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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30 : 고려의 역사 199 (제31대 공민왕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430 : 고려의 역사 199 (제31대 공민왕실록 2)
제31대 공민왕(계속)
반원 개혁
그러나 그해 9월 공민왕의 과감한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판삼사사 조일신이 정천기, 최하상, 장승량 등과 힘을 합쳐 대신 기원과 최덕림 등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에 성공한 조일신은 곧 공민왕을 협박하여 자신을 우정승에 임명케 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하였다.
한달 뒤 조일신은 다시 자신과 함께 거사를 감행했던 최화상과 장승량 등을 죽였다. 이로써 조일신은 정권을 독차지하게 된다. 이때 조일신은 좌정승으로 승진하였으며, 판군부 감찰을 겸하며 공신 칭호까지 받아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공민왕은 그를 제거할 마음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정동행성에서 대신들과 의논한 뒤 김첨수를 시켜 조일신을 연행하는 데 성공했다.
조일신을 제거한 공민왕은 그 측근인 정을보, 이권, 나영걸, 고충절, 이군상 등 28명을 하옥하였다. 이어 이제현을 우정승, 조익청을 좌정승으로 임명하여 개혁적 정권 수립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한편 당시 원나라는 피지배층 한족의 반란인 홍건적의 난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1354년 음력 7월부터 1356년까지 원나라의 지원 요청으로 최영, 이방실, 안우, 김용, 정세운, 유탁(柳濯) 등은 병력 2천을 이끌고 원나라에 파병되었다. 파병군은 고려종정군(高麗從征軍)이라 불렸다. 파병 후 귀국한 장군들이 원나라의 몰락을 상세히 보고하여, 공민왕의 반원개혁에 힘을 실어주었다.
1356년(공민왕 5) 음력 4월 공민왕은 당시 원나라의 기황후(奇皇后)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奇轍)등과 권겸, 노정 등의 부원 세력을 역모죄로 숙청하였는데, 이를 병신정변(丙申政變)이라 한다. 또한 몽골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당시의 칭제(稱制)로 환원하였으며,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도 폐지하였다.
1356년 음력 4월, 공민왕은 유인우(柳仁雨)에게 몽골이 빼앗아 백 년 넘게 장악하고 있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공격을 명령했다. 쌍성총관부 공격은 공민왕 반원 개혁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때 고려인의 후손으로 총관부에서 대대로 몽골의 작위를 세습하던 이성계와 그의 부친 이자춘은 몽골을 배신하고 성문을 열어, 유인우에게 성을 바쳤다. 이를 계기로 이자춘 부자(父子)와, 고려 조정에 협력한 조돈 등이 고려 정계에 등장했다.
같은 해 공민왕은 인당, 최영을 파견하여 압록강 너머 원나라의 8참(站)을 공격하여 격파하였으며, 파사부 등 3참을 점령하였다. 이 사건은 고려 최초의 요동 정벌로 평가된다.
왜구, 홍건적의 침입
1358년(공민왕 7)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4백 척 규모의 함대로 오예포(吾乂浦)에 침략한 왜구를 물리쳤다.
1359년(공민왕 8) 음력 12월부터 1360년(공민왕 9) 음력 2월까지, 홍건적 장수 모거경이 4만 명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모거경은 서경까지 함락시켰으나 안우, 이방실,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패해 물러갔다.
1361년(공민왕 10) 음력 11월부터 1362년 음력 1월까지 반성, 관선생, 사류, 파두반이 이끄는 홍건적 20만 명이 다시 고려를 침공하여, 수도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그러나 곧 고려군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고 압록강 너머로 패주하였다.
홍건적은 몽골에 반대하는 한족으로 구성되었다. 이 때문에 홍건적 침입의 영향으로 고려의 반원 개혁은 부분 차질을 빚었으며, 고려 조정은 원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한때 관제를 개혁 이전으로 되돌리기도 하였다.
1362년 김용의 음모로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가 주살되고 만다. 같은 해 2월부터 7월까지 요동의 몽골 군벌 나하추는 쌍성총관부의 잔당인 조소생과 함께 고려의 동북면에 침공하였다. 그러나 나하추는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대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쌍성총관부의 잔당 조소생, 탁도경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홍건적의 난
홍건의 난(紅巾之亂) 또는 홍건적의 난(紅巾賊之亂)은 원 말기에 한산동(韓山童)을 수장으로 뭉친 백련교도가 중심이 되어 봉기한 한족의 농민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기 때문에 홍건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홍건적은 홍적(紅賊)·홍두적(紅豆賊) 등으로도 불렸다.
1348년 원나라에서는 절강의 방국진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 1351년에는 가노에 의해 황하의 개수 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인 홍건당이 봉기했다. 그때 한산동은 미륵불(彌勒佛)이라 자칭하며 민심을 선동하였다.
그 뒤 한산동은 관군에게 붙잡혔으나 그의 부하 유복통은 군사를 일으켜 각지를 노략질하였는데, 그 군대는 10만에 달하였다. 그리고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맞아들여 황제로 삼고 국호를 송(宋)이라 하였다.
1354년 대규모 토벌군을 이끈 토구다가 그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토곤 테무르에게 경질되어 살해당하자, 이것을 칸의 권력 회복과 맞바꾸어 군벌에게 의지하던 원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키게 되었다.
1357년 홍건적은 유복통의 인솔 아래 3개 군으로 나뉘어 대북벌을 개시하여 초반에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원나라군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북벌이 좌절되면서, 홍건적 일부 세력들은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 행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관선생과 파두반의 홍건적이 원나라 여름 수도였던 상도(上都)와 주변 지역을 함락시키기도 했으나 1359년 주력 부대가 주둔하던 변량(개봉)을 다시 원나라에 뺐기면서 요동으로 이동하게 되고, 급기야 원군(元軍)에게 쫓겨 고려 영토로 들어오게 되었다.
주원장이 저우장의 심만삼의 재력에 도움을 받아, 서수휘, 진우량, 장사성 등의 세력을 격파했다한다. 주원장은 남경을 근거지로 하여 기타 반란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장강유역의 화남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여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고 연호를 홍무라 정하니 홍무제이다. 홍무제는 건국하자마자 북벌을 개시하여 원 순제(토곤 티무르)는 대도(북경)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은 명나라로 통일되었다. 결국 중원을 점령하고 있던 원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명(明)을 건국하여, 한족(漢族) 왕조를 복원시켰다.
홍건적의 고려 침공
홍건적들은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까지 침범하였다.
1359년(공민왕 8) 음력 12월, 모거경(毛居敬)이 이끄는 4만여 명의 홍건적이 얼어 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義)·정(靜)·인(麟)·철(鐵)의 4주(州)를 함락시키고, 이어 서경을 점령하였다. 1360년 음력 1월 하순, 고려군은 2만명의 병력으로 서경 탈환을 시도했다. 비록 고려군 사상자가 1천여 명에 달했지만, 홍건적은 수천 명이 전사하면서 서경을 버리고 북쪽의 용강과 함종 방면으로 퇴각했다. 그 뒤 다시 추격을 당하여 압록강을 건너 도망한 적은 3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
그 뒤에는 수군으로써 황해·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산발적으로 노략질하다가, 1361년(공민왕 10) 음력 10월, 원나라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린 홍건적은 하북 지방으로 퇴로가 차단되자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2차 침공의 주역은 반성(潘誠), 사류(沙劉), 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 파두반(破頭潘) 등이며, 병력은 20만 명이었다. 이때 홍건당에서 주원장이 두각을 나타냈다. 홍건적은 음력 11월 11일에 절령(岊嶺 : 자비령)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고 수도 개경(開京)에 육박하여 왔다. 이에 공민왕 및 왕실과 정신(廷臣)은 남쪽인 복주(현재의 경상북도 안동)로 대피하게 된다. 왕가(王駕)가 이천에 도착하던 날 홍건당은 개경을 함락하고 온갖 만행을 다하였다. 그러나 홍건당은 개경 입성 후 2달간 주둔하면서 더 이상 남진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홍건적이 개경에서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중에 고려는 전국적으로 20여만의 병력을 모병했다. 복주에 있던 공민왕은 그해 음력 12월경에 정세운을 총병관(총사령관)으로 삼았고, 정세운은 1362년 음력 1월, 동교 천수사(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소재)에서 안우, 이방실, 이여경, 최영, 이성계, 김득배(金得培) 등에게 20만의 병력으로 개경을 포위하도록 했다.
전의가 꺾인 홍건적은 이 두 갈래 길로 개경에서 도망쳐 그대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후퇴했다. 고려군은 그들의 퇴로를 열어준 채 계속 추격하여 홍건적을 끊임없이 괴롭혔으며, 여름에 수장인 파두반을 사로잡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공민왕과 고려 조정이 개경을 떠난 이후 음력 11월 24일에 개경에 입성했다.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그는 선봉에서 적장들에게 직접 공격을 가하여, 마침내 홍건적의 괴수 사유(沙劉)와 관선생(關先生)을 죽이고, 수도에 제일 먼저 탈환해 입성하는 큰 전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다.
이로써 2차에 걸친 홍건적의 난은 끝나게 되었는데, 앞서 중국의 북서에서 만주 방면으로 진출한 홍건적의 무리들은 고려에서 전멸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난은 고려에도 막대한 타격을 주어 국운을 쇠퇴케 하여 고려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암살 기도와 여진족 정벌
이후 원나라에서는 고분고분하지 않는 그를 폐출하고 덕흥군 등을 추대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1363년초 그는 왜구 토벌을 계획하였으나 일시 중단하였다.
1363년 음력 3월, 김용이 원나라의 지원을 받던 덕흥군과 내응하여 흥왕사에서 공민왕의 시해를 기도했으나 최영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자 덕흥군은 1364년 음력 1월 원나라의 지원을 받아 최유와 함께 원나라군 1만 명을 이끌고 고려의 서북면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섬멸되었다.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의 장군이 되었던 최유는 고려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1364년 음력 1월, 여진의 대추장 김삼선(金三善), 김삼개(金三介) 형제가 고려의 동북면에 침입하였으나 이성계 휘하의 고려군에게 대패하였다. 또한 같은 달 원의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朴伯也大)가 고려의 서북면 연주(평안북도 영변)을 침입하였다. 이는 원나라가 고려에 행한 최후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 의해 참패로 끝났다. 같은 해 음력 5월에는 김속명이 이끄는 고려군이 진해에 침입했던 3천 명의 왜구를 격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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