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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14 : 고려의 역사 183 (제26대 충선왕실록 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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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14 : 고려의 역사 183 (제26대 충선왕실록 4)

두바퀴인생 2011. 11. 8. 03:18

 

 

 

한국의 역사 414 : 고려의 역사 183 (제26대 충선왕실록 4)   

 

  

제26대 충선왕실록

(1275~1325년, 재위 1298년 1~8월, 1308년 7월 복위~1313년 5월, 총 5년 3개월)

 

2. 충선왕의 가족들

 

충선왕은 8명의 부인을 두었다. 하지만 이들 8명 중 숙비 김씨는 원래 충렬왕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제외되고, 셋째 아들 덕흥군 혜를 낳은 부인은 이름이 전하지 않으므로 <고려사> '후비열전'은 계국대장공주, 의비, 정비 왕씨, 순화원 홍씨, 조비, 순비 허씨 등에 관한 기록만 남기고 있다. 이들 7명의 부인들 중에서 의비가 세자 감과 충숙왕을 낳았고,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후비가 덕흥군을 낳았다. 열전에 기록된 6명의 후비와 세자 감, 덕흥군 등의 삶을 간단하게 언급한다.

 

계국대장공주(?~1315년)

계국대장공주는 원나라 진왕 감마라의 딸이며 이름은 보다시리다. 1296년에 충선왕과 혼인하였으며, 1298년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고려로 왔다.

 

고려의 왕비가 된 그녀는 충렬왕비 제국공주와 마찬가지로 이미 세자빈으로 있던 조비 등을 밀어내고 제1비에 올랐다. 하지만 충선왕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충선왕은 세자 시절부터 부부관계를 맺고 있던 조인규의 딸 조비를 총애했고, 이들 질투한 계국공주는 음모를 꾸며 조비조차 쫓아낸다.

 

계국공주는 조비가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수하를 시켜 원나라 태후에게 편지를 보낸다. 충선왕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박경량을 보내 원으로 향하던 활활불화와 활활대를 저지시키려 하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얼마 후 "조인규의 처가 무당을 불러 굿을 하여 왕이 공주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딸만 사랑하도록 해달라고 빌었다."는 익명서가 나붙었다. 이 사건으로 조인규와 그의 처는 원으로 압송되어 허위 자백을 하게 되고, 조비도 원으로 끌려갔다. 또한 충선왕도 왕위를 빼앗기고 원나라로 호출되었다.

 

그 후 충렬왕이 왕위에 다시 오르자 그녀는 원으로 돌아갔다. 그 3년 뒤인 1301년 충렬왕은 민훤을 파견하여 공주를 개가시키려 하지만 성자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충렬왕은 1305년에 왕유소 등의 측근들을 앞세우고 연경으로 직접가서 다시금 공주의 개가작업을 시도한다. 충렬왕은 공주를 서흥후 왕전에게 개가시키고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있도록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왕전은 인물이 줄충하였기 때문에 충렬왕은 누차에 걸쳐 공주가 그에게 매료되도록 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하곤 하였다. 이 같은 충렬왕의 노력에 따라 공주와 왕전은 가까워졌다. 공주는 원래부터 행실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충선왕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왕전을 마음에 두게 된 것이다.

 

그러나 1307년 원의 성종이 죽고 무종이 즉위함에 따라 충선왕의 힘이 강해졌고, 이 바람에 공주의 개가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히려 공주의 개가를 주선하던 왕유소 등의 충렬왕파 대신들과 왕전은 충선왕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다.

 

그 후 공주는 충선왕을 따라 일시 귀국했다가 충선왕이 원으로 떠나자 연경에 머물렀고, 1313년 충선왕이 다시 일시 귀국하자 2년 동안 머물다가 1315년에 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해에 연경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그녀의 시신은 고려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소생은 없었다. 1317년 원의 인종으로부터 계국대장공주의 시호가 추봉되었다.

 

의비(?~1316년)

의비는 몽고 여자로 이름은 야속진이다. 그녀의 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봐서 원의 왕실녀는 아닌 것 같다.

 

그녀는 충선왕과 결혼하여 세자 감과 충숙왕을 낳았다. 충숙왕의 생년이 1294년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녀는 적어도 1290년을 전후하여 충선왕에게 시집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녀가 계국공주보다 먼저 충선왕의 부인이 되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충선왕이 세자의 몸으로 원에 체류할 때 결혼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녀는 줄곧 충선왕을 따라 개경과 연경에 체류하다가 1316년 연경에서 사망하였으며, 시신은 고려로 옮겨져 묻혔다. 장례 후 의비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하지만 충숙왕 즉위 후에도 태후로 추존되지는 않았다.

 

정비 왕씨(?~1345년)

정비 왕씨는 서원후 왕영의 딸이다. 1287년에 그녀는 원 왕실의 요구에 따라 공녀로 바쳐질 운명에 처하였다. 그런데 당시 원나라로 가던 충선왕이 장차 자신이 그녀에게 장가들려고 한다고 말하여 그녀는 공녀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1289년에 그녀는 충선왕과 결혼하여 세자빈이 되었다. 하지만 이 결혼이 동성혼이라는 이유 때문에 원 세조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다. 원은 고려 왕실과 몽고 공주와의 결혼을 관례로 정착시키기 위해 고의적으로 고려 왕족끼리 동족혼을 금지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같은 원의 의지는 관철되어 1308년에 충선왕은 즉위년 교서를 통해 동성혼을 법으로 금지시키고 왕실과 통혼할 수 있는 대상으로 15개 귀족 가문을 선정하게 된다.

 

귀족가문으로서 충선왕과 결혼하게 되는 집안은 남양 사람 홍규의 딸인 순화원비, 상원 사람 평양군 조인규의 딸 조비, 공암현 사람 허공의 딸 순비 등과 한때는 충렬왕비였으나 그의 사후에 다시 충선왕비가 된 언양 사람 김양감의 딸 숙비가 있다.

 

정비는 왕족 간의 혼인이라는 것과 고려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충선왕의 첯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몽고 여자 의비에 이어 제3비로 머무르다가 1345년에 사망했다. 소생은 없었으며, 능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순화원비 홍씨(생몰년 미상)

순화원비 홍씨는 남양부원군 홍규의 딸이며 충선왕이 복위된 이후에 후비에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능과 죽음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소생도 없었다.

 

조비(생몰년 미상)

조비는 상원군 출신 평양군 조인규의 딸이다. 1292년에 세자빈에 간택되어 입궁하였으며 충선왕과 금실이 매우 좋았다. 하지만 1298년에 계국공주가 입국하여 그녀와 충선왕의 관계를 질투하면서 원 왕실에 고발하는 바람에 난처한 입장에 놓인다.  거기다 그녀를 비방하는 익명서가 나붙어 아버지 조인규와 어머니가 원에 압송되고 그녀도 뒤에 원에 압송되어 고초를 당한다. 하지만 그녀가 언제 죽었는지에 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순비 허씨(?~1335년)

순비 허씨는 공암현 사람으로 중찬 허공의 딸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평양공 왕현에게 시집가서 3남 4녀를 낳았는데, 왕현이 죽은 후 1308년에 충선왕에게 개가하였다. 그리고 그해에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순비에 책봉되었다.

 

당시 충선왕은 한때 충렬왕의 부인이었던 숙비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숙비는 허씨를 몹시 싫어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 간에는 항상 대립과 불화가 끓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연회장에서 서로의 옷을 뽐내기 위해 두 사람이 모두 한 장소에서 다섯 번이나 옷을 갈아입는 추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1335년에 사망하였으며,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소생도 없었다.

 

덕흥군 왕혜(생몰년 미상)

덕흥군은 충선왕의 셋째 아들이다. 하지만 누구의 소생인지는 전해지지 않으며, 이름은 혜, 몽고식 이름은 탑사첩목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줄곧 승려로 지내다가 1351년에 원나라로 도주했다. 그 후 공민왕이 즉위하여 기왕후의 오빠 기철을 죽이자 기왕후가 공민왕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그래서 기왕후는 고려인 최유에게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게 하여 기삼보노를 원자로 삼으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다.

 

기왕후는 이 음모를 실천하기 위해 군사 1만을 내어 최유에게 주고 고려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최유는 압록강 이남 달천에서 패배하고, 덕흥군은 수하들만 데리고 원으로 되돌아갔다.

 

이에 고려는 원 조정에 김유를 보내 덕흥군을 고려로 보낼 것을 요청하였지만 덕흥군은 등창을 앓고 있다는 핑계를 대며 원은 이를 거절한다. 그래서 덕흥군은 고려에 압송되지 않고 원에 머무르며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여생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