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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23 : 고려의 역사 192 (제27대 충숙왕 실록 9) 본문
한국의 역사 423 : 고려의 역사 192 (제27대 충숙왕 실록 9)
5. 원사(元史)에 나타난 고려 관련 기록
원사(元史)인 <몽골비사>를 보면 몽골과 고려는 형제관계로 기술하고 있으며 고려와 관련된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고려는 원나라 입장에서는 중요한 나라였다.
대흥안령 남단에서 발원한 할흐강이 보이르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곳 '할힌곰솜'이라는 곳에 석상이 있는데, 이름은 '꼬우리'(꾸리:Khori 고구려, 고찌, 구리)족의 조상들이 세운 석상이다. 이 석상은 '코리족'의 거주 지역으로 몽고족과 통혼의 풍습을 지닌 민족으로 고유한 풍습과 민족설화를 가지고 있다.
원-고려 관계는 특이한데, 몽고 군대는 가는 곳마다 먼저 적국에 사신을 보내 동정을 살피면서 항복을 제의한다. 만약 항복을 거부하거나 사신을 죽이거나 하면 가차없이 공격을 실시하여 초토화시키는 전법을 사용하였다. 점령한 적국은 남여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살해하여 짜른 머리로 탑을 쌓을 정도로 잔인한 민족이었다. 이러한 공포는 주변지역으로 전파되면서 공포에 딸게 되었고 몽고군을 방어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나라는 스스로 먼저 항복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몽고군은 고려를 7차레나 침공하여 항복을 강요하였으나 고려 조정인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들어가서 30여 년을 저항하였다. 그러나 결국 고려 원종이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몽고에 항복함으로써 몽고와 고려는 형제관계를 맺고 부마국이 된 유일한 나라이다.
1224년 몽고 사신 저여고가 살해되자 1231년 태종 3년에 살리타이가 침공하였다. 그러나 항복을 전제로 출륙환도를 약속하자 몽고군은 강화후 철수하였는데, 몽골은 고려인들과 동질성을 의식하고 스스로 항복하도록 하여 복속시키고 원 왕실과 고려 왕실과의 통혼으로 혈통관계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당시 원 세조는 여진이 고려를 자주 침공하는 것을 엄금토록 지시를 내렸고, 관리로 하여금 고려 국민들을 보호하도록 하기위해 파사에 명하여 군대를 주둔시켜 압록 서부 지역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원사에는 다른 중국 사서에 비해 고려와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다. 고려와 관련하여 조유(황제가 직접 타으름), 위주(황제가 위로하고 달램), 조사(황제가 친히 내라는 것) 등 각별하게 대하였으며, 고려 왕이 연경에 내조하면 원 황제는 우조답지(황제가 친히 넉넉하게 보답)로 대접하였다고 한다. 고려 왕이 병이 나면 직접 약을 보냈고, 원 조정과 연경에는 고려풍이 유행하였고 고려문물을 귀하게 여겼으며 고려 술은 면세품이었다. 그래서 고려인들이 만주 지역에서 활개를 치고 다녔고, 고려 원종이 몽고에 내조했을 때 황제는 "경이 늦게 내조하여 징키스칸 종친들보다 반열이 낮다는 점을 이해하기 바란다"라며 위로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고려 원종이 빨리 항복하고 내조하였다면 종친들과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몽고가 점령한 수많은 나라 중에서 고려는 국체를 유지한 유일한 나라로 몽고의 직속령이 아닌 자치국으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자치국으로 대우를 받았다지만 속국이나 마찬가지로 모두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비록 고려가 국체를 유지하였지만 왕의 칭호 앞에는 몽고에 충성한다는 의미의 '충'자를 붙여야 했으며, 부마국으로 전락하여 몽고 왕실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여야 했다. 또 태자는 어린 시절부터 볼모로 연경으로 보내져 몽고 왕실에서 몽고 풍습과 생활을 익히고 몽고 여자와 결혼하여 지내다가 거의 몽고인이 되어 돌아와서 고려 왕이 되었다.
궁중에서는 몽고 공주인 왕비에게 빌붙어 날뚜는 간신배들이 넘쳐났으며 왕과 왕비, 몽고 왕비와 고려인 후궁사이에 갈등이 확산되였고 조정의 대소사가 몽고 왕비에 의해서 대부분 결정되고 주도되었다. 또 왕이 연경에 몇 년씩 상주하면서 문서로 고려 조정의 대소사를 지시하였고 연락을 맡은 수행원들이나 조정의 백관들이 개경과 연경을 밤낮없이 드나들어야 했다. 한편 몽고 왕비가 조정을 마음대로 쥐흔드는 바람에 고려 왕이 실권을 잃고 낙심하여 주색과 오락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 왕이 고려인 후궁을 총애한다면 몽고 왕비의 질투로 격심한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서 왕이 몽고 왕비를 심하게 구타하는 등 문제가 발생하자 몽고에서 고려 왕을 연경으로 호출하여 심문을 하여 정황이 확실하다면 세자를 왕위를 계승시키고 폐위를 시키거나 연금하기도 하였다. 또 왕비의 편지나 탄원에 의해 군사를 대동한 조사관이 수시로 파견되어 조사를 벌였고 관련자들은 모두 잡혀 몽고 연경으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또 결과적으로 문제가 되면 고려 왕도 연경으로 압송되어 연금상태로 지내야 했고 폐위와 복위를 반복했다. 원나라 황제가 바꾸면 고려 국왕의 입장도 바꾸기도 하여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고려 복귀 명령을 어긴 충선왕의 경우에는 왕이 유배에 처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고려 사회에는 몽고풍이 유행하였고 왕을 포함한 조정 대신들도 변발을 하는 등 몽고인화 되어 갔다. 또 문제가 생기면 왕이 압송되거나 옥새를 빼앗끼기도 하였고 몽고 조정의 실권자를 등에 업거나 몽고 조정에 연줄이 있는 권문세족들이 고려 조정과 고려 사회를 마음대로 수탈하고 권력을 휘들렀다. 왕이 왕이 아니요 백관들이 고려 백관들이 아니었다. 고려 왕은 수시로 연경으로 호출되거나 조사를 받았고 오랫동안 심양왕 왕고의 왕위찬탈 음모로 격심한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이것은 몽고가 심양왕을 이용하여 고려 왕을 견제하였고 한편으로는 갈등을 부추기면서 고려의 대몽항쟁 의식을 차단하는 데 주력하였던 정치적인 책략이었다.
몽골사 요약
* 북방 유목민족 시대
BC 3세기~AD 12세기까지 몽골족은 부족 국가로 소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BC 8세기부터 약 500년간 흑해와 북쪽 스카타이 문화가 융성하였다.
흉노족(훈족)이 유목민족으로 최초의 통일 국가를 형성하여 BC 209년 경에는 동으로 한반도, 서로 퍼키, 남으로 만리장성, 북으로는 바이칼 호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흉노족은 전한 황제 당시에는 전한으로부터 조공을 받을 정도로 강성하였고 전한 무제 당시에는 흉노 정벌로 오랫동안 패권을 다투었으며 영역을 양보하였으나 귀멸되지는 않았다.
AD 2세rl 경에는 선비족이 흉노를 지배하였고, 5세기 경에는 회북에 진출하여 북위를 건국하였다.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유연국이 몽골을 지배하였고 그 후 투루크계 돌궐족이 일어나 몽골을 지배하면서 수.당과 같이 고구려를 침공하는데 참여하였다. 그 후 위그루족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하엿고 뒤이어 거란족이 916년부터 1125년까지 지배하였다.
* 몽골제국 시대(1206~1368년)
12세기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에 예속되었다가 징기스칸의 등장으로 몽골제국이 세워지게 된다.
징기스칸은 1162년 몽골족 예수게이 아들로 태어났다. 1206년 징기스칸은 몽골을 통일하고 우주의 지배자라는 징기스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215년 북경에 입성하였고 1227년에는 서하 점령 전쟁 중 사망하였다. 재위 22년 동안 대제국을 건설하였고 조치, 차카타이, 어거데이, 톨로이 등 4 아들에게 제국을 분리하여 영토를 나누어 주었다.
2대 태종 어거데이칸(Ogotai khan, 1229~1241년, 3남)이 즉위하여 1234년 금나라를 정복하였고 3차례(1231, 1232, 1235년)나 고려를 침공하였다. 1240년 장자 바투에 의해 러시아 키에프 공국이 정복되었고, 1241년 폴란드/헝거리를 침공하였다.
태종이 죽자 1242~1246년까지 어거데이 부인이 통치하였는데, 태종 사후 5년 동안 자식들 간에 치열한 왕위 계승 쟁탈전이 전개되었다.결국 어거데이 아들인 구육 칸(1246~1248년, Guyuk khan)이 3대 정종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재임 2년 만에 갑자기 사망하게 되자 1248~1251년까지 구육 칸의 부인이 섭정하였다. 또한 치열한 왕위 계승전쟁을 벌여 징기스칸의 4남 톨로이 아들인 멍케 칸(Munkhe khan)이 1252년 제4대 헌종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운남, 티벳을 정벌하였고 고려도 2차례(1252, 1254년)나 침공하였고, 1258년 홀레구에 의해 페르시아.소아시아 일대를 장악하였다. 1259년 남송 원정 도중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제5대 세조 쿠빌라이(Khubilai, 1260~1294년)는 톨로이 아들이며 멍케 칸의 동생이다. 아락 어케와 왕위 계승 전쟁을 벌여 승리하여 등극하였다. 등극 후 수도를 하라호린에서 상도-북경으로 이전하였으며 1271년 국호를 원으로 선포하였다. 1272년 남송을 멸망시키고, 두 차례(1274, 1281년) 일본 정벌에 실패하였다. 그외 자바도 원정하였다.
* 쇠락기/멸망
쿠빌라이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치열한 다툼으로 왕실 내부에 분열이 발생하였고, 라마승들의 횡포로 인해 재정적인 파탄이 초래되었다. 가뭄, 홍수, 지진 등 잇따른 자연재해로 1333년 마지막 황제 토곤 티무르(Togun temur, 순재)가 즉위하였으나 사치와 방탕, 환관들에 의한 문란 등 국력이 쇠진하여 주원장에 의해 몽골 고원으로 패퇴하였다. 1483년 몽골의 러시아 지배도 종료되었다.
1368년부터 1391년까지 몽골 고원으로 패퇴한 북원은 오이라트, 타타르부의 부활이 있었으나 명의 주원장에 의한 3차례에 걸친 친정 정벌로 쇠락하였으며 1551년 명나라와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마시장을 다시 열게 되었다. 그러나 한 번 무너진 대제국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력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징기스칸의 위대한 정복은 동서문화를 교류시켰고 실크로드를 개척하였으며 서양 문화권에 민족 대이동의 물결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주야로 깁발을 꼿고 몽골 기병이 달리는 거미줄 같은 연락망은 대제국을 잇는 교통망이었으며 보름이면 국경선에서 몽골 조정에 도달할 정도로 신속한 연락망이엇다. 이 통로는 점령국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물자 이동로인 무역로였으며 신속한 정보가 교류되는 오늘날의 통신로였다. 그들의 가공할 생존력과 뛰어난 기마전술은 적에게 기습이 가능하였고 분진합격의 원거리 우회전법 공격 전술, 후퇴전술, 매복전술, 공성전과 점령 후 무지바한 살륙과 방화로 전도시가 잿더미로 변하는 초토화 전술은소문만 듣고도 불안에 떨도록 적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들었다. 몽골군의 무자비한 공격은 페르시아 일대의 이슬람권 각국을 경악시켰고 종교적인 폭압과 폭정에 신음하던 이슬람권 국민들에게는 새로운 개혁의 기틀을 제공하였다.
그 후 몽골은 1634년에 발흥한 준가르 제국에게 복속되었고, 1636년 만주족의 청나라가 내몽골 지역을 점령하였다. 1689년 청.러 '네르친스크 조약'에 의해 국경선이 확정되면서 부라이트 몽골은 러시아에 편입되었다. 1717년에는 청나라가 몽골 전역을 장악하였고 1727년에는 '보오린 조약'을 체결하였다.
몽골제국, 원, 북원 황제
몽골 제국
1206년 ~ 1271년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제1대 | 원 태조 (元太祖) |
법천계운성무황제 (法天啓運聖武皇帝) (성길사한<成吉思汗, 칭기즈 칸>) |
패아지근철목진 (孛兒只斤鐵木眞) (테무진) |
- | 1206년 ~ 1227년 |
- | 원 목종 (元穆宗) (원 세조 추숭) |
도녕황제 (道寧皇帝) |
패아지근출적 (孛兒只斤朮赤) (주치) |
- | - |
- | 원 성종 (元聖宗) (원 세조 추숭) |
충무황제 (忠武皇帝) |
패아지근찰합태 (孛兒只斤察合台) (차가타이) |
- | - |
임시 | 원 예종 (元睿宗) (원 세조 추숭) |
경양황제 (景襄皇帝) |
패아지근타뢰 (孛兒只斤拖雷) (툴루이) |
- | 1227년 ~ 1229년 |
제2대 | 원 태종 (元太宗) |
영문황제 (英文皇帝) |
패아지근와활태 (孛兒只斤窩闊台) (우구데이) |
- | 1229년 ~ 1241년 |
제3대 | 원 정종 (元定宗) |
간평황제 (簡平皇帝) |
패아지근귀유 (孛兒只斤貴由) (귀위크) |
- | 1241년 ~ 1248년 |
제4대 | 원 헌종 (元憲宗) |
환숙황제 (桓肅皇帝) |
패아지근몽가 (孛兒只斤蒙哥) (몽케) |
- | 1248년 ~ 1259년 |
제5대 | 원 세조 (元世祖) |
성덕신공문무황제 (聖德神功文武皇帝) |
패아지근홀필렬 (孛兒只斤忽必烈) (쿠빌라이) |
중통(中統) 1260년 ~ 1264년 지원(至元) 1264년 ~ 1271년 |
1260년 ~ 1271년 |
원(元)
1271년 ~ 1368년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제1대 | 원 세조 (元世祖) |
성덕신공문무황제 (聖德神功文武皇帝) |
패아지근홀필렬 (孛兒只斤忽必烈) (쿠빌라이) |
지원(至元) 1271년 ~ 1294년 | 1271년 ~ 1294년 |
- | 원 유종 (元裕宗) (원 성종 추숭) |
문혜명효황제 (文惠明孝皇帝) |
패아지근진금 (孛兒只斤眞金) (징김) |
- | - |
제2대 | 원 성종 (元成宗) |
흠명광효황제 (欽明光孝皇帝) |
패아지근철목이 (孛兒只斤鐵穆耳) (테무르) |
원정(元貞) 1295년 ~ 1297년 대덕(大德) 1297년 ~ 1307년 |
1294년 ~ 1307년 |
- | 원 순종 (元順宗) (원 무종 추숭) |
소성연효황제 (昭聖衍孝皇帝) |
패아지근답랄마팔랄 (孛兒只斤答剌麻八剌) (다르마바라) |
- | - |
제3대 | 원 무종 (元武宗) |
인혜선효황제 (仁惠宣孝皇帝) |
패아지근해산 (孛兒只斤海山) (카이산) |
지대(至大) 1308년 ~ 1311년 | 1307년 ~ 1311년 |
제4대 | 원 인종 (元仁宗) |
성문흠효황제 (聖文欽孝皇帝) |
패아지근애육려발력팔달 (孛兒只斤愛育黎拔力八達) (아유르바르와다) |
황경(皇慶) 1312년 ~ 1313년 연우(延祐) 1314년 ~ 1320년 |
1311년 ~ 1320년 |
제5대 | 원 영종 (元英宗) |
예성문효황제 (睿聖文孝皇帝) |
패아지근석덕팔랄 (孛兒只斤碩德八剌) (시디발라) |
지치(至治) 1321년 ~ 1323년 | 1320년 ~ 1323년 |
- | 원 현종 (元顯宗) (원 진종 추숭) |
광성인효황제 (光聖仁孝皇帝) |
패아지근감마랄 (孛兒只斤甘麻剌) (카말라) |
- | - |
제6대 | 원 진종 (元眞宗) |
치효황제 (致孝皇帝) (진왕<晉王>) |
패아지근야손철목아 (孛兒只斤也孫鐵木兒) (예순테무르) |
태정(泰定) 1324년 ~ 1328년 치화(致和) 1328년 |
1323년 ~ 1328년 |
제7대 | - | 덕효황제 (德孝皇帝) (폐황제<廢皇帝>, 유주<幼主>) |
패아지근아속길팔 (孛兒只斤阿速吉八) (라기바흐) |
천순(天順) 1328년 | 1328년 |
제8대 | 원 문종 (元文宗) |
성명원효황제 (聖明元孝皇帝) |
패아지근도첩목이 (孛兒只斤圖帖睦爾) (투그테무르) |
천력(天曆) 1328년 ~ 1329년 | 1328년 ~ 1329년 |
제9대 | 원 명종 (元明宗) |
익헌경효황제 (翼獻景孝皇帝) |
패아지근화세랄 (孛兒只斤和世剌) (쿠살라) |
천력(天曆) 1329년 | 1329년 |
제8대 (복위) |
원 문종 (元文宗) |
성명원효황제 (聖明元孝皇帝) |
패아지근도첩목이 (孛兒只斤圖帖睦爾) (투그테무르) |
지순(至順) 1330년 ~ 1332년 | 1330년 ~ 1332년 |
제10대 | 원 영종 (元寧宗) |
충성사효황제 (沖聖嗣孝皇帝) |
패아지근의린질반 (孛兒只斤懿璘質班) (린칠반) |
지순(至順) 1333년 | 1332년 ~ 1333년 |
제11대 | 원 혜종 (元惠宗) |
선인보효황제 (宣仁普孝皇帝) (순황제<順皇帝>) |
패아지근타환첩목이 (孛兒只斤妥懽帖睦爾) (토곤테무르) |
지순(至順) 1333년 원통(元統) 1333년 ~ 1335년 지원(至元) 1335년 ~ 1340년 지정(至正) 1341년 ~ 1368년 |
1333년 ~ 1368년 |
북원(北元)
1368년 ~ 1388년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제1대 | 원 소종 (元昭宗) |
무승화효황제 (武承和孝皇帝) |
패아지근애유식리탑 (孛兒只斤愛猷識里答) (아유르시리다르) |
선광(宣光) 1370년 ~ 1378년 | 1370년 ~ 1378년 |
제2대 | 원 평종 (元平宗) |
영효황제 (寧孝皇帝) |
토구스 테무르 우스칼 칸 | 천원(天元) 1378년 ~ 1388년 | 1378년 ~ 138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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