삼사사로 삼았으며, 최유를 죄정승에 임명하였다. 그 외에도 연경에 있던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정을 형성하였는데 이를 배경으로 요양성 병력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쳐들어갔다. 한마디로 원나라 기왕후를 등에 업고 원나라 체류 반역 고려인들로 새로운 조정을 구성하여 본국의 조정을 뒤엎을 침략을 감행한 것이었다.

 

최유가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침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공민왕은 경천흥과 안우경에게 군사를 내주고 서북부 일대를 방어토록 하였다. 그때 최유는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여 함락시키고, 패주한 고려군은 안주에 진을 쳤다. 그후 최유의 군대는 선주를 근거지로 삼고 남하를 준비중이었는데, 최영의 군대가 급습하는 바람에 대패하고 말았다.

 

최영에게 쫓긴 최유는 압록강을 건너 원나라로 돌아가 다시금 순제에게 대병력을 요구하며 고려정벌론을 내세웠다. 하지만 원나라 감찰어사 누린의 반대로 최유는 오히려 포박되어 고려로 압송된 후 사형당하고 말았다. 원나라는 당시 고려를 침입할 힘도 없을 뿐 아니라 자칫 고려와 불화가 생길 경우 오히려 정복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원나라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따라서 최유를 고려에 넘겨주는 실리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공민왕, 기왕후, 최유의 반란

원조 최후의 황제인 혜종( 惠宗, 순제(順帝): 1333~1367 )의 시대에 전대로부터 이어받은 재정궁핍과 정권 내부의 권력투쟁, 자연재해와 가렴주구, 이민족지배 등 말기적 증상이 확대되어, 제국은 가속으로 멸망해갔다. 이러한 상황 아래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빈발했으며 그 결과 드디어 1351년 홍건적의 난이 발발함으로써 중국은 원말명초 대란의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이때 고려는 경효왕( 敬孝王, 공민왕(恭愍王): 1352~1374 )의 재위 중반기로써 기철( 奇轍 ) 등 부원세력 숙청을 위하여 일으킨 병신정변( 1352 )을 시작으로 압록강 너머 8참( 站 )과 파사부 공격 및 쌍성총관부 수복, 원 간섭기 이전의 관제복구 등 반원개혁운동을 단행하여 원의 속박에서 벗어나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경효왕의 이러한 반원개혁정치는 역설적으로 반원봉기군이었던 홍건적의 침입에 의하여 흔들리게 되었다. 홍건적의 1차( 1359~1360 ), 2차( 1361~1362 ) 침공으로 고려는 크나큰 타격을 입었으며 홍건적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원에게 접근하여 공동대응을 하는 과정에서 반원개혁의 성과를 일부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저자세를 원에 취하게 되었다. 그 결과 반원정책에서 친원정책으로 전환하여 원에 대한 충성의지를 표명하고 정동행성이 다시 설치되었으며 원 간섭기의 관제로 복구하고 여원 양국이 홍건적에 공동대응하는 등 여원관계는 예전의 우호적인 상하 종속관계로 되돌아가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그러한 표면적인 양국관계와는 달리 원에서는 경효왕을 폐위시키고 충선왕의 삼남 덕흥군( 德興君 )을 고려국왕으로 임명하는 조치가 감행되었다.( 1362 ) 당초 원에서는 자국사정으로 묵인할 수 밖에 없었지만 강한 반원정책을 시행하고 있던 경효왕에 반감을 품었으며 그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반경효왕 세력으로써 병신정변으로 몰락해버린 기씨일족의 복수를 꾀했던 기황후가 그의 아들 황태자 애유식리달랍( 愛猷識理達臘 ) 및 승상 삭사감( 搠思監 )과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 朴不花 )와 함께 태자파를 형성하고 비로소 세를 확립하여 원의 정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면서 고려를 노리고 있었다. 이외에도 원에는 역시 경효왕의 반원개혁을 반대하며 고려의 정권을 장악하려는 부원세력이 있었는데 그들 중 대표적 인물이었던 최유( 崔濡 )와 덕흥군은 원으로 도주해 기황후측과 밀착하여 경효왕 폐위 공작을 펼쳐 마침내 이를 성사시켰다. 그리하여 원은 경효왕을 고려왕에서 폐위하고 덕흥군을 즉위시키기로 하였으며 기황후의 친족인 기삼보노( 奇三寶奴 )를 원자( 元子 )로, 김용( 金鏞 )을 판삼사사( 判三司事 ), 최유를 좌정승( 左政丞 ), 그외 북경의 재원고려인( 在元高麗人 )을 모두 엉터리 벼슬아치로 삼아 고려의 괴뢰정부를 조직, 고려가 홍건적의 침공으로 약화된 틈을 타 침공 폐립을 강행함으로써 고려를 응징하여 다시 원의 간섭하에 복속시키고 고려의 군사를 징발해 자국의 반란을 토벌하려고 획책하였다.

기황후측을 위시한 원 및 최유 등 부원세력은 경효왕 폐립 조치의 일환으로 먼저 고려 내의 김용과 내통하여 흥왕사의 변( 1363 )을 일으킴으로써 경효왕의 고려 조정을 전복시키려 시도했다. 이 변란에서 경효왕은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였지만 그로 인해 수상 홍언박( 洪彦博 ), 안도치( 安都赤 ) 등이 피살되어 왕의 측근세력이 붕괴됨으로써 경효왕은 정치적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이어 원은 군대를 동원하여 덕흥군을 고려로 호송하기 시작했다. 원이 동원했던 고려 침공군의 규모는 요양행성( 遼陽行省 )의 군대 1만 명으로써 몽골군대와 한인군대가 주축이 됐고 모병한 일본군대와 원에 사절로 왔다가 회유된 쌍성총관부 수복의 인물 류인우( 柳仁雨 ), 강지연( 姜之衍 ), 김첨수( 金添壽 ), 목화씨 도입의 선구자 문익점( 文益漸: 참고로 문익점이 덕흥군 옹립자였는지에 대해선 논의가 분분하다. ) 등 덕흥군과 최유의 회유 협박으로 합세한 고려인들까지 끌어들여 구성되었다.( 이러한 회유 협박에도 불구하고 이공수(李公遂), 김유(金庾), 임박(林撲), 이자송(李子松) 등은 끝까지 경효왕에 대한 충절를 지켰다. ) 고려측에서는 1362년 12월 2일 원의 경효왕 폐립 조치를 듣고 여러차례 사절을 보내어 폐립 조치의 취소를 간청함과 교서를 내려 백성들에게 자아비판을 하였으며 1363년 5월 원이 덕흥군과 기삼보노를 요양행성의 군대를 동원하여 고려로 호송한다는 보고를 듣고서 군신회의에서 군대를 내어 막기로 결정, 경천흥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방비태세를 갖추어나가고 군대를 증모했으며 덕흥군과 내통할 우려가 있던 인물들을 척결하고 덕흥군 추종자들과 파사부에 격문을 보내 회유 경고하는 등 침공에 맞설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고려는 이같은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었으니 당시 고려왕조는 극도로 피폐하였던 현실 속에서 파병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는데 국고가 바닥나 장병들을 모두 벼슬을 진급시켜주었던 터라 후대의 공명첩( 空名帖 )과 같이 실속은 없는 매관매직 명예직인 첨설( 添設 )직이 횡행하게 되었으며 불안정한 국내 사정으로 인하여 어량대( 於良大 )의 개경난입과도 같은 군란이 터지기도 하였고 남방으로 파천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이러한 긴박한 형세 속에서 1363년 12월 원군의 척후기병이 압록강에 출몰하였으며 드디어 1364년 1월 1일 덕흥군의 침공이 개시되었다.

전쟁 이전부터 고려왕조는 침공에 대비하였지만 지극히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반란의 두려움으로 인하여 중앙에서 군사를 통괄해 장수들의 군사적 재량권이 제약을 받았고 군졸들은 기한( 飢寒 )으로 죽거나 탈영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군대는 피폐하여 압록강을 건너 원군에 대한 선제 공격은 무리한 실정이었으며 게다가 당시 권위와 권력의 원천이었었던 원에서 경효왕 대신 옹립한 대립국왕 덕흥군의 침입은 만만치 않은 부담을 안겨주었다. 그러한 여건 하에서 최유가 덕흥군을 옹위하고 원군과 압록강을 건너 의주( 義州 )를 포위하자 전쟁이 시작됐다. 고려군은 안우경( 安遇慶 )의 지휘하에 원군과 7번 싸워 모두 물리쳤으나 결국 홍선( 洪瑄 )이 생포되어 패주하고 안주( 安州 )로 퇴각했으며 선주( 宣州: 현 평북 선천 )이 점령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공민왕은 최영( 崔瑩 )를 총지휘관으로 교체하고 이성계 등을 투입시켰으며 안우경은 정예기병 3백 명으로 정주( 定州 )에 진출한 원군의 척후기병을 공격 패퇴시키고 원군의 장수 송신길( 宋臣吉 )을 포살해 조리돌려 원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이리하여 고려군은 반격에 나서게 되었으며 1월 18일 수주( 隨州: 현 평북 정주 ) 달천( 獺川 )에서 고려군과 원군이 일대 회전을 벌여 이성계의 용전분투로 원군을 대패시킨다. 원군은 최유의 속전속결과 전리품분배 선전에 덕흥군을 옹위하여 고려를 침공했으나 고려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최유의 선전을 의심하던 차에 이 전투로 인하여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야간에 스스로 고려군을 위장, 최유의 군대를 놀라게 하여 병영을 소각하고 압록강을 건너 도주하게 만들었으며 이 과정에서 류인우, 강지연 등은 낙오되어 추격해 온 고려군에게 포살당했고 최유의 군대 중 북경까지 생환한 자가 17명 밖에 안되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로써 덕흥군의 침공은 종결되었다. 이후 원에서도 덕흥군의 침공이 참패로 끝나자 정국의 변화가 일어났다. 덕흥군 침공을 주도했던 기황후측의 세력이 일시 퇴조하여 태자파 삭사감과 박불화가 유배되고 태자파와 대립하는 발라첩목아( 孛羅帖木兒 )가 집권하여 경효왕을 복위시키고 덕흥군의 왕위를 취소하는 한편 최유를 체포해 고려로 압송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0월 원에서 사절을 보내 경효왕의 복위를 전달함으로써 경효왕 폐립과 덕흥군 옹립 소동은 완전 종결되기에 이른다.( 압송되어 온 최유는 투옥되어 11월 처형됨으로써 토사구팽과 반역자의 말로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

덕흥군의 침공은 고려의 반원개혁에 대한 몽골 최후의 공세였다. 이 전쟁에서 고려는 지난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은 승리하였으며 원의 무력간섭을 뿌리치고 고려의 독자적 자주성을 보전해 나갈 수 있었다. 더불어 경효왕은 이 전쟁의 승리로 인하여 홍건적 침공으로 흔들렸었던 위기를 극복하고 왕위를 안정시킬 수 있었으며 이는 좌절되었던 경효왕 초기 개혁정치가 이후 신돈( 辛旽 )의 개혁( 1365 )으로 재개되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덕흥군의 침공 이후로 원은 고려에 더이상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였으며 그 후 원은 1368년 명에 중원을 빼앗기고 패망하였다. 이후로 고려와 원의 관계는 공수가 역전되어 1차( 1369 ), 2차( 1370 ), 그리고 3차( 1371 )로 이어졌던 동녕부정벌로써 잠시나마 원을 대신하여 고려의 세력이 요동지방에 진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덕흥군의 침공은 1백여년 간의 원 간섭기에 종지부를 찍었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