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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13 : 고려의 역사 182 (제26대 충선왕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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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13 : 고려의 역사 182 (제26대 충선왕실록 3)

두바퀴인생 2011. 11. 7. 08:29

 

 

 

한국의 역사 413 : 고려의 역사 182 (제26대 충선왕실록 3)   

 

  

제26대 충선왕실록

(1275~1325년, 재위 1298년 1~8월, 1308년 7월 복위~1313년 5월, 총 5년 3개월)

 

1. 충선왕의 전지(傳旨)정치와 고려 조정의 불안정(계속)

 

충렬왕이 원나라를 방문한 것은 1305년이었다. 이 당시 원은 적자를 두지 못한 성종 티무르의 건강이 좋지 않은 관계로 왕족 간에 왕위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충선왕은 그들의 왕위다툼에 가담하여 나름대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렬왕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1307년에 티무르가 죽고 충선왕이 지지하고 있던 회녕왕 하야산(무종)이 차기 왕으로 유력시되자 사태는 오히려 반전된다. 충선왕을 폐하기 위해 원에 갔던 충렬왕은 되레 충선왕에 의해 왕유소 등의 측근들을 모두 잃고 왕권마저 상실한다. 말하자면 이름만 왕일 뿐 모든 권한은 충선왕이 쥐게 된 것이다. 그리고 1308년 7월 충렬왕이 죽자 충선왕은 다시금 왕좌에 오르게 된다.

 

10년 만에 왕위를 되찿은 충선왕은 즉위하자마자 곧 조신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조세의 공평, 인재 등용의 개방, 공신 자제의 중용, 농잠업의 장려, 동성 결혼의 금지, 귀족의 황포 엄단 등 다시 한 번 혁신정치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오랫 동안 원나라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그는 고려의 왕궁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지 즉위 두 달 만에 숙부인 제안공 왕숙에게 정권을 대행케 하고 다시 원으로 건너갔다. 이 때문에 즉위시에 발표했던 개혁안들은 허사가 되었고, 그려 조정은 연경에 머무는 충선왕의 전지(멀리 떨어져 있는 왕이 전달자를 통해 신하들에게 내리는 교지)에 의해 국정 전반을 운영해야 했기 때문에 조신들은 개경과 연경을 오가며  국정을 수행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 같은 전지정치는 곧 조정의 불안정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전승 최유엄이 극언으로 귀국할 것을 상소했지만 충선왕은 원나라 왕실의 후한 대접을 잃게 될까 봐 귀국하지 않았다. 당시 충선왕은 원 무종의 신임을 받아 심양왕에 봉해져 있었으며, 심지어는 무종이 심양의 관리들에게 충선왕을 거치지 않은 청원이나 보고는 받지 않겠다고 공언한 상태였다. 따라서 충선왕은 이 같은 절대적인 힘과 배경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고려에서는 세자 감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측근들이 이를 감지하고 보고하자 충선왕은 1310년 5월 세자 감과 그의 측근 김의중을 죽여버렸다.

 

충선왕은 이처럼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원나라 체류를 고집하였고, 이로 인해 엄청난 물자가 매일 같이 연경으로 이송되어야 했다. 이에 조신들은 누차에 걸쳐 왕의 환국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충선왕은 전혀 환국할 뜻이 없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의 압박은 날로 거세졌다. 이에 그는 1313년 3월 둘째 아들 강릉대군 왕도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고 신하들의 환국 압력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때 충선왕이 이복형 강양공 왕자의 둘째 아들 왕고를 세자로 세우는 바람에 후에 충숙왕과 왕고 간에 치열한 왕위 다툼을 유발시킨다.

 

이렇듯 원 왕실이 부여한 지위를 누리기 위해 원나라 체류를 고집하던 충선왕은 연경의 저택에 만권당을 세워 그곳에서 요수, 염복, 조맹부, 원명선 등 당대의 명류들과 학문을 교류하기도 했고, 고려에서 이제현을 불러내 그들과 교류하게 하여 고려의 학문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불교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1316년에는 심양왕의 자리를 조카 왕고에게 물려주고 티베트 승려를 불러 계율을 받기도 하엿다.

 

충선왕은 이처럼 무종, 인종 대에 걸쳐 원 왕실의 후한 대접을 받으며 호화로운 생활과 권력을 동시에 누렸다. 하지만 1320년에 인종이 죽고 영종이 즉위하자 입지가 약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원 왕실로부터 심한 환국 압박을 받아야만 했다. 거기다 고려 출신 환관인 임빠이엔토쿠스의 모략에  말려들어 토번으로 유배되는 처지가 되었다. 다행히 1323년에 태정제가 즉위하면서 겨우 풀려나 연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돌아온 지 2년이 지난 1325년 5월 중국 연경에서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사망 후 그의 시신은 고려로 옮겨져 덕릉에 안치되었으며, 실록은 충혜왕 대에 '충렬왕실록'과 함께 편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