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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19 : 고려의 역사 188 (제27대 충숙왕실록 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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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19 : 고려의 역사 188 (제27대 충숙왕실록 5)

두바퀴인생 2011. 11. 13. 21:51

 

 

 

한국의 역사 419 : 고려의 역사 188 (제27대 충숙왕실록 5)   

 

 

제27대 충숙왕실록

(1294~1339년, 재위 1313년 3월~1330년 2월, 1332년 2월 복위~1339년 3월, 총 24년)

2. 충숙왕의 가족들

충숙왕은 공민왕후 홍씨를 비롯하여 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숙휘령공주, 수비 권씨 등 5명의 부인을 두었다. 그는 이들 부인에게서 3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공원왕후 홍씨가 충혜왕과 공민왕을 낳았으며, 조국장공주가 용산원자를 낳았다. 이들 가족 중 공원왕후를 비롯한 다섯 후비와 용산원자의 삶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충혜왕과 공민왕은 각 왕의 실록에서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공원왕후 홍씨(1298~1380년)

공원오아후 홍씨는 남양 출신으로 부원군 홍규의 둘째 딸이다. 홍규는 첯딸을 충선왕에게 시집보냈는데 그녀가 순화원비이다. 그리고 둘째 딸을 1313년 8월 왕위에 오른 충숙왕에게 시집보냄으로써 2대에 걸쳐 왕비를 낸 집안이었다.

 

홍씨는 입궁하여 덕비에 책봉되었으며, 1315년 아들 정(충혜왕)을 낳았다. 하지만 1316년 7월 충숙왕이 원나라 복국장공주와 혼인하게 되면서 대궐에서 밀려나 종실 정안공 집에 거처하였다. 그러자 충숙왕은 그녀를 잊지 못하여 밤마다 정안공의 집에 가서 자곤 하였는데, 이를 애처롭게 여긴 윤석, 손기 등이 왕에게 거처를 정안공 집으로 옮길 것을 권고하였다. 이에 따라 충숙왕은 정안공의 사저로 거처를 옮겼고, 홍씨는 그 이웃집에 머물도록 하였다.

 

이처럼 홍씨에 대한 충숙왕의 사랑은 극진하였다. 그래서 충숙왕은 자주 복국장공주의 눈을 피해 홍씨와 함께 미행을 즐기기도 하였는데, 이를 눈치 챈 복국장공주는 홍씨를 매우 미워하였다고 한다. 이 같은 심한 질투와 충숙왕에 대한 증오심으로 인해 복국장공주는 1319년에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 후 1324년 8월에 충숙왕은 다시 원의 조국장공주와 혼인하였다. 하지만 조국장공주 역시 이듬해 10월 용산원자를 낳은 후 산욕으로 죽는다. 이렇게 되면서 홍씨와 충숙왕의 부부애는 더욱 깊어지게 되어 1330년에는 둘째 왕자 기(공민왕)를 출산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 부부 사이에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330년 충숙왕은 정치에 염증을 느낀 상태에서 세자 정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는데, 이 때 정만길, 강융, 김원상 등이 간하는 말을 곧이듣고 홍씨를 고향으로 추방하고, 충혜왕과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1332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봍잡혀 가고 충숙왕이 복위하자 그녀는 다시 개경으로 소환되었다. 그리고 1339년 충혜왕이 복위한 이후에 그녀의 거처를 덕경부로 격상시켰으며, 1351년 공민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 문예부로 개칭된다. 이 때부터 그녀를 대비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홍씨는 공민왕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반대하고, 공민왕에게 누차에 걸쳐 신돈과 아울리지 못하게 당부하였다. 이 때문에 신돈은 그녀와 대립하였고, 신돈을 통해 개혁을 이루고자 하던 공민왕도 그녀를 피하였다. 그녀는 또 공민왕이 개혁작업의 일환으로 신하들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 잦아지자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여 공민오아과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1371년 공민왕이 신돈 일파를 제거할 때 유탁을 그의 도당으로 간부하고 죽이려 하자 홍씨는 사람을 시켜 유탁을 놓아주라고 요청했다. 이에 공민왕은 홍씨가 보낸 하인을 하옥하고 한동안 홍씨에 대한 문안을 중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공민왕은 1372년에 홍씨가 병이 들자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숭경왕 태후라는 존호를 올리고 화해하려 한다. 이 때 홍씨가 머물던 거처를 문에부에서 숭경부로 개칭한다. 그런데 이듬해 공민왕이 아들 우를 세자로 삼으려 하자 모자간의 갈등은 증폭된다. 홍씨는 우가 신돈의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세자로 세우는 것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또 공민왕이 벌이던 영전공사도 마찰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엇다. 공민왕은 영전공사를 실시하여 왕실의 권위를 되살리고자 하였으나 홍씨는 백성을 괴롭히고 국가 재정을 소비하는 큰 공사는 제왕으로서 할 바가 아니라고 반대하고 나섰다.

 

이렇듯 공민왕과 모후 홍씨의 첨예한 대립이 지속되는 가운데 1374년 9월 공민왕은 피살을 당하였다. 이 때 홍씨는 종실에서 적당한 인물을 선택하여 왕위를 잇고자 하였으나  시중 이인임 등 백관들을 앞세워 우를 왕으로 세우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그녀는 우왕과도 곧장 마찰을 일으키다가 1380년 정월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엿다. 능은 영릉이며 시호는 공원이라 하엿다. 후에 명덕태후로 추존되어 흔히 그녀를 명덕태후라고 불렀다.

 

복국장공주(?~1319년)

복국장공주 열련진팔랄은 원나라 영왕 야선첩목아의 딸이다. 1316년 7월 충숙왕에게 시집와 이 해 10월 개경에 왔다.

 

그녀가 개경에 왔을 때 충숙왕에게는 덩비 홍씨와 아들 정이 있었다. 덕비 홍씨와 충숙왕은 무척 금실이 좋았기 때문에 복국장공주는 홍씨를 무척 싫어했으며 질투도 심했다.이 때문에 충숙왕으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며 지내다가 1319년 9월 갑작스럽게 죽었다.

 

이 일로 원나라 중서성에서 공주의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선사 이상지를 보냈다. 이상지는 고려에 도착하자 공주의 궁녀 호라적 여자와 요리사 한만복을 심문한다. 그리고 한만복으로부터 충숙왕이 두 번에 걸쳐 공주를 심하게 구타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그들 두 사람을 원나라로 압송한다. 하지만 고려 조정은 백원항, 박효수 등을 원나라 중서성에 보내 한만복의 말이 거짓이라고 항변하여 충숙왕은 위기를 모면한다.

 

그해 12월에 공주의 초상화가 마련되어 순천사에 두었으며, 1343년에 원나라에서 복국장공주에 추봉되었다.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소생은 없었다.

 

조국장공주(1308~1325년)

조국장 공주 금동은 원나라 순종의 아들 위왕 아목가의 딸이다. 1324년에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충숙왕에게 시집왔으며, 이듬해 10월 한양 용산에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용산원자이다. 하지만 그녀는 산욕으로 인해 18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1343년에 원나라에서 조국장공주에 추봉하였다.

 

숙공휘령공주(?~1344년)

숙공휘령공주는 몽고 여자로 이름은 백안홀도이다. 백안 성씨가 당시 원나라 귀족이었으므로 그녀는 귀족 가문 출신 여자로 추측된다. 그녀는 충숙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원나라에 머물던 1330년에서 1332년 사이에 시집왔으며, 1332년 2월 충숙왕이 복위하여 1334년에 귀국할 때 동행하여 고려에 왔다.

 

1337년에 그녀를 경화공주에 봉하고 경화부를 신설하여 관속을 두었다.

 

1339년 충숙왕이 죽은 후에 충혜왕은 영안궁에서 수차에 걸쳐 연회를 베풀고 그녀를 초대하였다.  이 때 술좌석이 끝나자 충혜왕은 술에 취한 척하고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그녀의 침실을 덮쳤다. 하지만 그녀가 완강히 거부하자 송명리 등을 시켜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강간하엿다.

 

이튼날 공주는 이 일이 수치스러워 원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아랫사람을 시켜 말을 사들이게 하였다. 그런데 충혜왕이 이 일을 전해듣고 이엄과 윤계종을 시켜 개성의 말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였다. 그 후 1343년에 원나라 사신 두린 등이 와서 공주에게 어주를 전달하고 대경 타적과 낭중 별실가를 시켜 충혜왕을 붙잡아갔다.

 

그러자 공주는 찬성사 정천기를 정동성에 감금하고 이어 김지겸에게 정동성을 임시로 대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344년 충혜왕이 귀양길에서 죽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해에 공주도 죽었다. 1367년에 원나라에서 숙휘령공주라는 시호를 주었다. 능호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소생도 없었다.

 

수비 권씨(?~1304년)

수비 권씨는 복주 사람으로 좌상시 권형의 딸이다. 그녀는 원래 밀직상의 전신의 아들에게 시집갔으나 권형은 전씨 집안이 몰락하자 이혼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336년 충숙왕의 내지를 받아 마침내 이혼시키고 충숙왕에게 바쳤다.

 

입궐한 그녀에게 충숙왕은 수비라는 칭호를 주고 총애하였다. 그런데 충숙왕이 죽자 그해에 충혜왕은 그녀를 폭행하여 강간하였다. 그녀는 이에 충격을 받고 다음해인 1340년 4월에 죽었는데, 아마 수치를 못 이겨 자살한 것으로 추측된다.

 

용산원자(1325~1341)

용산원자는 충숙왕의 셋째 아들이나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다만 1325년 충숙왕과 조국장공주가 한양 부원의 용산에 갔을 때 낳았다 하여 용산원자라고 불렀다. 모후 조국장공주가 죽은 후 원나라에 보내졌으며, 1341년 17세의 어린 나이에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죽은 후 시신은 고려로 인도되어 장례를 지내고 무덤이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