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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11 : 고려의 역사 180 (제26대 충선왕실록 1) 본문
한국의 역사 411 : 고려의 역사 180 (제26대 충선왕실록 1)
제26대 충선왕
충선왕(忠宣王, 1275년 ~ 1325년)은 고려 제26대 국왕(재위: 1298년, 복위: 1308년~1313년)이다. 초휘는 원(願), 휘는 장(璋), 자는 중앙(仲昻), 시호는 충선헌효대왕(忠宣憲孝大王).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아들이다. 몽골식 이름은 이지리부카(益知禮普花,익지례보화)이며, 정비(正妃)는 원나라 진왕(晉王) 카말라(甘麻刺)의 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 : 보타슈리 공주(寶塔實燐 公主))이다.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갈 뻔한 왕족 서원후 영의 딸 왕씨를 구출하여 자신의 비로 삼았다.
고려에서 처음으로 즉위하였다가 폐위된 후 다시 복귀한 군주이기도 하다. 생애 후반에는 귀국을 기피하고 원나라에 체류하며 만권당을 세워 독서와 학문 연구, 서화 그리기 등에 전념하기도 했다.
생애
1277년(충렬왕 3) 세자(世子)로 책봉되고, 다음 해 원나라에 가서 몽골 이름을 받았다. 1296년(충렬왕 22)에 몽골 황실의 진왕(晋王) 감마라(甘麻刺)의 딸 보탑실린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아 원도(元都 : 북경)에서 혼사를 올렸는데 앞서 서원후 영(西原候 瑛)·홍문계(洪文系)·조인규(趙仁規)의 딸을 비(妃)로 맞아들인 바 있다.
1287년(충렬왕 13) 종실 서원후 영의 딸이 공녀(貢女)로 선발되었으나 사정을 들은 세자의 요청으로 공녀 차출을 면하였으며, 1289년 세자의 후궁으로 들이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뒤에 정비(靜妃)가 되었다.
1297년 어머니가 갑자기 병으로 죽자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어머니가 병을 얻게 된 것이 내총(內寵)을 투기(妬忌)하는 자들의 소치(所致)라 하여 당시 부왕(父王 : 충렬왕)의 총애를 믿고 날뛰던 후궁 무비(無比, 백야단)를 살해하고, 그와 관련된 여러 사람을 귀양 보내거나 죽이고 가두었다. 이 지나친 처사와 왕비의 죽음에서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충렬왕은 왕위를 넘겨줄 뜻을 원나라에 알렸다.
그리하여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고, 부왕(父王)은 태상왕(太上王)이라 했다. 젊은 왕은 구폐를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를 실행하려 하였으나 권문세가의 비방을 많이 받았다. 정국(政局)의 쇄신을 꾀하고 먼저 관제(官制)를 개혁하던 무렵에 조비(趙妃)를 질투해 오던 왕비 계국공주와 왕의 반대파가 음모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충선왕 즉위 7개월 만에 다시 충렬왕이 복위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왕실의 치정 문제도 관계되지만, 충렬·충선 두 왕을 둘러싼 정치적 모략과 중상의 결과로 보인다.
충선왕이 왕위를 아버지 충렬왕에게 반환한 뒤 원나라로 간 뒤에도 그에게 원한을 품은 왕유소·송린·석천보 등이 그를 모함하여 충렬·충선왕 부자지간을 이간시켰으며, 계국공주의 재가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오히려 처형되었다. 충선왕은 다시 즉위할 때까지 10년간 계국공주와 원나라 서울에 머물면서 후에 무종(武宗)이 된 회령왕(懷寧王) 해이샨 및 인종(仁宗)이 된 태자 아유르발리파드라(愛育黎拔力達)의 형제와 친하게 지냈다.
1307년 원나라의 성종(成宗)이 죽자 왕위 계승이 실력 문제로 비화되었을 때 충선왕은 무종(武宗)을 옹립하여 공을 세웠다. 이로써 원 황실과의 친분이 두텁게 되어 심양왕에 즉위하였으며, 1308년 아버지 충렬왕이 죽자 고려왕에 복귀하여 다시 정치의 쇄신에 열의를 보였으나 오래 고려에 머무르지 않고 원나라 생활을 즐기며 전지(傳旨)를 통하여 국정을 행하였다. 왕이 해마다 많은 물품을 원나라로 가져가고 계속 원나라에 머물길 원하자, 왕의 귀국 운동이 있었으나 귀환을 꺼렸다. 이 와중에 세자 감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그를 살해한다.
아들 강릉대군 도(江陵大君 燾)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세자 감(鑑)은 충선왕이 죽였다), 조카를 심양왕의 세자로 삼았으며 나중에 그에게 전위(傳位)하면서 끝내 귀국을 피하였다. 이는 본국에 대한 애착 결여, 원황실의 우대 등에도 이유도 있고, 충선왕의 본성이 담박하여 불교를 좋아하고 글을 즐기며 그림도 잘 그리는 등 정치와 권력에는 애착이 적었던 까닭도 있다.
그 무렵 원나라 연경에 만권당(萬卷堂)을 설립하여 내외 서적을 모으고, 고려에서 이제현(李齊賢) 등과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 등의 학자를 초빙하여 학문을 연구하며 고려 문화 수입에 힘을 썼다.
한편 충선왕의 개혁정치로 말미암아 홍중희, 홍중경, 홍복원 등이 기득권을 잃게 되자, 이들 홍씨들은 고려왕이 심양왕을 겸하는 일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입성론을 펼쳤다. 입성론(立省論)은 고려를 원나라의 행성(行省, 행중서성)으로 삼아달라는 주장을 가리킨다.
그 결과로 충선왕의 개혁정치는 시작하자마자 좌초하게 되며, 또한 충선왕은 강제 폐위되었고, 고려 왕위는 충선왕의 장자 강릉대군(江陵大君)에게, 심양 왕위는 당시 충선왕의 조카이며 태자였던 연안군(延安君) 왕고(王暠)에게 물려주게 된다. 그 뒤 고려왕과 심양왕은 서로에게 정통성을 주장하며 다투게 되며, 특히 고려 말에 한때 고려의 태자였던 심양왕이 고려 왕위를 요구한 횟수가 잦았다. 뒷날 심양왕은 줄곧 고려 왕족에게 이어졌으며, 고려 왕족의 후예였던 마지막 심양왕 툭타부카(脫脫不花)가 후계자 없이 죽자 요동 정벌론이 고려에서 일어나며, 이를 위해 진군하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고려는 멸망한다.
유배와 석방, 죽음
원나라의 인종(仁宗)이 죽자 몽골 신하의 참소로 토번(吐藩,지금의 티베트) 땅에 유배되었다가 태정제(泰定帝)가 즉위하자 유배가 풀려 원나라 대도에 돌아와 2년 후에 객사하였다. 시신은 고려로 운구되어 덕릉(德陵)에 묻혔다.
가계
- 정비 계국대장공주
- 왕비(王妃) 조씨
- 의비(懿妃) 야속진, 몽골 여성
- 세자 감
- 고려 충숙왕
- 정비(靜妃) 왕씨, 종실 서원후의 딸, 신종 4대손녀, 공양왕의 증대고모
- 조비(趙妃)
고려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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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대 충선왕실록
(1275~1325년, 재위 1298년 1~8월, 1308년 7월 복위~1313년 5월, 총 5년 3개월)
1. 충선왕의 전지(傳旨)정치와 고려 조정의 불안정
원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인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고려의 몽고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진다. 심지어는 왕이 재위기간 대부분을 원나라에 기거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로 인해 고려 조정의 불안은 한층 가중되고, 한편에서는 왕위를 둘러싼 암투가 진행된다.
충선왕은 충렬왕의 셋째 아들이자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 소생으로 1275년 9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원, 이름은 장, 자는 중앙, 몽고식 이름은 이지리부카다. 1277년 1월에 3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296년에는 11월에는 원나라 진왕의 딸 보다시리와 결혼하였다. 1298년 정월에 무신정권의 임연에 의해 태상왕으로 물러난 충렬왕을 이어 24세의 젊은 나이로 고려 제26대 왕에 올랐다. 하지만 왕비 계국대장공주와 불화로 원나라 쿠빌라이에게 무고하느 바람에 그해 8월에 왕위에서 쫓겨나 원나라로 압송되었다가 1308년 7월 충렬왕의 뒤를 이어 다시 복위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충선왕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9세 때 충렬왕이 사냥을 떠나는 것을 보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기에 유모가 그 연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지금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하여 허덕이고 농사철이 닥쳐왔는데, 아바마마께서는 어찌하여 멀리 사냥을 떠나려 하시는지 모르겠어."
이 일은 곧 조의순을 통해 충렬왕의 귀에 들어갔다. 하지만 충렬왕은 사냥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 때 장목왕후가 병으로 앓아눕는 바람에 결국 사냥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고 한다.
<고려사>에서 전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충선왕의 총명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그의 모후인 장목왕후가 충렬왕의 잦은 사냥을 싫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충렬왕은 몽고 왕족 출신 장목왕후의 지나친 정사 간섭과 전횡으로 울화를 달래기 위해 매일 사냥과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한편 장목왕후는 그 같은 왕의 처사를 불만스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선왕이 부왕의 사냥행에 울음을 터뜨린 일은 장목왕후의 심정을 대변한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충선왕은 부왕 충렬왕과 모후 장목왕후의 갈등을 지켜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2살 때인 1287년에는 원나라에 입조하여 연경에 머물다 귀국하였는데, 1281년에는 원 세조로부터 특진상주국고려국왕세자에 임명되고 금인을 받았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원 세조의 명령으로 원나라를 다녀왔으며, 1296년 11월에는 원나라 진왕의 딸 보다시리와 결혼하여 아버지 충렬왕에 이어 원 왕실의 부마가 되었던 것이다.
그 무렵 충렬왕은 궁인 무비를 총애하며 그녀의 측근들과 어울려 지냈는데, 그 바람에 조정의 힘이 무비에게로 집중되었다. 이렇게 되자 장목왕후와 충렬왕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왕과 세자 간에도 알력이 심해졌다. 그러던 중 1297년 5월에 장목왕후가 병으로 죽자 원에 머물고 있던 세자는 모후의 문상을 위해 몽고 친위군을 데리고 급히 귀국하여 무비를 비롯한 그녀 측근들을 모두 살해하고 도당 40여 명을 귀양 보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원나라로 떠났고, 충렬왕은 스스로 힘을 상실하였다고 판단하고 왕위를 내놓는다. 그래서 1298년 정월에 충렬왕은 태상왕으로 물러나고, 충선왕이 다시 귀국하여 즉위하여 국정을 관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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