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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22 : 고려의 역사 191 (제27대 충숙왕실록 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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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22 : 고려의 역사 191 (제27대 충숙왕실록 8)

두바퀴인생 2011. 11. 16. 03:56

 

 

 

한국의 역사 422 : 고려의 역사 191 (제27대 충숙왕실록 8)   

 

 

제27대 충숙왕실록

(1294~1339년, 재위 1313년 3월~1330년 2월, 1332년 2월 복위~1339년 3월, 총 24년)

 

4. 원의 내정 간섭기 고려 사회

고려는 100년간 원의 간섭을 받았다. 이렇게 원 간섭기가 100년이나 지속되는 동안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의 생활 깊숙히 까지 걸쳐 적지 않은 몽골의 영향을 받았다. 관제와 용어를 격하시키고 내정간섭을 일삼았으며 물자를 징발하는 등 민족의 자주성을 훼손하는 일 말고도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시키는 일 등이 일어나는 시기가 되었다.


원나라가 통치하던 시기, 전쟁의 영향과 전후 고려가 원나라에 부속되었던 시기의 관계의 확립은 양국 간의 인적 교류가 전대에 없을 정도로 빈번하게 교류하게끔 만들었다. 고려 민중이 원나라에 대량 이민하여 거주하게 됐고 원나라의 적지 않은 사람들도 고려에 건너가 거주했다. 요양행성은 원 시기 고려 이민이 가장 집중되어 있던 지역이었다.

 

1233년 고려의 반역자인 홍복원이 몽고에 투항했다. 그는 북부의 백성들을 모집하여 요양과 심양지역으로 이민을 오도록 했다. 그 후 몽고는 고려를 수차례나 정벌했다. 그 때마다 투항했거나 포로된 대부분의 고려인들을 홍복원에게 넘겨주어 통치하게 했다. 후에 고려에서는 영녕공(永寧公) 왕순(王淳)을 몽고에 인질로 보내었다. 왕순은 몽고의 종실 여자를 아내로 삼아 원조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홍복원과 고려 이민의 관리권을 쟁탈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홍복원이 이 때 피살되었다.


쿠빌라이가 즉위한 이후 안무고려군민총관부(按撫高麗軍民總管俯)를 설치했다. 쿠빌라이는 또 고려, 여진 , 한군(寒軍), 만호부(萬戶俯)를 증설했다. 이 두 기구는 모두 요양과 심양 일대에 두었으며 주로 고려인의 이민 사무를 관장했다. 1296년 상기의 두 기구를 합병하여 '심양등로안무고려군민총관부'로 개편했다. 이 기구를 간칭 하여 '심양로(瀋陽路)'라 했다. 요양 옛 성에 소재지를 두고 총관 5, 천호 24, 백호 25를 관할했다.

 

심양로는 행정구역상 요양행성에 속했는데, 요양과 심양 일대의 고려 군민을 관할하기 위해 설립한 전문기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동행성을 설립할 때 심양로를 정동행성에 귀속시켰던 것이다. 원조 중,후기 심양로는 원에 상주하고 있는 고려 왕실의 성원 심왕의 통치를 받았다. 이런 시점에서 볼 때 심양로는 원 경내의 특수한 행정기구였다고 할 수 있다.


요양행성의 고려 이민은 양국 전쟁시기 투항한 자와 포로된 사람을 제외하고도 적지 않은 수가 스스로 고려 경내에서 이민해 온 사람들이었다.

 

 

원의 내정 간섭

 

원나라의 침략을 받아 약 30년 동안 항전을 벌인 끝에 결국 강화가 성립되고 항전을 주도하던 최씨 무신정권은 붕괴되었다. 이와 함께 왕정이 회복되었지만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고려의 국왕은 원나라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나라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제후국에 걸맞은 것으로 격하되었다. 아울러 관제도 개편되고 격도 낮아졌다. 또 원나라는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빼앗았으며, 자비령 이북의 땅도 차지하여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였다. 또한 제주도에는 삼별초를 제거한 뒤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경영하였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새로운 지배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을 이른바 권문세족이라고 하는데, 고려 전기부터 있던 문벌귀족 일부와 무신집권기에 성장한 가문, 그리고 몽골어 통역관으로 출세하는 등 원나라와의 친선 관계를 통해 새로 등장한 가문으로 구성되었다. 권문세족은 권력을 앞세워 민중의 토지를 빼앗아 광대한 농장을 만들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는 등 사회 모순을 다시 격화시켜 고려의 정치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권문세족의 불법행위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은 일반 백성들은 살던 곳을 떠나 떠도는 신세가 되었고, 이것은 국가의 통치질서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신진 사대부의 성장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는 가운데서도 농업 생산력이 꾸준히 발전하였다. 먼저 원나라와 전쟁 중에 고려의 독자적인 의술이 발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인구가 증가하였으며, 그 결과 집약적 농업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때에 중국 대륙으로부터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는 농업 기술이 전래되어 휴한을 극복하고 한 토지에서 해마다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과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새로운 농업을 도입하여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킨 사람들은 주로 지방의 중소지주들이었다. 이들은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고 점차 중앙관료로 진출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들을 신진사대부라고 한다. 원나라의 간섭과 측근 정치로 인하여 관직으로의 진출이 제한되는 등 정치적 지위가 불안정하였던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수용하여 학문적 기반으로 삼고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으며, 또한 토지 탈점 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개혁을 주장하여, 결국 권문세족과 대립하게 되었다.

 

고려 말의 개혁 정치와 멸망

14세기 후반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되자 공민왕은 반(反)원나라 운동을 일으켜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하였다. 공민왕은 원나라를 몰아낸 후 신돈 및 신진 사대부와 함께 대대적힌 사회 개혁을 추진해나갔다. 그리하여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나 재산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민으로 해방시켜 주었다. 그러나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까지 시해되면서 권문세족이 다시 등장하여 정치 권력을 독점하면서 개혁은 중단되고 말았다. 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는 등 고려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후 고려는 명나라와 철령 이북의 땅을 둘러싸고 영토 갈등을 빚다가 끝내 요동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요동정벌군의 사령관 이성계는 어려운 나라 사정 때문에 명나라와의 전쟁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신진 사대부는 이성계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권문세족들을 몰아내고 다시금 본격적으로 개혁을 실시하였으며, 더 나아가 1392년에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였다.

 

정치

고려는 새로운 통일 왕조로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려의 성립은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이행하는 한국 역사의 내재적 발전을 의미한다. 신라 말기의 6두품 출신 지식인과 호족 출신을 중심으로 성립한 고려는 골품 위주의 신라 사회보다 더 개방적이었고, 통치 체제도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효율성과 합리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특히 사상적으로 유교의 정치 이념을 수용하여 고대적 성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군주가 스스로를 짐(朕), 궁궐을 황성(皇城), 군주의 존칭은 폐하(陛下), 차기 왕위를 예약한 왕자는 태자(太子), 왕의 어머니는 태후(太后), 군주의 명령은 조(詔)나 칙(勅)으로 불렀으며 궁궐 속 궁궐문을 제국에서만 사용하던 다섯 개로 만드는 등 사실상 제국에 걸맞는 제도와 규범을 갖추고, 또 주변국들로부터도 제국으로 인정받았으며, 13세기 원(元)나라에게 국권이 침탈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고려 시대는 외적의 침입이 유달리 많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줄기찬 항쟁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12세기 후반에 무신들이 일으킨 무신정변은 종전의 문신 귀족 중심의 사회를 변화 시키는 계기가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를 지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새롭게 성장한 신진 사대부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민본적인 정치 이념이 성립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 개혁이 진전되었다.

 

경제

고려는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전시과 제도를 만드는 등 토지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또, 문란해진 수취 체제를 다시 정비하면서 재정 운영에 필요한 관청도 설치하였다.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와 인구를 파악하기 위한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호적을 작성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조세, 공물, 부역 등을 부과하였다. 아울러 국가가 주도하여 산업을 재편하면서 경작지를 확대시키고, 상업과 수공업의 체제를 확립하여 안정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

 

농업에서는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상업은 시전을 중심으로 도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지방에서도 상업 활동이 증가하였다. 수공업도 관청 수공업 중심에서 점차 사원이나 농민을 중심으로한 민간 수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해 갔다.

 

사회

고려사회는 신분사회였다. 중인, 평민, 천민, 양반관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귀족들은 문반, 무반, 귀족과 왕족이고 중인은 서리와 기술관이다. 귀족과 중인은 지배층이고 피지배층은 평민과 천민이 있다. 귀족은 공작(公爵), 후작(侯爵) 등의 제도를 두어 영국의 귀족과 유사한 형태를 갖췄다. 평민은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있는데 농민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천민은 노비와 향, 소, 부곡민, 화척, 재인등이 있었다.

 

문화

고려 초기에는 과거제와 함께 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고, 성종 이후부터는 문치주의가 성행함에 따라 필수 교양으로 발전하였다. 이로 인해 여러 우수한 시인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사치 생활을 충족하기 위하여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만들어 즐겼으므로 예술 면에서도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분야는 공예였다. 공예는 생활 도구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도루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자기 공예가 뛰어났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나 다른 종교도 금하지 않고 자유로이 믿게 하는 등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