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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12 : 고려의 역사 181 (제26대 충선왕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412 : 고려의 역사 181 (제26대 충선왕실록 2)
제26대 충선왕실록
(1275~1325년, 재위 1298년 1~8월, 1308년 7월 복위~1313년 5월, 총 5년 3개월)
1. 충선왕의 전지(傳旨)정치와 고려 조정의 불안정(계속)
원나라 역시 이 일을 묵인하고 충선왕을 고려 국왕에 임명하는 한편 상왕으로 물러난 충렬왕에게는 일수왕이라는 칭호를 내린다.
충선왕이 이처럼 갑자기 힘이 강대해진 것은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은 충렬왕을 제국공주와 혼인시켜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았고, 충렬왕은 원의 힘을 빌려 다시 왕권을 되찿게 된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제국공주가 버티고 있는 경우에 한해서 충렬왕은 원나라 부마국의 국왕으로서 원의 지원을 받으며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제국공주의 죽음은 충렬왕의 왕권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고려 왕실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에 반해 충선왕은 그때 막 진왕 감마라의 딸과 결혼하여 원 왕실의 부마가 된 입장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원은 충선왕을 더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던 충렬왕은 스스로 힘이 약해진 것을 깨닫고 왕위에 서 물러났던 것이다.
충선왕은 즉위하자마자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을 감행한다. 즉위교서에 담긴 30여 항의 개혁안은 정치뿐 아니라 경제와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광범위하고도 과감한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우선 합단 침입시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포상하고 개국 이래의 공신 자손들에게 공신전을 호나급홤으로써 국가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였고, 내시와 다방 관속들의 등급을 올려 왕구너을 강화하고, 급사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주고 벼슬이 정7품에 한정되어 잇던 남반에 고한 자들도 연한에 관계없이 7품 이상에 제수될 수 있는 동반으로 바뀔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승려의 직분을 새롭게 하고 지방에 묻혀 있는 선비들을 등용하여 문신의 힘을 키우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해 4월에는 인사를 담단하던 정방을 폐지하여 한림원과 합쳤으며, 5월에는 전면적 관제개혁을 실시하였다. 충렬왕 즉위년에 원의 강압으로 격하된 광청명이 사라지고 광정원, 자정원, 사림원 등의 새로운 관청들이 생겨났다. 이는 이름만 다를 뿐 시중, 좌우복야 등 종전의 고려 관제를 복구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관제개혁은 다소 반원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충선왕의 개혁정책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명 '조비무고사건'으로 불리는 이 일은 세자비였던 조인규의 딸 조비와 충선왕의 금실이 너무 좋자 이를 시기한 왕비 계국공주에 의해 발생한다.
계국공주는 조비가 충선왕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이를 질투하여 위구르 글로 편지를 써서 수하 활활불화와 활활대로 하여금 원의 왕태후에게 전하게 하였다. 공주는 충선왕이 조비만 충애하여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관직을 변경하여 정사를 반원적인 차원에서 처리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그 며칠 뒤에 조인규의 처가 무당을 불러 굿을 하여 왕이 공주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딸만 사랑하도록 해달라고 빌었다는 익명의 편지가 궁문에 나붙었다.
이에 공주는 조인규와 그의 처 그리고 척족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또 철리를 원나라에 보내 투서사건을 알리게 하였다. 그러자 원의 왕태후는 활활불화에게 사신을 붙여 사건을 추궁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조비를 비롯해 최충소와 장군 유온이 순마소에 갇히고 조인규와 그의 처는 원나라로 압송되었다.
원나라로 압송된 조인규는 고문을 견디지 못해 자백을 하였고, 조비와 내관 이온이 다시 원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원의 태후는 승려 5명과 도사 2명을 보내 공주에 대한 저주를 풀어주고, 홍군상을 파견하여 부부간의 애정을 돋우는 음식을 만들어 왕과 공주가 함께 먹도록 하였다.
하지만 사건은 여기서 종결되지 않았다. 충선왕이 궁지에 몰린 상황을 이용하여 충렬왕지지 세력이 충렬왕 복위를 도모한 것이다. 이 때문에 1298년 8월 충선왕은 즉위 7개월 만에 왕위에서 쫓겨나 원으로 호송되고 충렬왕이 북위되었다. 또한 충선왕이 새롭게 설치했던 관청과 관직도 모두 혁파되고 충렬왕 대의 것으로 복원되었다.
원으로 호송된 충선왕은 그 이후 10년 동안 연경에 머무른다. 이 기간 동안 충렬왕은 충선왕파를 제거하는 한편 자신의 10촌 종제이며 신종의 3대 손인 서흥후 왕전에게 왕위를 넘겨주려는 계획을 짠다. 그래서 측근인 왕유소, 송린, 석천보 등을 앞세워 계국공주를 서흥후 전에게 개가시키려는 음모를 진행하게 된다. 또한 충선왕의 환국을 저지하는 운동을 벌이다가 급기야 충선왕을 폐하기 위해 충렬왕이 직접 원나라에 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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