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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16 : 고려의 역사 185 (제27대 충숙왕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416 : 고려의 역사 185 (제27대 충숙왕실록 2)
제27대 충숙왕실록
(1294~1339년, 재위 1313년 3월~1330년 2월, 1332년 2월 복위~1339년 3월, 총 24년)
1. 충숙왕의 위태로운 삶과 불안정한 왕위(계속)
충선왕은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고, 왕권은 충숙왕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의 국왕에게는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1315년에는 원나라의 강요로 귀족과 천민들의 옷 색깔을 다르게 하는 정책을 실시하였고, 1316년에는 상왕인 충선왕이 자신의 심양왕 지위를 조카이자 세자인 왕고에게 넘겨줌에 따라 왕위를 위협받게 되었다.
심양왕에 오른 왕고는 원 왕실의 신뢰를 얻게 되자 그 힘을 바탕으로 그려 국왕의 자리를 넘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충숙왕은 왕고의 형인 왕유를 단양부원대군으로, 동생인 왕훈을 연덕부원대군으로 봉하여 심양왕 왕고에게 화합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 무렵 연경에 머무르고 있던 충선왕은 전례에 따라 충숙왕을 원 왕실의 공주와 혼인하도록 해줄 것을 요청해둔 상태였다. 충숙왕을 원의 부마가 되게 함으로써 고려 국왕의 왕권을 안정시키고 동시에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충선왕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해 7월 충숙왕은 원나라 영왕의 딸 역련진팔랄공주(복국장공주)와 결혼하여 원 왕실의 부마가 된다.
하지만 복국장공주는 고려에 온 지 3년 만인 1319년 9월 의문을 남기고 죽는다. 이 당시 고려는 제주도에서 민란이 일어나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충숙왕은 복국장공주의 입국으로 밀려난 덕비 홍씨를 잊지 못하고 자주 미행을 나갔으며, 정사를 뒷전으로 하고 사냥과 주색을 즐기고 있었다. 또한 미행을 나갔다가 백성들을 만나면 그들을 구타하는 일이 잦았으며 왕의 폭력적인 경향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복국장공주의 부고가 전해지자 원나라 중서성은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선사 이상지를 개경으로 보내 수사하게 하였다.
이상자는 복국장공주의 궁녀와 요리사 한만복을 가두고 심문하였다. 한만복은 심문을 당하자 1318년 8월에 왕이 연경궁에서 덕비 홍씨와 노는 것을 목격한 공주가 질투를 하다가 왕에게 얻어맞아 코피가 난 일과 그 다음 달에 다시 유련사에서 왕으로부터 심하게 구타당한 일을 실토한다.
이렇게 되자 이상지는 호라적 출신 궁녀 1명과 한만복을 원나라로 압송해갔고, 다급해진 충숙왕은 백원항, 박효수 등으로 하여금 중서성에 공문을 보내게 하여 한만복이 거짓진술을 하였다고 변명하였다.
이 사건 이후 충숙왕은 원 왕실의 불신을 받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1320년 원에서 영종이 새롭게 즉위하였고, 심양왕 왕고는 영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충숙왕을 강하게 비토하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충숙왕은 밤마다 연회를 차리고 술에 절어 살았으며, 기생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돈을 주는 바람에 국고가 탕진되고 있었다. 국고가 바닥났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내서사인 안균을 경상도에 파견하여, 돈을 거두게 하여 향락생활을 지속하였다. 이렇게 되자 대신들의 불만이 심화되었지만 왕은 불만 섞인 상소를 하는 대신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하여 조정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충숙왕의 이같은 행패는 왕고를 통해 원 왕실에 보고되었고, 그러던 중에 백용구 사건이 발생하여 1321년 3월 원나라의 입조 명령을 받아 충숙왕은 왕유에게 서무를 대신하게 하고 연경으로 떠났다. 그리고 약 3년 동안 원나라에 붙잡혀 있으면서 왕위를 노리던 왕고의 협박을 받으면서 지내야 했다.
이 당시 충선왕은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영종의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유배된 상태였고, 충숙왕은 거의 폐위된 상태였다. 그래서 1322년에 경사만 등의 대신들이 충숙왕을 복위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원 왕실에 요구하였지만 심양왕 왕고의 방해로 무산된다. 그리고 그해 8월에 전찬성사 권한공은 심양왕 왕고를 고려 국왕으로 세울 것을 원나라에 요청하기 위해 자운사에 백관들을 모아놓고 원나라에 보낼 문서에 서명섬을 강요했지만 윤좌선 등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된다. 이에 왕고파인 유청신, 오잠 등은 원나라 도성에 서면을 보내 고려 국호를 폐하고 고려를 원에 편입시켜 성을 설치해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원 왕실은 이 같은 터무니 없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처럼 국권이 완전히 상실된 가운데 제주 만호 임숙의 학정에 반발하여 제주 백성 1천여 명으로부터 임숙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가 올라오고, 전라도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는다. 이에 조정은 임숙을 파면하고 박순인을 그 후임으로 임명하는 한편 송기를 파견하여 왜구를 물리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가라앉힌다.
고려 사회와 충숙왕에게 이러한 남관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원의 영종이 죽고 태정제(진종)가 왕위에 오르게 되어 상황은 급변한다. 태정제는 유배 중이던 충선왕을 다시 호경으로 불러들이고, 충숙왕을 풀어준다. 그래서 3년 가까이 왕위를 상실한 채 호경에 머물러 있던 충숙왕은 1324년 2월에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삼별초의 제주입도와 몽골의 지배
고려 고종 때(1213~1259) 탐라의 명칭은 지방을 뜻하는 이름인 지금의 ‘제주’로 바뀌었다. 고려왕조에 편입된 직후 중앙에 공물을 바치는 일로 제주사람들은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1270년(고려원종11년) 10월, 이문경이 이끄는 삼별초군이 제주특별자치도에 들어와, 방어군인 김수, 고여림이 이끄는 관군과 교전을 벌여 승리한다. 삼별초군이 제주특별자치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제주특별자치도민이 삼별초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1271년 김통정 장군이 이끄는 삼별초군이 제주특별자치도로 들어와 미리 들어온 삼별초군과 함께 항파두리 고성(내성), 고토성(외성), 고장성(환해장성), 애월목성 등 방어시설 구축에 주력했다.
1273년 김방경, 혼도, 홍다구 등이 여·몽연합군 1만여 병력을 이끌고 제주에 들어와 3천에 미치지 못하는 삼별초군과 싸움을 벌인다. 제주특별자치도민까지 합세해 삼별초군을 도왔지만 큰 타격을 입은 김통정은 7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한라산으로 도망쳤다가 결국 자결하고 만다.
삼별초가 진압된 이후 제주특별자치도는 몽골이 직접 지배하는 영역이 되었다.
제주섬 곳곳에 목마장이 설치되었다. 고려는 제주특별자치도에 대한 가치를 별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몽골은 일찌감치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몽골은 제주특별자치도를 해양진출의 전초기지로 삼아 일본정벌을 준비했다. 선박 제작, 군마 양성, 법화사 재창건, 궁궐건설 시도 등이 이 시기 몽골에 의해 이루어졌다.
몽골에서 제주특별자치도 목장에 파견되어 말을 사육했던 몽고인을 ‘목호’라고 한다. 목호들은 세력이 점점 강성해져 국가에서 보낸 목사와 만호 등 관리를 죽이고 난을 일으키는 일이 잦았다.
과감한 반몽골정책을 펼쳤던 공민왕은 몽골의 국세가 약화되어가자 1356년 최영 장군을 도통사로 삼은 25,605명의 군사를 동원해 목호토벌을 강행했다.
기병 3천여 명과 수많은 보병을 거느린 목호세력과의 전투는 명월촌(지금의 한림)으로부터 어름비-밝은오름-검은오름-새별오름-연래-홍로-범섬으로 이어지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서귀포 범섬으로 들어간 목호군 지도자들은 항복하거나 자결함으로써 목호 토벌은 끝나게 되었고, 몽골의 제주지배 100년 역사가 마감되었다.
만호 임숙의 학정
충숙왕 10년(1323) 정월에 제주만호 임숙(林淑)이 제 마음대로 임지를 이탈하였다가 발각되어 행성(行省)에 수감된 바 있었는데, 뒤에 이를 용서하여 복직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고려사(高麗史)》충숙왕 10년 정월조에 의하면, 「제주인이 익명의 투서를 작성하여 거리에 게시하기를 “임숙(林淑)이 몹시 탐욕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이제 다시 임지로 오면 우리들은 무슨 죄인가? ”하였고, 또 행성 문에 방을 붙여 말하기를 “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 오적(烏赤)이 임숙(林淑)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법을 어겨 그를 방면하였으니 행부(行府)에서 만일 이를 바로 잡지 않으면 우리들 천여 명은 마땅히 상성(上省=원의 중서성)에 호소할 것이다.”고 하므로 조정에서는 임숙(林淑)을 파직하고 박순임(朴純仁)으로 대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使用 · 金成의 난(일설에는 士用·嚴卜의 난)
몽고 지배하에서도 탐관오리의 가혹한 수탈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충숙왕 때에 사용, 김성 등이 난을 일으켜 성주와 왕자를 축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高麗史》 충숙왕 5년(1318) 2월조에는,「제주민 使用·金成 등이 무리를 모아서 난을 일으켜 성주·왕자를 내쫓았다. 성주·왕자가 달아나 이 사실을 알렸다. 戊午에 檢校評理 宋英을 파견하여 안무케 하였는데, 도착하기 전 적들이 스스로 그 괴수 2명을 죽이고 항복하자 宋英으로 목사를 삼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耽羅誌》건치연혁조에는「草賊士用嚴卜等起兵作亂王子文公濟擧兵盡誅之聞于元復置官吏」라 하여 주동자의 이름이 使用, 金成이 아니라 士用, 嚴卜 등으로 다르게 기록되었고, 또 왕자 文公濟 등이 진압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계속하여 이 난의 원인을 《高麗史》충숙왕 5년(1318) 4월조에는,「왕은 상왕(충선왕)의 명령으로 대호군 張公允 · 제주부사 張允和를 巡軍獄에 가두었다가, 뒤이어 張公允은 紫燕島로, 張允和는 靈興島로 유배시켰는데, 이는 탐라에서 반란이 일어난 원인이 이 두 사람의 탐학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더욱이 《高麗史》열전 이백겸전에 의하면 당시 난민들이 “만약 李伯謙이나 宋英이 와서 진무한다면 우리가 어찌 반란을 일으키겠는가”라고 한 것을 보면 성주·왕자의 침탈도 이 난의 원인이 되었겠지만 관리와 토호 권세가의 이중적인 가렴주구가 난의 주요 원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사건으로 조정에서는 난민의 요구대로 충선왕 2년(1310) 제주목사로 도임하여 선정을 베푼 바 있는 송영을 제주목사로 다시 부임시켰으며, 난은 그가 도착하기 전(그해 6월)에 자체로 진정되었다. 그리고 난이 진압된 후 元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탐라에서 반란이 일어난 상황에 대한 문책을 하기도 하였다.
목호(牧胡)의 난과 제주민
목호는 원에서 제주도 목장에 파견하여 목마에 종사케 했던 몽고인이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 당시 탐관오리의 침탈에 시달리고 있던 도민을 꾀어 난에 합세시켰다. 이와 관련하여《고려사(高麗史)》열전 임박전(林樸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공민왕 16년(1367)에 (임박을) 제주선무사로 삼았다. 임박(林樸)이 제주에 이르러 만호(萬戶)에게 이르기를, “몽고의 달달목자(達達牧子)가 반발하기 좋아하니···(중략)··· 또 왕자·성주에게는 “(중략) 역대 임금이 그대들을 대우함이 심히 후하였으니, 자네들은 마땅히 각기 한 마음으로 조정을 받들어 목자와 더불어 난을 선동하지 말라”하니 성주·왕자 및 군민이 모두 부복하여 “감히 명에 쫓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이에 앞서 선무하러 온 자가 대개 탐폭하여 재물을 제멋대로 거두어 들여 백성들이 이를 괴롭게 여겼는데, 목호가 이들을 꾀어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이상에서 본다면 당시 토호 세력도 목호의 난에 합세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게다가 관리들의 학정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목호의 난에 가담하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이에 앞서 제주인들은 고려의 관군과 삼별초 사이의 공방전에서 삼별초를 도와 관군을 패배시킨 바가 있었는데 이때 도민이 삼별초와 합세하여 도운 이유는 삼별초군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경래관의 탐학에 대한 반발과 그들의 의식 수준의 성장에 따른 행동의 결과로 생각된다. 또한 목호의 난에 제주민이 가세한 이유도 외세 지배하에서도 계속된 탐관오리의 침탈에 대한 제주인의 고려 조정에 대한 반발 의식이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당시 일어났던 목호의 난을 정리하여 도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연 대 |
주동자 |
원 인 |
피 해 자 |
비 고 | ||
서기 |
왕 |
년/월 | ||||
1356 |
공민왕 |
5/10 |
加 乙 赤 忽 古 托 |
배원 정책 구토수복정책 |
都巡問使 尹時遇 牧 使 張 千 年 判 官 李 陽 吉 |
원의문책 |
1362 |
〃 |
11/8 |
肖古禿不花 石迭里必思 |
제주도 귀속 문 제 |
萬 戶 朴 道 孫 |
원에귀속 |
1372 |
〃 |
21/4 |
石加乙碑 肖古道甫介 |
명의 마필 요 구 |
揀選御馬使劉景元 牧使兼萬戶李用藏 |
명에목호 정벌요청 |
1374 |
〃 |
23/7 |
石迭里必思 肖古禿不花 觀 音 保 |
〃 |
요구대로 말을 보내지 않음 |
최영의 목호토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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