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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31 : 고려의 역사 200 (제31대 공민왕실록 3) 본문
한국의 역사 431 : 고려의 역사 200 (제31대 공민왕실록 3)
제31대 공민왕(계속)
개혁의 실패
홍건적과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은 고려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1365년(공민왕 14),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던 노국대장공주가 드디어 회임을 하였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는 난산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극심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통곡했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노국대장공주는 인덕왕후(仁德王后)로 추존되었으며, 공민왕은 서거한 왕후를 추모하는 불사(佛事)에 전력을 기울였다. 왕비의 사후 그는 술과 색으로 시름을 달랬고, 미소년들을 왕궁으로 출입시키기도 했다.
끝없는 상심에 빠졌던 공민왕은 1365년 음력 5월 을사환국(乙巳換局)을 통해 신돈(辛旽)을 등용하였다. 영산 출신 승려였던 신돈은 당시 살아있는 부처라는 소문이 있었고 그 소문을 들은 공민왕은 직접 영산까지 내려가 신돈과 만나 대담하였으며, 신돈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시국을 논하였는데 그의 달변이 왕의 마음에 들게 된다. 왕은 신돈을 환속시킨 뒤 수정리순론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책록하고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 판감찰사사(判監察司事)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使)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임명했다.
신돈의 등용과 제거
수상직과 감찰서와 서운관의 수장직을 겸한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1366년)하여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또한 성균관을 다시 설치하였다. 결국 신돈의 개혁으로 권문세족과 신흥 무인세력은 힘을 잃게 되었고, 이들은 곧 신돈의 정책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였다.
1366년 음력 10월 김유(金庾)가 1백 척의 규모의 토벌군을 이끌고 제주도를 공격했으나 패전했다. 당시 제주도는 삼별초의 항쟁에 진압된 뒤 몽골의 목마장(牧馬場)이 설치되었으며, 다수의 몽골인들이 주둔하여 친원노선을 걷고 있었다. 이후 약 10여 년 넘게 제주도는 고려 조정에 반발하였다.
1368년(공민왕 17) 명나라가 건국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1월과 11월, 이성계와 지용수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하였고, 요동의 고려인을 본국으로 송환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영토 확장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1371년 음력 7월 신해환국(辛亥換局)으로 신돈이 유배된 후 처형되었다. 이로서 공민왕의 개혁은 사실상 마감되었다. 그해 음력 9월 동녕부를 다시 공격하였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신돈의 제거 이후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낀 그는 술과 남색에 빠져 방황하게 된다.
죽음
노국대장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날로 변태적인 성격으로 변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1372년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젊고 외모가 잘생긴 청년을 뽑아 이 곳에 두고,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하였다.
1374년 음력 7월부터 8월, 제주도에서 목호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최영이 314척의 함대와 병력 25,600여 명을 이끌고 난을 진압하고, 제주도를 완전히 수복하였다.
같은 해 9월에 공민왕이 홍윤(洪倫), 최만생(崔萬生) 등 자제위(子弟衛) 소속의 미소년들을 궁중에 출입하게 하여, 그들과 동성애를 즐겼다는 주장이 있다.
홍윤은 공민왕의 후궁이었던 익비(益妃)와 간통하였는데, 이를 최만생이 은밀히 공민왕에게 보고하였다. 공민왕은 "이 사실을 아는 자를 모두 죽여야겠다"고 말했다. 최만생은 자신까지 죽게될까 두려워 홍윤에게 사실을 고해바쳤다.
결국 공민왕은 홍윤, 권진, 홍관, 한안, 최선, 최만생에 의해 1374년(공민왕 23년) 9월 21일에 시해당했다. 향년 44세였다.
암살 이후
홍윤과 최만생 등은 공민왕을 칼로 수차례 난자하여 시해했다. 그 후, 칼질을 한 자들이 “밖에서 적이 들어왔다.” 라고 부르짖었는데, 가까이서 호위하던 위사들은 겁을 먹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고, 재상을 비롯한 신하들 또한 변고를 들었음에도 궁으로 들어오는 자가 없었다. 오직 내시 이강달만이 진실을 알았는데, 그 또한 이를 비밀에 부쳤다.
다음날, 임금의 명령이라 하여 이인임, 경복흥, 안사기 등을 소집해 사태 수습을 논의했다. 이인임은 처음에는 승려인 신조를 의심해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던 도중 병풍과 최만생의 옷에 묻은 피를 보고 그를 집중적으로 추궁하였으며, 이윽고 사태의 진상이 드러났다. 홍륜 등 일파는 체포되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하고 삼족을 멸하는 극형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어린 우왕이 즉위하면서 권문세족의 친원 보수 정치가 전개되었다. 우왕은 공식적으로는 궁녀 한씨의 소생이었으나 실은 신돈의 여종인 반야의 소생으로, 신돈이 실제로 아버지라는 주장이 있다. 조선 왕조에서는 이를 사실로 내세워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닌데도 고려의 왕권을 찬탈하여 고려 왕조의 맥이 끊긴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의 개국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공민왕의 능은 현릉(玄陵)이며, 노국대장공주(인덕왕후)의 능인 정릉(正陵)은 그 옆에 나란히 있다.
미술과 서예
공민왕은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대자(大字)에 뛰어났다.
작품성은 뛰어났고 실물을 거의 완벽하게 묘사하여 당대에도 화제가 되었는데, 인물 묘사도는 섬세하였다는 평이 있다. 작품에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국립현대미술관), 《이양도(二羊圖)》, 《노국대장공주진(眞)》, 《염제신상(象)》, 《손홍량(孫洪亮)상(象) 》《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 《아방궁도(阿房宮圖)》, 《현릉산수도(玄陵山水圖)》, 《달마절로도강도》, 《동자보현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 등이 있다.
서예작으로는 경북 봉화군에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현판과 청량사 유리보전의 현판, 안동 영호루 현판 등이 있다. 이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피난중일 때 직접 써주었다고 한다.
《쌍화점》영화 / 《[신돈]》 드라마
가계
- 부왕 : 충숙왕
- 모후 : 공원왕후 홍씨(恭元王后 洪氏, 1298년~1380년) - 남양 홍규의 딸.
- 형 : 충혜왕
- 비 : 인덕왕후(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1365년) - 원 위왕의 딸.
- 후궁 : 혜비 이씨(惠妃 李氏,?~1408년) - 경주 이제현의 딸. 공민왕 사후 여승이 되었다.
- 후궁 : 익비 한씨(益妃 韓氏,생몰년 미상) - 덕풍군 의(德豊君 義)의 딸.
- 후궁 : 신비 염씨(愼妃 廉氏,생몰년 미상) - 서흥 염제신의 딸. 혜비와 같이 공민왕 사후 여승이 되었다.
- 후궁 : 정비 안씨(定妃 安氏,?~1428년) - 죽성 안극인의 딸. 우왕의 비인 현비(賢妃)의 고모이다. 공민왕의 사후 왕실의 어른이 되었다.
- 후궁 : 궁인 한씨(宮人 韓氏,생몰년 미상) - 공민왕보다 앞서 사망.
- 후궁 : 시비 반야(般若,생몰년 미상) - 신돈의 시비.
- 차남 : 우왕(禑王, 본명은 무니노, 1365년~1389년, 재위: 1374년~1388년) - 고려 제 32대 왕
평가와 비판
고려 최후의 개혁군주로 평가된다. 그러나 재위 후반의 엽색 행각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
기타
1357년(공민왕 6) 문무백관에게 최초로 갓을 쓰도록 명하였다.
신돈의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껴 신돈 일파를 제거하면서 아들 무니노의 생모가 신돈의 시비 반야(般若)라는 점 때문에 혈통문제가 발생할 것을 예상, 1374년 9월에 아들 아들 무니노의 존재를 알리고, 아들 무니노의 생모는 궁인 한씨라고 공표하고, 한씨의 3대 조상과 그녀의 외조에게 벼슬을 추증한다.
그러나 뒤에 시비 반야는 자신이 우왕의 생모라고 주장했다가 이인임에게 살해당하게 된다.
고려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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