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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32 : 고려의 역사 201 (제31대 공민왕실록 4) 본문
한국의 역사 432 : 고려의 역사 201 (제31대 공민왕실록 4)
제31대 공민왕실록
(1330~1374년, 재위 1351년 10월~1374년 9월, 22년 11개월)
1. 개혁주의자 공민왕의 배원정책과 고려의 국권회복
14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원은 홍건적의 봉기로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시기에 고려 국왕에 즉위한 공민왕은 배원정책을 골격으로 하는 일련의 개혁정책을 통해 국권을 되찿고 잃었던 복방의 영토를 회복한다. 이로써 고려는 1백여 년간 지속되었던 원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체제구축을 위해 매진하게 된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차남이자 공원왕후 홍씨 소생으로 충혜왕의 동복아우이며 초명은 기, 이름은 전, 몽고식 이름은 백안첩목이다. 그는 1330년 5월에 태어나 강릉대군에 봉해졌으며, 1341년 원나라 순제의 입조 요구에 따라 12세 때부터 줄곧 연경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1344년 조카 충목왕이 즉위하자 강릉부원대군에 봉해졌다. 1348년 12월 충목왕이 사망함에 따라 조신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지만 원나라가 충정왕을 세움에 따라 성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충정왕이 나이가 어린 탓에 정치가 안정되지 못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원 순제는 1351년 10월 충정왕을 폐하고 그를 고려 제 31대 왕에 봉했다. 이 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공민왕이 즉위할 무렵 원은 홍건적의 반란으로 사회가 어수선한 상황이었고, 고려 역시 정치의 불안정과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민생이 피폐해지고 있었다. 공민왕은 이 같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개혁정책을 실시하여 국가기강을 바로잡는 한편, 적극적인 배원정책으로 국권을 회복화고 잃었던 영토를 되찿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하여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던 몽고 풍속을 없애고 친원 세력을 제거하는 동시에 일곱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관제 개혁을 실시하여 문종시대에 완성된 관제를 복구하였다.
공민왕이 원으로부터 고려에 돌아온 것은 1351년 12월이엇다. 그리고 두 달 뒤인 이듬해 2월부터 그는 전격적으로 개혁작업에 돌입해 2월 초하루에는 무신정권의 최이가 설치하여 인사행정을 맡아오던 정방을 폐하고 그 다음 날에는 개혁교서를 발표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했다. 이 정책은 지속적으로 실시되어 1366년에 신돈의 주도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귀족들이 불법적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돌려주는 한편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키게 된다.
그는 1352년 8월에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린다.
"옛날에 임금들은 일심전력하여 나라를 다스릴 때 그 나라를 보전하려면 반드시 친히 국가의 정무를 봄으로써 자기의 견문을 넓히고 하부의 실정도 알게 되었으니 지금이 그렇게 할 때이다. 첨의사, 감찰사, 전법사, 개성부, 선군도관은 모두 판결송사에 대하여 5일에 한 번씩 계를 올리도록 하라."
공민왕의 이 명령은 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획기적인 조처였다. 무신정권 이후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하였고, 원나라 복속체제 아래에서는 겨우 서무결재권만 되찿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공민왕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각 부서의 중요 안건을 직접 챙기면서 관계와 민생 전반에 대한 통치기반을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민왕의 친정체제 구축작업은 무신정권 이후 거의 이뤄지지 않았던 정치토론장인 서연을 재개함으로써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는 8월의 서연에서 원로와 사대부들이 교대로 경서와 사기, 예법 등을 강의할 것과 전답 및 가옥, 노비와 억울한 죄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할 것을 촉구한다. 또한 첨의사와 감찰사를 자신의 눈과 귀로 규정하고 정치의 옳고 그름을 위해 백성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기탄 없는 보고를 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권력에 의지하여 부정을 일삼아오던 성사달 등 고급관리들이 하옥되고 상장군 진보문의 아내 송씨 등 부정한 간통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을 대거 색출하여 하옥함으로써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풍기를 단속하였다.
그러나 그해 9월 공민왕의 과감한 개혁정책에 위기감을 느낀 판삼사사 조일신이 정찬기, 최화상, 장승량 등과 힘을 합쳐 기원과 최덕림 등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에 성공한 조일신은 곧 공민왕을 협박하여 자신을 우정승에 임명케 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하였다.
그 후 10월 조일신은 다시 자신과 함께 거사를 감행했던 최화상과 장승량 등을 죽이고 정권을 독식하게 된다. 이 때 조일신은 좌정승으로 승격되어 판군부감찰을 겸직하며 찬화안사공신의 칭호를 받는다. 하지만 공민왕은 그를 제거할 마음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정동행성에서 대신들과 의논한 뒤 김첨수를 시켜 조일신을 연행하는 데 성공했다.
조일신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공민왕은 그의 도당 정을보, 이권, 나영걸, 고충절, 이군상 등 28명을 하옥하고 왕권을 회복한다. 그리고 이제현을 우정승, 조익철을 좌정승으로 임명하여 명실공히 개혁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은 물락해가는 원나라에 대한 배척운동과 함께 이루어졌다. 1352년 고려 풍속을 회복하기 위해 변발과 호복 등 몽고 풍속을 금지시켰으며, 1356년에는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관제를 문종 대의 제도에 맞춰 복구하였다. 또한 내정간섭을 일삼아오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철폐하고, 원나라 왕실에 의지하여 권세를 부리던 기왕후의 오빠 기철 일가를 숙청하였으며,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의 내조에 힘입어 원나라 복속 이후 1백 년간이나 존속해온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원나라에 빼앗겼던 서북면 및 동북면 일대의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공민왕의 개혁 정책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이 개국한 고려는 1392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손에 망했다. 채 500년이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조차도 고려 왕실은 온전히 왕실의 권위를 지키지 못했다. 1170년 정중부와 이의방이 무신란을 일으켜 무신정권을 세운 뒤로 고려 왕실은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무신정권의 집권자들은 손바닥 뒤집듯 마음대로 왕을 갈아치웠고, 그런 무소불위의 권력은 온갖 부패와 부작용을 낳았다. 게다가 무신정권 후기에는 약 30년간 일곱 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입으로 전 국토는 황폐해지고 온 국민은 도탄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고려는 무신정권의 몰락과 함께 곧바로 몽고의 부마국이 되어 100년이 넘도록 몽고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고려가 그나마 다시 독립국으로의 위상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제31대 공민왕이 즉위한 1351년 이후였다. 1170년 무신란 이후로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할 때까지 무려 200년 가까이, 고려 왕실은 무인정권의 허수아비였고 또 몽고, 즉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해 있었다. 공민왕은 고려의 재건을 위해 과감한 개혁을 시도했지만, 이미 너무 깊이 병들고 지친 고려는 그 개혁을 소화할 힘이 없었다.
공민왕의 개혁
종묘는 조선 왕실의 사당으로 역대 조선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매년 종묘 대제를 올리는 곳이다. 정전과 영녕전에 모두 83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종묘의 한 구석에 마치 문간방처럼 작은 신당이 하나 있는데 이 신당이 바로 공민왕 신당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종묘를 세울 때 공민왕의 업적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당을 지으라 명하고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정을 보냈다고 한다. 고려의 흔적을 지우려 그리도 애썼던 이성계가 무슨 까닭으로 종묘에 공민왕의 신당을 세웠던 걸까.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종묘 공사가 한창일 때 갑자기 돌풍이 불더니 어디선가 공민왕의 영정이 날아와 조정에서 상의 끝에 공민왕 신당을 세우고 그 영정을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황당한 말을 믿을 수는 없다. 종묘에 공민왕 신당이 자리잡게 된 정확한 연유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공민왕 대의 개혁 정책을 살펴보면서 그 사연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공민왕 신당. 넓은 종묘의 한 구석에 있는 작은 건물이 공민왕 신당이다.>
공민왕이 즉위하던 1350년은 동아시아에서 거대한 힘의 재편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전 세계를 호령하던 대제국 원나라는 이미 힘이 떨어져 중국에서 봉기한 홍건적에 밀려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공민왕은 이런 국제정세를 읽고 즉위하자마자 빠르게 개혁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공민왕 개혁의 요체는 원나라 세력의 제거였다. 대외적으로는 원나라를 멀리하고 대내적으로는 친원파 권문세족들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1351년 말에 즉위한 공민왕은 이듬해 초에 권문세족이 장악하고 있던 정방을 폐지하고, 권문세족의 경제력을 위축시키기 위해 토지와 노비 문제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또 1352년에 고려의 풍속을 되살리기 위해 원나라의 풍속인 변발과 호복을 금지시켰다. 1356년에는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고려의 관제를 원 간섭기 이전으로 되돌려 놓았으며, 같은 해 원나라가 차지하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철령 이북의 땅을 회복시켰다. 원나라의 입장에서는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몹시 못마땅했지만 이미 쇠약해진 원으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고, 고려 내의 친원세력 역시 원의 쇠락과 함께 입지가 좁아져 있던 상황이었다.
공민왕을 괴롭힌 것은 친원세력들의 반발만은 아니었다. 당시 중국 내륙을 휩쓸던 홍건적이 두 차례에 걸쳐 고려로 쳐들어왔던 것이다. 1359년 첫 번째 침입에 서경(지금의 평양)이 함락되기까지 했고, 1361년 두 번째 침입 때는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어 공민왕은 안동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또 1362년에는 원나라 출신의 나하추가 군사를 끌고 압록강을 넘어왔다.
이런 내우외환 속에서도 개혁정책을 밀어붙이던 공민왕은 1365년 왕비 노국공주가 산고 끝에 죽자 급격히 실의에 빠졌다. 노국공주가 죽자 공민왕은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도 않고 3년간 육식을 하지 않을 정도로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결국 공민왕은 그 한 해 전부터 왕의 고문역을 수행하던 승려 신돈에게 개혁의 전권을 위임하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섰다.
1371년 신돈을 제거한 공민왕은 다시 친정을 시작했지만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기지 못한 채 문란한 생활을 일삼다가 1374년 의문의 피살을 당해 45세로 생을 마감한다. 공민왕이 죽자 고려 조정은 이인임으로 대표되는 친원세력이 다시 득세하여 우왕을 세웠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주원장이 중국 내륙에서 명나라를 세우고 원나라를 만주 땅으로 몰아낸 뒤였다. 명나라가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고려가 친원정책을 다시 펼치자 명과의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공민왕 신당 내부. 정면에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정이 있고 왼쪽에는 공민왕이 그린 그림들이 있다.>
공민왕의 흔적은 경북 영주의 무량수전과 충북 영동의 영국사에도 남아 있다.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개성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안동으로 몸을 피했다. 공민왕이 안동에 머무는 동안 아마 영주의 부석사를 찾았던 모양이다. 이때 공민왕은 부석사의 본전인 무량수전의 현판을 써주었다. 이 현판은 지금도 부석사 무량수전에 걸려 있다. 이제 색이 많이 바랬지만 넉넉하면서도 힘찬 공민왕의 친필을 볼 수 있다.
또 이때 홍건적을 몰아낸 뒤 공민왕이 개경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충북 영동의 영국사에 들렀던 것 같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영국사의 본래 이름은 국청사였는데 공민왕이 개경으로 환도하던 중 이 절에서 고려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한다. 이 일로 절 이름을 영국사(寧國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민왕이 죽은 뒤 고려는 급속히 혼란에 빠져들었다. 공민왕의 죽음으로 고려의 하늘에는 망국의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국사. 영국사에는 아주 멋진 은행나무가 있어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의 물결을 볼 수 있다.>
신흥사대부의 등장
사대부(士大夫)란 ‘학문을 닦는 사람’이라는 뜻의 ‘사(士)’와 ‘벼슬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대부(大夫)’가 합쳐진 말이다. 즉 사대부란 ‘학문을 닦고 벼슬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학자적 관료’쯤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고려시대에는 무인정권 때부터 사대부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는데, 고려말에 이르러 이 사대부들이 어느 정도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들을 신흥사대부라 부른다.
당시 신흥사대부들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몽주, 정도전, 조준, 남은, 박위, 성석린 등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공민왕이 활성화시킨 성균관 출신들이었으며, 당시 성균관의 총책임자인 대사성으로 있던 사람이 당대의 대 유학자 목은 이색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신흥사대부들은 성균관 출신이면서 동시에 목은 이색의 제자이거나 사제들로, 단단한 학연으로 연결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뒤에 이성계와 함께 정권을 장악한 후 고려의 유지를 주장하는 온건파(정몽주, 이숭인 등)와 조선의 개국을 주장하는 강경파(정도전, 조준, 남은 등)로 나뉘어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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