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424 : 고려의 역사 193 (제28대 충혜왕실록 1) 본문
한국의 역사 424 : 고려의 역사 193 (제28대 충혜왕실록 1)
제28대 충혜왕
충혜왕(忠惠王, 1315년~1344년)은 고려 제28대 국왕(재위: 1330년~1332년, 복위 1339년~1344년)이다. 휘는 정(禎), 몽골 이름은 보탑실리, 시호는 충혜헌효대왕(忠惠獻孝大王). 충숙왕과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의 아들이다.
생애
1330년 충숙왕이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자 즉위했지만, 1332년 원나라에 의해 충혜왕도 폐위되고 충숙왕이 다시 복위되어 다시 원나라로 갔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심양왕 왕고를 왕으로 세우려는 조적 등의 음모와 반란이 있었으나 실패하고 충혜왕이 즉위했다. 즉위 후에 사치와 항락, 사냥을 일삼았으며, 흉흉한 민심과 소문이 돌았다.
특히 음탕한 행위를 많이 한 것으로 <<고려사>>를 통해 잘 알려져 왔는데, 결국 원나라에 의해 다시 폐위되어 원나라로 끌려가 게양현으로 유배를 가다가 악양현에서 죽었다. 독주를 마셨다고도 하고 귤을 먹고 죽었다고도 알려져있다.
가계
- 비 : 정순숙의공주(貞順淑儀公主, 몽골의 덕녕공주(德寧公主))
- 자 : 충목왕(忠穆王, 1337년~1348년, 재위: 1344년~1348년) - 고려 제 29대 왕
- 녀 : 장녕옹주
- 후궁 : 희비 윤씨 - 파평 윤계종(윤관의 9대손)의 딸
- 서자 : 충정왕(忠定王, 1337년~1352년, 재위: 1348년~1351년) - 고려 제 30대 왕
- 손자 : 왕제(王濟, 시중, 개성왕씨 시중공파의 파조)
- 서자 : 충정왕(忠定王, 1337년~1352년, 재위: 1348년~1351년) - 고려 제 30대 왕
- 후궁 : 은천옹주 임씨 - 별칭은 오지옹주, 사기옹주
- 서자 : 석기
고려의 역대 국왕 |
---|
태조 · 혜종 · 정종 · 광종 · 경종 · (대종) · 성종 · 목종 · (안종) · 현종 · 덕종 · 정종 · 문종 · 순종 · 선종 · 헌종 · 숙종 · 예종 · 인종 · 의종 ·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 · 원종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우왕 · 창왕 · 공양왕 |
제28대 충혜왕실록
(1315~1344년, 재위 1330년 2월~1332년 2월, 1339년 3월 복위~1344년 1월, 총 6년 10개월)
1. 희대의 패륜아 충혜왕과 고려 왕실의 위기
충혜왕은 충숙왕의 장남이자 공원왕후(명덕태후) 홍씨 소생으로 1315년 1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정, 몽고식 이름은 보탑살리이다. 1328년 정월에 원나라 승인을 받아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330년 2월 병약해져 정치에 염증을 느낀 충숙왕의 양위를 받아 고려 제28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는 16세에 불과했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충혜왕은 한 나라를 통치할 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격마저 포악하여 정사를 뒷전으로 미루고 향락과 여색에 빠져 지냈다. 즉위 6일 동안 정사를 폐하고 사냥을 즐기는가 하면 날마다 내시들과 씨름을 하며 놀았다. 또한 배전, 주주 등에게 국가의 충책을 일임하여 일부 관료들의 권력 남용이 극대화되었고,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다는 이유로 사관들을 몹시 싫어하여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 같은 폐정이 2년 동안이나 계속되자 원 왕실은 역시 충혜왕을 연경으로 소환하여 근신 명령을 내리고 충숙왕을 복위 시켰다. 하지만 연경에서도 충혜왕의 행실이 고쳐지지 않자 1336년 12월 고려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1339년 3월 충숙왕이 죽자 충혜왕은 복위하였다.
충숙왕은 아들 충혜왕을 항상 못마땅하게 여기며 날건달이라고 불렀으나 죽음에 임박하자 장남인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고려 조정의 통보를 받은 원나라 승상 백안 등은 충혜왕이 왕이 될 만한 자질을 갖추지 못햇다하여 심양왕 왕고를 고려 국왕으로 삼아야 한다고 상소했다. 이 때문에 한동안 충혜왕은 원 왕실의 책봉문을 받지 못했다.
충혜왕은 왕위에 오르자 닥치는 대로 음탕한 짓을 일삼기 시작했는데, 1339년 5월에는 부왕의 후비인 수비 권씨를 강간하였고, 8월에는 역시 부왕의 후비인 숙공휘령공주를 강간하였다.
술자리를 마련한 왕은 연회가 끝나자 술에 취한 척하고 궁궐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숙공휘령공주의 침실을 덮쳤는데, 이 때 공주가 완강하게 저항하자 수하들을 시켜 양팔과 다리를 잡게 한 다음 입을 틀어막고 강간을 자행했다. 그리고 수비 권씨 역시 그런 방법으로 강간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숙휘령공주는 수치심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분에 이기지 못해 원 왕실에 충혜왕을 고발하려 하였다. 그래서 직접 원나라로 떠날 요량으로 수하를 시켜 말을 사들이게 하였는데, 이를 눈치 챈 충혜왕이 말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하지만 이 일은 나중에 원 왕실에 알려져 충혜왕 폐위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또한 수비 권씨는 강간을 당한 뒤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이듬해 죽엇는데, 아마 자살한 듯하다.
이처럼 자신의 서모까지도 서슴없이 강간하던 충혜왕이었기에 일반 민가의 아녀자에 대한 강간 행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내시 유성의 처 인씨가 아름답다 하여 수하 구천우와 강윤충을 데리고 가서 유성에게 술을 먹이고 그 아내를 겁탈하였으며, 자신의 장인 홍탁의 후처 황씨와도 간음하였다. 그런데 충혜왕은 항상 정력이 강해지는 알약을 복용했기 때문에 그와 관계를 가진 여자들은 임질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홍탁의 후처 황씨도 임질에 걸렸는데, 충혜왕은 승려 복산을 시켜 그녀의 임질을 치료하게 하였다.
충혜왕의 이 같은 폐륜 행위를 벌이고 있을 때는 아직 원나라로부터 그의 복위가 승인된 시기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중은 커녕 거의 매일같이 여자들과 어울려 난잡한 행동을 일삼고 있었다.
한때 충숙왕이 어느 선비 가문의 며느리로 있던 남씨라는 여자를 강간하고 노영서라는 심복에게 주었는데, 충혜왕 역시 그녀를 강간하고 노영서에게 돌려 주었다.
이 같은 충혜왕의 폐륜 행위에 대한 소문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의주와 정주 고을 사람들은 나라가 소란하다며 짐을 꾸려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이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원나라 조정은 그해 11월에 중서성 단사관 두린과 직성사인 구통을 개경에 파견하여 충혜왕에게 국새를 내려 복위를 인정하였다.
두린 일행은 개경에 당도하자 숙휘령공주를 찿아 원나라 왕이 보낸 술을 건넸는데, 이 때 공주는 은밀히 충혜왕이 자신을 강간한 일을 고하였다. 그러자 두린 일행은 수하들을 시켜 충혜왕을 비롯한 관련자 홍빈, 한첩목아불화, 조운경, 황겸, 백문거, 왕백, 주주, 이안, 한승, 정거재, 배성경 등을 포박하여 연경으로 압송하였다.
충혜왕이 원나라로 압송되자 정권은 숙위령공주에게 넘어갔다. 그녀는 충혜왕이 자신을 강간하도록 방조한 찬성사 전천기를 정동성에 가두고 정동성 관리들을 대폭 교체하였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426 : 고려의 역사 195 (제28대 충혜왕실록 3) (0) | 2011.11.20 |
---|---|
한국의 역사 425 : 고려의 역사 194 (제28대 충혜왕실록 2) (0) | 2011.11.19 |
한국의 역사 423 : 고려의 역사 192 (제27대 충숙왕 실록 9) (0) | 2011.11.17 |
한국의 역사 422 : 고려의 역사 191 (제27대 충숙왕실록 8) (0) | 2011.11.16 |
한국의 역사 421 : 고려의 역사 190 (제27대 충숙왕실록 7) (0) | 2011.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