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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21 : 고려의 역사 190 (제27대 충숙왕실록 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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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21 : 고려의 역사 190 (제27대 충숙왕실록 7)

두바퀴인생 2011. 11. 15. 01:21

 

 

 

한국의 역사 421 : 고려의 역사 190 (제27대 충숙왕실록 7)   

 

 

제27대 충숙왕실록

(1294~1339년, 재위 1313년 3월~1330년 2월, 1332년 2월 복위~1339년 3월, 총 24년)

3. 왕고의 왕위 찬탈 음모와 충숙왕의 시련(계속)

이처럼 충숙왕이 왕위를 박탈당하고 갇히는 신세가 되자 왕고가 국왕의 권한을 대신하였다. 그는 또 조정에 사람을 파견하여 충숙왕의 측근들인 환윤전, 김성만, 이공, 강려 등에게 장형을 가하여 유배시켰으며, 충숙왕의 여비를 더 이상 보내지 말 것을 강권하였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경사만 등이 중심이 되어 충숙왕의 복위를 건의하는 한편 편지를 원나라 중서성에 보냈으나 왕고 세력의 방해로 일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왕고는 10여 명의 수하를 고려 조정에 보내 충숙왕이 폐위되고 왕고가 이미 국왕에 올랐다고 말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신들을 모아 폐위된 충숙왕의 그릇된 행동을 일일이 기록하여 원 왕실에 올리라고 강압하였다. 이에 권한공 등의 왕고파 일당은 백관들을 자운사에 모아 놓고 충숙왕을 비토하는 글을 작성하여 서명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윤신좌, 민종유, 김륜 등의 강력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권한공 등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채하중 등과 의논하여 왕고의 명령으로 경사만, 김인윤, 김지경 등 중신들을 순군에 가두고 다시금 충숙왕 폐위 작업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충숙왕을 비방하는 글월을 작성하여 일부 중신들의 서명을 받고 원나라 중서성과 한림원에 제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왕고파는 유청신, 오잠 등이 중심이 되어 고려의 국호를 폐하고 원나라에서 직접 고려국을 통치해줄 것을 청원하였지만 원 왕실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처럼 위태로운 상황이 전개되어 충숙왕이 거의 폐위 직전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도 행운이 찿아들었다. 충선왕을 귀양보내고 충숙왕을 불러들였던 영종이 살해되어 죽고 태정제가 즉위한 것이다. 이 덕분에 충선왕이 먼저 풀려나고 1324년 2월 충숙왕도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왕고의 왕위찬탈 음모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태정제의 신임을 얻은 왕고는 다시금 고려 국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유청신과 오잠을 시켜 중서성에 다음과 같은 참소를 올렸다.

 

"고려 국왕 왕도는 이미 눈이 먼 데다가 귀까지 멀어 벙어리가 되었기 때문에 친히 정사를 돌 볼 수 없는 불구자입니다. ~중략~ 상왕(충선왕)이 인종 황제에게청하여 왕도를 고려 국왕으로, 왕고를 세자에 책봉하기로 한 것이 이미 오래전 일입니다. 그런데 영종 때에 이르러 왕도와 백안독고사가 공모하여 김이로 하여금 상왕을 꾀어 왕고의 세자인을 훔쳐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왕이 지급했던 왕고의 토지와 사택, 그리고 그의 신하 유청신, 오잠 등 140여 명의 토지와 사택읋 강탈하였습니다."

 

이 같은 제소를 받은 태정제는 1328년 7월 평장정사 매려와 사인 역특미실불화 등을 고려 조정에 보내 진상을 확인토록 하였다. 이 때 왕고의 도당인 박중인, 조유, 조운경, 고자영 등이 동행하였다.

 

고려에 도착한 매려는 오잠 등의 참소문에 대한 진위를 가리기 위해 충숙왕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충숙왕은 병을 핑계로 하여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매려는 오잠 말대로 충숙왕이 귀가 먹고 눈이 먼 불구자인 줄  알고 자기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직접 왕의 처소로 가서 태정제의 조서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충숙왕을 힐난하며 심문하기 시작하였는데 의외로 충숙왕이 조리있게 대답하여 매려는 당황하였다.

 

충숙왕은 자신이 세자인을 가져온 것에 대해 왕고가 심양왕에 머무르며 동시에 고려 세자가 되는 것은 두 가지 왕위를 겸할 소지가 있기에 충선왕의 명에 따라 세자인을 받아온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유청신과 오잠의 참소문 중에 잘못된 부분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유청신 등의 토지와 사택을 몰수한 것은 그들의 재산이 모두 백성들의 고혈을 짠 강탈품이기 때문에 환수하여 옛 주인에게 돌려 주었다고 역설하였다.

 

충숙왕의 이 같은 항변을 접하자 매려는 유청신과 오잠의 참소문이 거짓이라는 판단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그를 따라온 조유 등의 왕고파 일당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또한 매려는 충숙왕의 무고함을 원나라 황제에게 보고하겠다고 약속하고, 충숙왕의 건의에 따라 당시 고려에 와서 행패를 일삼던 원나라 탐관들을 본국으로 소환해가기까지 하였다.

 

이 일 이후 왕고는 더 이상 충숙왕을 몰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1334년 충숙왕이 원에서 귀국할 때 왕의 행궁을 찿아와 문안 인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원 왕실의 명령에 따라 충숙왕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런데 1339년 충숙왕이 죽자 왕고는 원으로 되돌아가면서 다시 계략을 꾸몄다. 원으로 돌아가던 그는 평양에 일시 머무르며 측근 조적과 더불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계획을 짰던 것이다.

 

왕고는 우선 자신의 수하 박전을 개경에 보내 "원 왕실에서 이미 심양왕을 고려 국왕에 봉했다." 고 거짓말을 하도록 하였다. 당시 충혜왕은 원 왕실의 불신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왕고의 이같은 거짓말은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충혜왕이 즉시 홀치 60여 명의 기병을 평양으로 보내 왕고의 무리를 쫓아가게 하였다. 그래서 충혜왕은 왕고의 행렬을 멈추게 하고 왕고를 개경으로 불러들여 직접 심문할 계획이었으나 그가 보낸 기병이 왕고의 행렬을 따라잡지 못하는 바람에 왕고를 개경으로 호송하지는 못했다.

 

왕고는 그 후 줄곧 원나라에 머무르다가 1345년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토록 열망하던 고려 국왕에 오르지 못하고 그해에 생을 마감하였다.

 

 

심양왕과 고려왕과의 갈등

 

충선왕이 원에 머무는 동안 1307년 충렬왕 33년에 무종을 도와서 그가 즉위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에 충선왕은 작호를 받아 심양을 포함한 랴오양(요양) 지방 일대에 흩어져 사는 고려인을 다스리는 권한을 위임받있는데, 1310년 심왕으로 개칭되었다.

 

이 지역은 몽공 침략 이후 고려의 이유민과 전쟁포로들이 많이 이주하여 흩어져 살고 있었다. '안무고려군민총관부'라는 특수 기관을 설치하여 그 장관에 홍복원 일족 및 영녕공 준이 임용되었다.

 

그래서 충선왕이 심양왕에 봉해지면서 홍씨 일족과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1312년 충선왕 4년에 홍복원의 손자 홍중희, 홍중경 형제는 충선왕의 개혁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원의 중서성에 대질변론을 벌이지만, 원 황제의 각별한 충선왕 옹호로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홍중희 형제는 충선왕이 고려왕과 심양왕을 겸직하는 것이 부당하다며 주장하였고, 고려에 행성 설치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는 고려를 원나라 일개 행성으로 국가 기능을 말살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고려내에서도 명렬히 반대하였고 원의 인종도 논의를 금지시키는 바람에 마무리되기도 하였다.

 

1313년 충선왕이 고려 왕의 지위는 아들 충숙에게 물려주었고, 1316년 심양왕의 지위는 세자이며 조카인 왕고에게 분리하여 승계시켰다. 그러자 고려 왕과 심양왕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시작되기 시작하였다.

 

1320년 충숙왕 7년에 원의 영종이 즉위하자 영종은 왕고를 총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왕고는 본격적으로 고려 왕을 넘보기 시작한다. 고려 조정에서는 최종철, 권한공, 채하중, 조적 등이 심왕당을 만들어 왕고를 고려 왕에 옹립하려고 기도하였다.

 

1321년에는 심왕당의 참소로 충숙왕이 원에 호출되었고 국왕인을 빼앗기고 연경에 구류되는 등 왕권을 행사할 수가 없게 되었다.

 

1323년 원의 영종이 살해되고 태정제가 즉위하자 충숙왕은 국왕인도 돌려받고 귀국하게 되자 심왕당을 대부분 제거하게 된다.

 

1339년 충숙왕 복귀 8년에 사망하게 되자 충혜왕이 즉위하게 되는데, 심양왕은 다시 원의 태사 백안의 추원하에 고려 왕위를 차지하려고 시도하면서 충혜왕과 대립하게 된다. 그래서 충혜왕이 기거하는 왕궁을 기습하였으나 실패하여 좌절되었다.

 

1345년 충목왕 1년에 심양왕 왕고가 사망하자 그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1354년 공민왕 3년에는 왕고의 손자 독타불화가 심양왕 자리를 승계하였다.

 

1356년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실시되자 부원세력들이 다시 독타불화를 고려 왕에 옹립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본인이 사양함에 따라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1374년 공민왕 사후 북원에서는 심양왕을 고려 왕에 임명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무산되는데, 이 당시 원이 명나라 주원장에게 쫓겨 몰락하고 있던 시기였다.

 

1376년 독타불화가 사망하자 심양왕은 공석으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