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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33 : 고려의 역사 202 (제31대 공민왕실록 5) 본문
한국의 역사 433 : 고려의 역사 202 (제31대 공민왕실록 5)
제31대 공민왕실록
(1330~1374년, 재위 1351년 10월~1374년 9월, 22년 11개월)
1. 개혁주의자 공민왕의 배원정책과 고려의 국권회복(계속)
이 무렵 공민왕은 승려 보우의 선 사상에 몰입하여 보우를 왕사로 임명하고 그에게 승직에 관한 모든 권한을 대행토록 하는 등 불교 중흥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는 태조의 유지를 받들고 문종시대의 태평성대를 재현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던 유학자 출신 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편 영토확장을 위해 공민왕은 평리 인당과 밀직사사 강중경을 서북면 병마사로 파견하여, 평리 인당이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 등 세곳의 원 수비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처럼 공민왕이 배원정책과 민족성 회복운동을 동시에 실시하자 원나라는 고려의 절일사 김구년을 요양성에 가두고 80만 병력을 동원하여 고려를 토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공민왕은 평리 인당으로 하여금 서북면 일대의 수비를 강화하도록 응원군을 보내고, 개경의 지형이 원나라 군사에게 노출된 점을 감안하여 동성에 외성을 쌓는 한편, 남경(한성)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워 이제현으로 하여금 천도작업을 주관토록 하는 등 결사항전을 다짐한다.
그런 의지와는 달리 원과 정면으로 대결할 실질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공민왕은 원의 80만 대군을 피하기 위해 요동 정벌 병마사 인당을 참수하여 희생시키는 고육지책을 쓰는 등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지만, 고려는 1356년 7월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가 쌍성을 함락시키고, 고종 말년에 원나라에 빼앗겼던 함주 이북 땅을 수복하는 데 성공한다. 이에 원나라는 쌍성과 삼살 이북에 대한 왕래를 자유롭게 할 것을 요청하지만 고려는 그곳이 원래 고려 땅인 점을 강조하며 거부한다.
공민왕의 요동 정벌
만주 전지역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거의 3천년 동안 우리 민족이 지배하던 강토로서 발해가 멸망한 뒤에 요나라-금나라-원나라 땅이 된 것인데 고려 4백년 동안 불행하게도 대대로 어둡고 어리석은 권력자를 만나 북벌을 실행하던 윤관(尹瓘)을 쫓아내며 북벌을 다시 주장하던 왕가도(王可道)를 귀양보내고 우리 민족의 진취적 기상을 펴지 못한채 그만 몽고가 일어남에 우리 황해 함경도의 반쪽을 빼앗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저 1백여년간 인물들이 다만 한 장의 종이에 복걸복망(伏乞伏望) 등 글자를 빽빽히 써서 이를 돌려 받고자만 하고 감히 강력한 정책을 써서 이를 회복하고자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는데 최도통이 원에서 귀국하자마자 공민왕을 설득하기를
"국가의 영토가 북쪽 오랑캐의 것이 되어 뜻있는 사람들의 분통해 함이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오랑캐들의 기운이 쇠퇴하는 틈을 이용하여 북벌할 군대를 출동시킨다면 오랜 원한을 하루 아침에 풀 수 있는데 왕은 이에 뜻이 없습니까?"라고 하자
공민왕이 비록 어리석기는 하나 또한 원나라에 가뜩 분함을 품고 있어서 곧
"짐도 뜻은 있으나 다만 저 강한 원나라와 누가 대적하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최도통이 이에 원나라 정부의 나약함과 중국 전체에 걸친 혼란스런 상황을 말하여 반드시 이길 방법을 증명하고 또
"옛땅을 되찾는데 적의 크고 작음과 강하고 약함을 묻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이 크게 기뻐하며 인당(印 )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삼고 최영을 부사(副使)로 삼으며,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고 황천보(黃天甫)를 부사로 삼아 마보군(馬步軍) 1만2천명을 이끌고 출발할 때 최도통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습격하고자 하여 인당과 밤낮없이 달려 압록강에 도착하였는데 그 때에 조정의 못된 신하로써 원나라의 눈과 귀가된 사람들이 많아 군대의 출동사실을 이미 알렸기 때문에 원나라에서 사신을 고려에 파견하였다.
최도통이 힘세고 헤엄을 잘치는 두명의 병사를 뽑아 밤중에 강을 건너 원나라 병사의 진영 뒤로 가서 횃불을 들고 고려군이 이미 건너왔다고 크게 소리치게 하니 원나라 군사가 크게 놀라 모두 흩어졌다. 인당이 최도통과 강을 건너 원나라 진영 세군데를 격파하고 나아가 파사부(婆娑府)를 함락시키니 요동땅이 크게 울리고 부근의 백성들이 모두 최도통의 용맹스런 이름을 두려워 하여 호두장군(虎頭將軍)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진격하여 원나라 진영 다섯군데를 격파하고 봉천부(奉天府)를 포위하였는데 순찰병이 한 명의 관리를 잡아오니 곧 원나라 사신이었다. 이는 원순제가 우리 병사의 북벌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책망하기 위해 보낸 사신이었다.
최도통이 말하기를
"이사람을 베어 버려야 하니, 지금 임금의 뜻이 곧지 못한데 만일 이사람이 가서 어떠한 공갈과 협박을 하면 임금의 마음이 반드시 중간에 바뀌어 북벌계획이 크게 그릇될 것이니 내뜻으로는 이 사람을 진영에서 베어 버리고 원나라 임금에게 글을 보내 서로 끊을 뜻을 보여 두나라 사신의 왕래가 없도록 하여야만 크게 성공시킬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당이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다가 드디어
"두나라가 싸우게 되어 사신은 그 중간에 있는 것이니 우리나라가 군사를 일으킨 처음부터 어찌 사신을 죽여 뒷날의 웃음거리가 되겠는가?"라며 드디어 사신을 놓아 주니 최도통이 크게 한탄하여 "그 놈이 큰 공을 망치는구나. 그 놈이 큰 공을 망치는구나"라 하였다.
과연 원나라 사신이 우리나라 수도에 이르자 왕이 예로부터 하던대로 나아가 맞이하였는데 원나라 사신이 군사를 일으켜 침략한 이유를 책망하며
"지금 황제가 매우 노하여 장군 동수(董壽)에게 명하여 8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곧 압록강을 건너게 할 것이다"하니 이는 모두 꾸며낸 공갈이지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 중국이 혼란하여 원나라가 내란을 평정할만한 병력도 없는데 어느틈에 80만의 군사를 출동시켜 우리나라를 침입할 수 있겠는가? 이는 삼척동자라도 능히 헤아릴 일인데 애석하도다. 저 성질이 어리석고 겁이 많은 임금과 비열함이 몸에 밴 신하들 모두가 이말에 겁을 먹고 얼굴색이 변하고 정신을 잃어 당황하며 서로 돌아보며 저 80만 원나라 적병이 경성(京城)에 이미 다다른 것처럼 놀라서 떠니 그 모양이 아주 가소로왔다.
이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왕이 하나의 묘한 꾀를 생각해 내고는 크게 기뻐하며 원나라 사신에게
"이일은 과연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자 원나라 사신이
"어찌 국왕으로 이일을 모른다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인당이 서북면병마사의 권한을 제멋대로 하여 감히 이같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한 것이지 나는 알지 못한다"고 하자
원나라 사신이
"그렇다면 이사람을 어찌하여 처벌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왕이 "이미 사신을 보내 이사람의 죄를 의논하게 하였다"라고 하자
원나라 사신이
"왕은 잘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 80만 대군이 곧 그대의 나라에 당도할 것이니 왕은 무슨 수로 이를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곧 돌아갔다.
왕은 이에 걸음 날쌘 자들을 모아 빨리가서 인당을 불러오라 하여 사신(여기부터의 사신은 공민왕이 보낸 사람임)이 도착하니 인당이 왕의 명령을 받고는 탄식하여 "이제 큰 공이 거의 이루어져 가는데 어찌하여 나를 불러들이는 것인가?"라며 오랫동안 한숨을 쉬었다.
당시 봉천부를 지키는 적병이 적고 약하여 곧 성을 함락할 수 있었으며 요동의 수십 주(州)가 우리군의 위세를 듣고는 불을 쫓는 것처럼 모여 들며 원나라는 남쪽의 반란을 진정시키기에 온 힘을 쏟아 동편을 돌아볼 겨를이 없은즉 이는 우리나라가 발해 옛 땅을 되찾을 큰 기회이거늘 애석하도다. 저 약한 왕과 옹졸한 신하들이 원나라 사신의 공갈 한마디에 놀라고 겁내어 다 이룩된 공을 버리고 장군을 불러 들이니 인당의 탄식함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전에 최도통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그때에 유인우도 동북의 8주5진(八州五鎭)을 되찾고 더 북진하다가 또한 소환되었다. "가면 가고 말면 말지 영남(嶺南)의 무정한 남자를 따라 갈까?"라는 이 말 한마디는 오랫동안 마음 상한 사람들의 말이다. 무정한 남자를 따라 간다면 아무리 예쁜 여인도 박대 당하며, 이랬다 저랬다 믿음이 없는 임금과 함께 일하면 세상을 뒤덮는 영웅이라도 낭패를 당하게 되니 이 말이 믿기지 않으면 공민왕을 보라.
이때에 북벌에 나섰던 모든 장수들이 만일 조정에 여쭘이 없이 스스로 군사를 일으켰더라도 옛 땅을 되찾아 선왕들의 남긴 한을 씻었으니 이를 의롭다 하여 상을 주고 공적이라 하여 상을 주는 것이 마땅한 것인데, 하물며 임금의 명령으로 출동케 하고 임금의 명령으로 철군케 하며 공이 있고 죄가 없는 서북면병마사 인당이 어찌 죽어야 하는가? 군사들이 평양으로 돌아오자 사신이 왕의 명령이라 하며 인당을 하옥시키거늘 그 죄를 묻자 "왕명을 받들지 않고 병사를 함부로 움직인 것이 첫 번째요, 대국을 침범하여 이웃국가로서의 도리를 망령되게 함이 두 번째다"라 하고 드디어 목을 베어 죽이니 육군(六軍) 모두 슬픔의 눈물을 흘리었다. 대개 공민왕이 원나라 사신의 협박과 공갈에 따라 관군(官軍)을 되돌린 것은 최도통이 이미 생각한 대로이지만 인당을 목베어 원나라에 사죄한 것은 최도통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아아! 슬프다! 굳센 두장수가 함께 싸움터에 나아가 말머리에 이는 바람속에서 나라일을 함께 계획하다가 그는 비참히 죽고 자기만 홀로 살았으니 최도통의 마음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또 인당이 적의 칼에 죽었거나 죄를 범하여 죽었다면 오히려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지금 그렇지 않고 공을 세웠는데도 죽음을 당하였으니 최도통의 마음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최도통이 왕의 번복을 한탄하며 인당의 비참한 죽음을 애도하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사람을 대하여 보니 속세의 일이 염두에 없어 상소를 올려 벼슬을 조정에 바치고 인(印)을 품어 사자에게 전하니 어제의 서북면병마사가 이제는 성남(城南)의 한낮 일반사람이 되었다. 세상일을 생각치 않고 깊은 산속으로 한적한 삶을 찾아 지팡이 하나와 표주박 하나로 한가로이 홀로 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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