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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39 : 고려의 역사 208 (제31대 공민왕실록 1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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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39 : 고려의 역사 208 (제31대 공민왕실록 11)

두바퀴인생 2011. 12. 3. 03:54

 

 

 

한국의 역사 439 : 고려의 역사 208 (제31대 공민왕실록 11)   

 

 

제31대 공민왕실록

(1330~1374년, 재위 1351년 10월~1374년 9월, 22년 11개월)

 

3. 공민왕시대의 반란사건들

 

기철의 역모사건

조일신의 난 이후 공민왕의 개혁정책과 배원정책이 더욱 가속화되자 친원세력인 기철 일파는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철 일파는 공민왕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물론 개혁정책과 배원정책으로 공민왕을 미워하던 원 순제의 기황후의 입김이 작용했음은 물론일 것이다.

 

기철은 행주 사람으로 몽고식 이름은 백안불화이며 기자오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기자오는 음관으로 산원 벼슬을 얻은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총부산랑이 되었다가  선주 수령으로 나간 바 있다.

 

그는 전서 이행점의 딸에게 장가들어 기식, 기철, 기원, 기주, 기륜 등의 아들과 몇 명의 딸을 얻었고, 그 중에서 장남 기식은 일찍 죽었다. 그런데 그의 막내딸이 원나라에 공녀로 바쳐져 궁녀로 입궁하였는데 순제의 눈에 들어 제2왕후의 자리에 올라 태자 애유식리달랍을 낳는다. 기씨 형제들은 그녀의 힘에 의지하여 원과 고려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기철이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여동생이 원나라 왕후로 있었기에 원나라 조정은 기씨 형제들에게 각별한 대접을 하였다. 충혜왕 때 기철은 정동행성 참지정사로 임명되어 고려에 파견되었으며, 동생 기원은 한림학사에 재직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은 기왕후의 체면을 고려하여 기철을 정승으로 임명하여 덕성부원군에 봉하고, 기원은 덕양군에 봉했다.

 

기씨 형제들이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자 그의 친척들도 덩달아 거만해져 횡포를 일삼았다.  그래서 기고만장한 기씨 형제와 왕실 간에 다툼도 자주 일어났다. 

 

충혜왕이 기씨의 친척이자 전자유의 처 이씨를 강간하여 전자유가 이씨를 데리고 도망친 일도 있었고, 기철 막내동생 기륜이 내료 등촉배를 구타하여 충혜왕을 분노케 하여 쫓겨다닌 적도 있었다. 또 기철의 매부 염돈소가 무뢰배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남의 유부녀를 강간하다가 충혜왕의 문노를 사서 섬으로 귀양가기도 하였다.

 

충목왕 때는 기주가 횡포를 일삼고 다니면서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다가 정치도감이 설치되면서 붙잡힐 신세가 되자 원나라로 도망하였다. 이외에도 기철의 사촌 김삼만과 기선재 등도 횡포를 일삼았지만 기씨 세력의 힘이 너무 강대하여 왕도 어쩌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공민왕은 기철의 거만한 행동을 몹시 싫어 했다. 기철은 곧잘 공민왕과 함께 말을 나란히 타고 다니면서 움직이려 하자 공민왕은 호위군사들로 하여금 그를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였다. 하지만 기철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여전히 왕과 나란히 앉는 행동을 일삼아 신하들의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그러한 행동을 직접 비난하거나 제지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기철의 행동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조일신이었다. 그는 스스로 공민왕의 보필자임을 자처하며 거만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고, 이 때문에 자주 기철 일파와 부딪혔다. 그러자 조일신은 급기야 기철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서 거사를 일으켰다. 그것이 바로 조일신의 반란이다.

 

조일신의 거사로 기철의 바로 아래 동생 기원이 살해되고 기철은 요행히 목숨을 건져 은밀한 곳에 은신하였다. 조일신은 기철 일당을 찿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으나 결국 그를 찿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조일신이 공민왕에 의해 갑자기 제거되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기철의 힘은 전과 같지 않았다. 즉위 초부터 개혁과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하던 공민왕은 조일신의 정난 이후 더욱 강하게 반원정책을 전개하였기 때문이었다. 공민왕의 반원정책은 곧 친원 세력인 기씨 일파의 숙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기철은 권겸, 노정 등과 모의하여 공민왕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거사를 도모하기로 하였다.

 

기철은 원의 쌍성총관부 소속 군사를 동원하는 한편 딸들을 원나라에 바친 권겸, 노정 등의 친원 세력의 도움을 받아 공민왕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계획은 쌍성총관부의 천호로 있던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이 1355년에 고려에 내조함에 따라 난관에 부딪힌다. 그리고 기철의 반란 계획을 눈치 챈 공민왕이 1356년 3월에 이자춘을 불러 쌍성의 유민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부탁하는 한편, 5월에 낙양후 홍언박으로 하여금 기철, 권겸, 노책 등을 체포하여 처단함으로써 기철 일파는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이 사건이 마무리되자 공민왕은 곧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철폐하고 쌍성을 수복하여 서북면과 동북면 일대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이런 면에서 보면 기철의 반란 사건은 공민왕이 친원세력을 제거하고 쌍성의 영토까지 회복하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기철 일파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공민왕을 제거하려 한 것도 사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