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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57 : 고려의 역사 226 (고려시대 역사의식)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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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57 : 고려의 역사 226 (고려시대 역사의식)

두바퀴인생 2011. 12. 21. 11:59

 

 

 

한국의 역사 457 : 고려의 역사 226 (고려시대 역사의식)

 

 

삼국사기의 편찬과 고려시대 역사의식

고려시대의 역사의식

10세기 초 왕건 일파에 의한 고려의 건국은 신라말기의 사회적 모순을 지양하여 좀더 도덕적인 사회를 재건하고 후삼국으로 분열된 주민들을 재통합하여 민족통일을 한 단계 진전시켰다는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크게 보아 고려는 신라의 변경지방에서 성장한 지방세력가들이 연합하여 세운 것이지만, 그 핵심적 주역은 예성강 일대의 고구려 후예들이었으며, 고구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고 그 후예들이 세운 발해의 유민들을 포용하여 민족의 대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국가적 이상으로 표방되었다.


국호를 '고려'라 하고, 고구려 수도이던 평양을 서경으로 승격시켜 북진정책의 거점으로 발전시킨 것, 그리고 발해의 망명 귀족들을 대거 포섭하여 우대한 것 등이 그러한 국가적 이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고려 전기 200년간을 지배했던 이와 같은 역사 의식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국토를 확장하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거란과의 전쟁을 마감하고 송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려도 좀더 유려하고 세련된 유교정치를 열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인종대에 이르러 거란이 쇠퇴하고 여진족의 금이 새로이 등장하여 고려에 압력을 가해오면서 국내정치에 새로운 파동이 일어났다 . 국제평화와 유교정치에 의해 주춤해진 북진운동이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니, 묘청을 대표로 하는 이른바 서경파 지식인의 반란이 그것이었다.

개경에 있는 유학파 관료와의 권력투쟁적 요소도 함께 지닌 묘청 일파의 반란은 결국 대세에 밀려 유학파에 의해 진압되고, 고려는 다시금 유교정치의 고삐를 다그치게 되는데, 바로 유교정치의 재확립을 목표로 하여 관찬으로 편찬된 새로운 역사책이 김부식 등 11명의 유학자 관료들에 의해 씌어진 인종23년, 서기1145년에 쓰여진 <삼국사기>였다.

 

삼국사기의 편찬목적

 

「삼국사기」는 묘청의 난으로 분열된 민심을 재수습하여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대륙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금과 의 관계에서 유연한 평화적 외교술로 안정을 찾으려는 목적에서 편찬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삼국의 역사를 정리함에 있어 힘의 논리로 중국과 겨루다가 패망한 고구려의 전통보다는, 유연한 외교술과 충의의 도덕정신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역사 전통을 높이 평가하는 시각에서 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국가재정상 낭비적 요소가 많고 신비주의적 경향을 지닌 불교·풍수지리사상과 신화적 세계관을 배격하고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에 기초를 두어 삼국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였다.

 

김부식의 생애와 역사의식

김부식은 문종 29년(1075년)에 태어나서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예종, 인종, 의종 등 7왕을 거치면서 의종 5년(1151)에 77세로 생애를 마쳤다. 그 의 70여세의 생애 전반기는 고려 문벌귀족사회의 절정기에 해당하였다. 그리고 후반기는 안으로 '묘청의 난' 등 문벌귀족 간의 갈등이 첨예화되었으며, 밖으로는 여진의 군사적 압력이 가중되는 시련기였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환경은 그가 「삼국사기」를 저술하게 된 배경이 될 수 있었다.

즉, 김부식은 「삼국사기」의 편찬을 통해 이전 신라의 문화를 정리하는 동시에 묘청의 난 이후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킬 바탕을 마련하였고, 당시 사회모순에 대한 간접적인 현실비판을 꾀하였던 것이다. 이에 기초를 두어 삼국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였다. 그가 정계에서 크게 활약한 시기는 60세 이후였다.

61세 때 묘청의 난을 진압한 직후 문하시중으로 임명되었던 그는 무엇보다도 묘청의 난 수습을 분열주의에 대한 국민적 통일 주의의 승리라고 간주하며, 갈등과 분열을 국가멸망 원인으로 부각시킴으로써 당시 사회모순을 간접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다.

결국 김부식 생애의 전·중반기는 문벌귀족들의 횡포와 비리에 대한 현실비판의식과 금의 압력에 대한 국가의식이 강조되는 때였다. 그리고 후반기는 묘청의 난 진압 이후 왕권의 강화와 고려왕조의 통치권 확립을 위한 노력이 요청되는 시기였다. 여기에 「삼국사기」편찬의 배경이 있다.


즉 이 책은 안으로 왕권을 옹호하고 밖으로 나라를 지켜주는 정신적 구실을 하고자 한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가로서, 그리고 현존하는 최고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편찬자로서 유명하다.

그러나 종래 그의 역사관과 「삼국사기」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이 지배적이었다. 즉 그는 문벌귀족의 역사가, 고구려, 백제의 역사를 비하시켜 축소하거나 대륙백제에 대한 부분의 삭제, 신라의 역사에 대한 과대포장 등 역사 사실을 마음대로 날조 삭제한 역사가, 사대적인 역사가로 평가되어 왔고, 유교적인 역사가로서 불교적인 내용과 전통적인 고유사상을 삭제하였다고 비판되었으며, 조선 초기 이래 그 내용이 부실하다는 평을 받아 왔고, 삼국초기의 기록은 믿을 수 없는 사실로 제쳐놓는 견해도 있어 왔다. 그러나 현재에는 김부식의 역사관과 역사서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견해도 있다.

즉 김부식의 역사관은 조선시대의 역사가들보다는 덜 사대적이었고, 신라 중심적인 서술을 한 것은 사실이나 삼국에 대하여 공평한 입장을 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료의 날조는 생각할 수도 없으며, 지나친 산일(散逸)과 변개(變改)도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었다.


또한 과거의 역사가에게도 서술의 자유를 인정해 주어야 하며, 사학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 그는 고대의 설화중심적, 신화중심적 역사 서술로부터 합리성을 추구한 점에서 역사학을 발전시킨 역사가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며, 나아가 사대적인 성격을 김부식 개인의 문제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 상황 속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즉, 사대 정책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반드시 부 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중세에 기여한 점도 있다고 보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역사의식

 

김부식의 역사인식은 그가 편찬한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전통사학에서 역사편찬은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존사서의 재편집이므로, 「삼국사기」의 경우도 그 내용 전체가 김부식의 독창적인 저작물이 아니다. 때문에 「삼국사기」의 편목이나 지(志)의 서론, 그리고 열전의 인물평가 등과 논찬(論贊) 등을 통해 그의 역사관을 찾을 수밖에 없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기전체로 편찬하였다. 그런데 중국측 기전체의 경우 열전이 전체의 60% 정도가 되는 데 비해, 「삼국 사기」는 20%내외의 분량을 갖고 있으며, 본기가 반대로 60% 정도에 육박하고 있다. 이러한 항목의 안배는 중국과 다른 독자적 특징을 나타내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더구나 본기에서 삼국을 시작부터 완전한 국가로 인정하였을 뿐 아니라, 왕은 처음부터 정치·군사·외교·종교 및 재판권을 행사하는 절대군주로 설명하였다. 어디까지나 김부식은 중국과 대등한 우리 역사를 다시 써서 후세에 남겨주겠다는 목표를 가졌기 때문에, 국초 이래 왕(위)·신하(중간)·백성(아래) 3자간의 행동규범에서 역사의 내용을 찾으려 했다.

그러므로 첫째로, 그의 역사인식은 무엇보다도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실현하려는 전통사학의 범주 속에 머물러 있지만, 강력한 자아의식을 갖고 있었다. 「삼국사기」의 자아의식은 열전에서 나타난, 순국한 인물의 투철한 국가의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즉 열전에 등장한 69명 중에서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은 21명이었고, 34명이 통일전쟁에서 활약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둘째, 김부식의 역사인식은 '하늘과 땅 사이의 관련적 사고라는 견지에서, 자연의 변화(천재지변)와 인간의 활동(정치와 전쟁) 의 관계를 중시했다. 이것은 사마천의 '천인지제승 통변'의 범주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그는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활동의 상관 관계를 실질적인 역사내용으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본기 내용은 정치·천재지변·외교·전쟁의 4항목으로 되었으며, 그 속에서 국가를 구성한 3요소인 왕·신하·백성이 각기 그들의 책무를 다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천인관계는 일정한 비율을 유지하면서 역사발전의 당위성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김부식은 역사를 교훈이나 후세의 귀감으로 파악하였으므로, 역사서술을 현실비판의 도구로 삼았다. 그는 「진삼국사표」에서 저술동기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더욱이 고기에는 문자가 거칠고 사적이 빠지고 없기 때문에, 이것으로는 군후의 선악이나 신자의 충사, 국가의 안위 그리고 인민의 이란 등을 드러내어 후세에 경계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3재를 얻어 일가지사를 이룩하여 만세에 남겨두는 교훈을 삼아 해와 별과 같이 밝히고 싶다."

그는 역사는 국민적 교화와 계몽의 수단이라고 이해하였으므로, '분열과 갈등은 국가의 우환'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관은 조선 초의 역사서술은 물론, 이후의 전통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넷째, 김부식은 '사실을 사실대로'기록하려는 객관적 서술자세를 갖고 있었다. 춘추필법 이후 '술이부작'의 원칙은 작사의 기본 원칙이었으며, 역사편찬은 기존 사서의 편집에 불과하였던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그는 「삼국사기」편찬시에도 「구삼국사」, 「당서」,「자치통감」 등 기존사료를 충실히 전재하였으며, 전승된 자료를 산삭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때문에 그는 신라의 고유왕명을 신라본기에 그대로 기록하였으며, 신라의 관명에도 이벌찬·파진찬 등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이처럼 신라 고유의 명칭을 사용한 것은 사실의 객관적 서술인 동시에 점차로 독자적인 자아의식의 표현으로 결집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삼국사기」가 단순히 사대주의적인 저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김부식은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영웅주의사관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주의적 역사관이 아니라, 멸사봉공의 의무와 도리를 강조한 공적 덕목을 제시함으로써 국가의식을 강조하려 는 것이다. 때문에 열전에 등장한 인물도 군사적 활동을 한 사람이 절반이 넘으며, 통일전쟁에서 희생된 군인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영웅주의사관은 전통사학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이다. 이는 「삼국사기」열전 10권 가운데 김유신전에 3권을 할애한 사실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김부식의 논찬도 결국 '군신의 행위'에 대한 평가였으며, 국가에 기여한 공헌이라는 현실주의적 사관과 그 뜻을 같이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김부식에게 역사는 국가에 대한 의무적 행위의 요구이며, 국민교화의 수단인 것이다.

 

 

삼국사기의 사학사적 위치

 

이상에서 김부식의 생애와 역사인식 그리고 「삼국사기」의 내용과 성격을 살펴보았다. 전통사회에서 역사편찬은 개인의 저작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문화를 집대성한 시대적 소산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도 안으로 문벌귀족간의 갈동과 묘청의 난 진압 후의 혼란된 사회를 수습하고 밖으로 여진의 위협에 직면하여 고려왕조의 권위를 고양하려는 목적에서 편찬되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책임편수관인 김부식은 10명의 보조편수관의 도움으로 이 책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에는 김부식과 10명의 보조편수관, 그리고 왕(인종)의 입장이 공동으로 반영될 수밖에 없었고, 그 역사인식은 특정 개인의 주관보다는 시대환경이 요구한 역사관이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최종 책임을 진 김부식의 사관이 「삼국사기」의 역사인식은 특정 개인의 주관보다는 시대환경이 요구한 역사관이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김부식의 사관이 「삼국사기」의 역사인식과 같은 맥락임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의 역사인식은 전통적인 역사관을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독자적인 성격도 없지는 않다.

첫째, 그의 역사인식은 유교적이며 사대적인 사관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나 정치상황에서 볼 때, 그리고 역사서술 체제로 볼 때 그것은 불가피 하였다.

그러나 범람하는 중국문화 가운데에서 우리 현실에 대한 강렬한 자아의식과 투철한 국가의식을 내세웠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자연현상을 정치현상 못지 않게 중시함으로써 그것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또한 과거의 특정 사실을 현재와 결부시킴으로써 역사서술을 현실 비판의 도구로 삼은 데서 나타나듯이, 역사를 국민교화 내지는 계몽의 수단으로 이해하였음 도 주목할 일이다.

둘째, 김부식은 객관적 서술자세를 취하였으므로 기존 사서의 내용을 충실하게 반영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고유한 명칭과 방언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우리의 전통과 법속을 지켜주었다. 또한 김부식은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태도는 유교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머물지 않고 개인의 역할을 민족 본연의 토성으로까지 승화시켰다. 이러한 자아의식의 자세는 현실주의적 인식으로 확대되어 국민(왕·신하·백성)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법규 속에서 묶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아가서 전국민을 하나의 범주 속에 규제함으로써 백성들의 지위를 향상시켜 국민 상하간의 조화와 균형을 꾀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사대주의적 개악서는 아니다. 중국문헌의 닮은꼴이라고 무조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이 책은 3국을 중국과 맞선 독립국가로 서술하였고, 왕을 절대군주로 묘사하여 천자와 같은 지위로 승격시켰다. 나아가서 삼국 사회를 발전사적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순환론적인 시각에서 역사사건을 해석하여 왕조교체의 당위성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신채호 이래 많은 선학들은 김부식의 역사인식을 '사대주의적'이라고 비판해왔다. 그러나 그는 사대적이면서도 유교적인 시대분위기 속에서 우리 현실을 잊지 않았으며, 항상 우리나라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