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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27 : 고려의 역사 196 (제29대 충목왕실록)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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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27 : 고려의 역사 196 (제29대 충목왕실록)

두바퀴인생 2011. 11. 21. 01:59

 

 

한국의 역사 427 : 고려의 역사 196 (제29대 충목왕실록)   

 

 

제29대 충목왕

 

 

충목왕(忠穆王, 1337년 ~ 1348년)은 고려 제29대 국왕(재위: 1344년~1348년)이다. 휘는 흔(昕), 몽골식 이름은 팔사마내아사(八思麻朶兒只,팔사마타아지), 시호충목현효대왕(忠穆顯孝大王)이다. 충혜왕덕녕공주(德寧公主)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있다가 8세에 원나라에 의하여 즉위하였으나 후사없이 요절한다. 집권기간 중 그의 모후인 덕녕공주가 섭정을 담당하였다.

 

 

생애

충혜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나라덕녕공주였다. 그러나 고려의 독립과 반몽 인사를 감시하기 위해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어릴 때 원나라 대도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1344년(충혜왕 5) 충혜왕이 죽자, 고용보(高龍普)가 왕을 옹위하고 원나라 순종을 알현하였을 때 순종이 “그대는 아버지를 배우겠는가, 아니면 어머니를 배우겠는가?”라는 물음에 “어머니를 배우고 싶다.”라고 대답하자 순종은 왕의 천성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찬탄하고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으니, 이때 나이 8세였다.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어머니인 덕령공주가 대신 정사를 맡아보며 전조(前朝)의 폐정을 시정하였다. 권세가들에게 빼앗겼던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녹과전(祿科田)의 폐단을 시정하였다. 기근이 들었을 때 진제도감(賑濟都監)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 또한, 충선왕의 명으로 민지(閔漬)가 찬진(撰進)한 《편년강목》을 증수시키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 등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제29대 충목왕실록

(1337~1348년, 재위 1344년 2월~1348년 12월, 4년 10개월)

1. 어린 충목왕의 즉위와 덕녕공주의 섭정

충목왕은 충혜왕의 맏아들이자 정순숙의공주(덕녕공주) 소생으로 1337년 4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흔, 몽고식 이름은 팔사마타아지다.

 

1344년 2월 고룡보가 여덟 살 먹은 세자 흔을 안고 원나라 순제를 찿아갔더니 순제가 흔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비를 본받으려 하느냐? 아니면 어미를 본받으려 하느냐?"

 

이에 흔이 어미를 본받으려 한다고 말하자 순제는 영특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교지를 내리고 그를 고려 제29대 왕으로 책봉했다. 그리고 그의 모후 덕녕공주가 섭정을 시작했다.

 

덕녕공주는 그해 윤2월에 정승 채하중, 사공 강호례, 정당문학 정을보, 동지밀직사사 김상기와 설현고, 밀직제학 장항 등에게 국정을 참의할 것을 명령하고 함양군 박충좌, 양천군 허백을 판전민도감사에 임명하였다. 또한 한범, 장송, 심노개, 전두건불화, 정천기, 소경부, 조성주 등 충혜왕이 편애하던 인사들을 대부분 귀양보내거나 낙향토록 하였다. 게다가 충혜왕 때 내린 칙첩들을 모두 회수하고 기강을 바로 잡았다.

 

이 때 충목왕은 서연에서 우정승 채하중을 비롯한 수십 명의 신하들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정치와 예의를 익혔다.

 

한편 덕녕공주는 충혜왕이 신축한 신궁을 헐고 그 자리에 학문을 진작시키기 위한 숭문관을 세웠다. 또한 1345년에는 충선왕 때 만들어진 민지의 <편년강목>을 보충하여 편찬하게 하고 부원군 이제현, 찬성사 안축, 한산군 이곡 등으로 하여금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등 3대 실록을 편찬토록 하였다.

 

1347년 정월에는 밀직사사 전윤장을 교주도 도순무사로 임명하여 쌍성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의 숫자를 파악하게 하고, 김민슬을 양광도로, 이원구와 김영리를 전라도로, 남궁민과 이배중을 경상도로, 박광후와 최원우를 서해도로, 정인을 평양으로, 김구발을 강릉도로, 곽연을 교주도로 각각 파견하여 토지를 측량하게 하였다.

 

덕녕공주가 이처럼 국가 기강을 바로잡으며 경제 재건에 힘쓰고 있는 동안 충목왕은 급속도로 병약해져 1348년 8월에는 건강이 배우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덕녕공주는 충목왕의 거처를 건성사로 옮겨 요양토록 하고 자신은 밀직부사 안목의 집에 거처를 마련하여 그곳에서 정사를 처결하였다.

 

그 후부터 공주는 왕의 쾌차를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기도장을 차렸고, 그 사이 왕의 병은 더욱 악화되어 거처를 다시 김영돈의 집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해 12월 충목왕은 모후 덕녕공주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너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왕위에 오른 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능은 명릉으로 개경 근처에 마련되었으며 혼인 이전에 죽었기 때문에 가족은 없었다. 또한 실록은 우왕 11년인 1385년에 '충혜왕 실록', '충정왕 실록'과 함께 편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