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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49 : 고려의 역사 218 (제32대 우왕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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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49 : 고려의 역사 218 (제32대 우왕실록 3)

두바퀴인생 2011. 12. 13. 03:08

 

 

 

한국의 역사 449 : 고려의 역사 218 (제32대 우왕실록 3)   

 

 

 

제32대 우왕실록

(1365~1389년, 재위 1374년 9월~1388년 6월, 13년 9개월)

 

2. 우왕의 가족들 

우왕은 여색을 비교적 밝힌 왕으로  금비 이씨를 비롯하여 영비 최씨, 의비 노씨, 숙비 최씨, 안비 강씨, 정비 신씨, 덕비 조씨, 선비 왕씨, 현비 안씨 등 9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근비 이씨에게서 창을 얻었다. 이들 가족 중 아홉 후비의 삶을 간단히 언급한다. 이들 아홉 후비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 '후비전'에 실려 있지 않기 때문에 '반역자전'의 '신우' 편과 <고려사절요> 등에 나타나는 기록을 바탕으로 간단하게 정리한다.

 

 

근비 이씨(생몰년 미상)

근비 이씨는 고성 사람 이림의 딸이다. 이림은 당시 실권자로 새력을 형성했던 이인임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따라서 이림의 딸이 왕비로 간택된 데에는 이인임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근비 이씨가 왕비로 책봉되어 입궁한 것은 이인임이 최영과 협력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1379년 4월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380년에 왕자 창을 낳았다. 이 때 우왕의 나이가 불과 16세였다.

 

그녀가 창을 낳자 그녀의 아버지 이림도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되었고 우왕이 폐위되어 외손 창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문하시중 직위까지 오른다. 하지만 1389년 이성계 일파에 의해 창왕이 폐위되면서 충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병사했다.

 

이러한 이림의 삶을 통해 근비 이씨의 삶을 추정해볼 수 있는데, 우왕이 건재하던 시기에는 적자를 낳은 몸으로 대단한 권력을 행사했을 것이고, 우왕이 폐위된 이후에도 아들이 왕위에 오른 덕에 그녀는 대비에 올라 여전히 권세를 누렸다. 하지만 창왕이 폐위된 이후에는 자신의 아버지 이림처럼 폐출되어 서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영비 최씨(생몰년 미상)

영비 최씨는 최영의 딸로 1388년 3월에 왕비에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된 시기가 최영과 우왕의 요동정발이 감행되던 시점이라는 사실이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시 우왕은 권력의 핵심에 서 있던 최영의 보필이 절실하였다. 그는 요동정벌 이후에 혹 발생할지도 모르는 혼란 속에서 자신을 보필해줄 든든한 안전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최영은 자신의 딸을 우왕에게 시집보내기를 원치 않았다. 영비 최씨는 측실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왕은 간곡하게 영비를 원했고, 이에 최영은 삭발을 하고 절로 들어가겠다는 표현을 하면서까지 우왕의 요청을 거절했지만 우왕은 필사적이었다. 결국 우왕은 자신의 뜻대로 영비 최씨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우왕은 영비를 맞아들인 뒤에 최영의 집에 자주 출입하였다. 그 이전에는 최영의 곧은 성격을 싫어하여 전혀 발걸음을 하지 않던 그였다. 이는 영비가 최영과의 관계를 보다 긴밀하게 하기 위한 우왕의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말하자면 우왕이 필사적으로 영비를 맞아들인 것은 정략적인 행동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해 6월 이성계와 조민수가 요동정벌군 5만을 이끌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위시켰기 때문이다. 이때 영비는 우왕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고, 또한 이듬해 11월 우왕이 강릉으로 이배되자 영비도 함께 이배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우왕이 살해되자 그녀는 우왕의 시체와 함께 생활했다고 전한다. 그 상황을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10여 일이나 음식을 먹지 않고 밤낮으로 곡하였으며, 밤이면 반드시 우왕의 시체를 끌어안고 잤다. 그리고 혹 곡식을 얻으면 정성껏 밥을 지어 올리곤 했는데 사람들은 그녀의 이런 모습을 가련하게 여겼다."

 

 

의비 노씨(생몰년 미상)

의비 노씨는 서운부정의 직위에 있던 노영수의 딸로 한때는 근비 이씨의 궁녀였다. 그러나 어느 날 우왕의 눈에 들면서 총애를 얻게 되고, 결국 벼락출세로 의비에 봉해졌다. 우왕은 그녀를 위해 덕창부를 설치하여 관속을 두는 등 그녀에 대한 배려가 대단했다. 또한 그녀의 오빠 노귀산이 과거의 중시에서 떨어졌는데도 종시를 보게 하는 특혜를 주기까지 했다. 이처럼 총애를 받던 그녀는 우왕이 폐위되자 폐출되었다.

 

 

숙비 최씨(생몰년 미상)

숙비 최씨는 최천검의 서녀로 이름은 용덕이었다. 그녀는 의비 노씨의 궁녀로 있다가 의비와 마찬가지로 우왕의 눈에 들어 숙비에 봉해졌으며, 그 덕분에 최천검은 밀직사에 올랐다. 그러나 그녀와 최천검은 한때 덕비 조씨의 모함을 받아 전주로 유배되고 어머니와 오빠가 교살되는 비운을 맞는다. 하지만 최천금이 다시 소환되어 천양부원군에 봉해져 다시 위세를 떨친다. 하지만 위화도 회군 후 창왕이 즉위했을 때 근비와 현비 안씨를 제외한 나머지 후비들은 폐출되어 사가로 돌아가게 되는데, 숙비도 이 때 서인으로 전락하여 사가로 돌아갔다.

 

 

안비 강씨(생몰년 미상)

안비 강씨는 판삼사사를 지낸 강인유의 딸이다. 그녀는 원래 다른 사람과 정혼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우왕이 그녀가 미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강제로 입궁시켰다. 1385년 1월에 입궁한 강씨는 곧 안비에 책봉되어 공민왕의 제4비 정비 안씨의 거처에 머물렀다. 하지만 우왕이 폐위된 이후에 그녀 역시 다른 왕비들과 함께 사가로 폐출되었다.

 

 

정비 신씨(생몰년 미상)

정비 신씨는 판사를 지낸 신아의 딸이다. 그녀의 혼인에 대한 특별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1385년 11월 우왕이 신아의 집에 들러 그 딸을 보고 며칠 뒤에 왕비로 맞아들였다는 기록만 있다.

 

그녀 역시 다른 왕비들과 마찬가지로 우왕이 폐위된 직후에 사가로 폐출되었다.

 

 

덕비 조씨(생몰년 미상)

덕비 조씨는 조영길의 딸이며 이름은 봉가이였다. 조영길은 이인임의 여종에게 장가들었는데, 이인임이 그의 딸을 우왕에게 소개시켜 총애를 얻게 하였다. 그래서 조영길은 면천하여 전농부정이라는 하급관리의 벼슬에 올랐다.

 

그리고 몇 년 뒤 조영길은 밀직부사라는 대단한 직위에 올라 막강한 권력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왕의 총애를 받던 숙비 최씨가 질투를 하여 봉가이와 힘 대결을 벌인다. 그러나 숙비 최씨는 오히려 봉가이의 모함을 받아 아버지 최천검과 함께 유배되고, 최씨의 어머니와 오빠는 교살되었다. 이 때 봉가이는 덕비에 오른다.

 

하지만 그녀 역시 우왕이 폐위 될 때 사가로 내쫓겨 서인으로 전락한다.

 

 

선비 왕씨(생몰년 미상)

선비 왕씨는 왕흥의 딸이다. 그녀는 원래 1383년 9월에 반안열의 아들과 혼인이 약조되어 있었으나 혼인 전날 우왕이 명을 내려 결혼을 정지시키고 왕씨를 입궁시키라고 하였다. 왕흥은 집을 비우고 도피하면서까지 우왕의 명령을 거부하였으나 결국 위협을 이기지 못해 딸을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입궁한 왕씨는 선비에 봉해졌다.

 

왕흥은 이 같은 우왕과의 혼인관계 때문에 우왕 폐위 후에 유배되었으며 선비 역시 사가로 폐출되었다.

 

 

현비 안씨(생몰년 미상)

현비 안씨는 안숙로의 딸이다. 안숙로는 공민왕의 제4비 정비의 남동생이다. 우왕은 즉위 후에 부왕의 왕비인 정비의 미모에 매료되어 그녀의 숙소를 자주 출입하곤 하였다. 그녀를 범하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으나 욕구를 억제하면서 시간을 기다리며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세간에는 우왕과 정비가 서로 간통했다는 추악한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그래서 정비는 우왕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자신의 조카인 현비 안씨를 소개시켜 주었던 것이다.

 

현비는 정비의 후원에 힙입어 우왕이 폐위된 후에도 폐출되지 않았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후 정권을 장악하자 이성계 세력의 압력을 받고 결국 정비는 이성계에 대한 옹립교서를 내렸는데, 이 때문에 이성계 세력은 굳이 정비와 현비 안씨를 내쫓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