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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09 : 고려의 역사 178 (제25대 충렬왕실록 5) 본문
한국의 역사 409 : 고려의 역사 178 (제25대 충렬왕실록 5)
제25대 충렬왕실록
(1234~1308년, 재위 : 1274 6월~1298년 1월, 1298년 8월 복위~1308년 7월, 1298년부터 동년 8월 초까지는 충선왕 재위기간이므로 총 재위기간은 33년 6개월)
3. 일본정벌 전쟁 배경 및 관련 인물들(계속)
홍다구는 서경의 낭장으로 있다가 몽고에 항복한 홍복원의 아들로 몽고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으며, 조이와 더불어 고려를 자주 곤경에 빠뜨렸던 인물이었다. 홍복원은 몽고에 전향한 후 줄곧 몽고군을 인도하여 고려 침략을 도왔기 때문에 몽고 조정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당시 몽고에 볼모로 가 있던 영녕공 왕순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다가 왕순의 아내를 분노케 하여 몽고 칙사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왕순의 아내는 몽고왕족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남편을 능멸하는 홍복원을 칙사에게 고발했던 것이다. 이에 칙사가 홍복원을 죽이고 그의 처와 아들 다구, 군상을 포박하여 데리고 갔다.
그 후 홍다구는 쿠빌라이에게 신망을 얻어 다시 관직을 얻어 아비의 죽음에 대한 원한으로 고려 조정을 곧잘 궁지에 몰아넣곤 하였다. 그리고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몽고군을 이끌고 고려에 왔던 것이다.
사건은 삼별초의 난이 한창 진행 중이던 1272년에 일어났다. 그해 왜선이 김해에 정박한 일이 있었는데, 경상도 안무사 조자일은 왜선이 정박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다시금 원나라로부터 고려가 일본과 연계하여 원을 치려 한다는 오해를 사게 될까 봐 서둘러 왜선을 돌아가게 하였다. 그런데 홍다구가 이 사실을 알아내고 조자일을 문초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쿠빌라이에게 "고려가 왜와 상통한다.'는 보고를 하였다.
이 일이 화근이 되어 결국 원은 일본을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1274년부터 본격적으로 전쟁준비에 돌입하였다. 이 때 홍다구는 조선감독관으로 조선 작업을 감독하고 각처에서 뛰어난 사공들을 징집하였다. 그리고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한 지 4개월 만인 그해 10월 드디어 여원연합군은 일본정벌길에 올랐다.
연합군은 총 4만 명으로 몽고군 및 한군 2만 5천, 고려 육군 8천, 수군 6천 7백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여기에 여진군이 가담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여진군이 시간을 지키지 못하자 이 병력으로 9백여 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합포를 출발하였다.
고려군은 도독사 김방경이 중군을 통솔하고 박자량, 김흔을 지병마사로, 임개를 부사로 삼았으며, 김선을 좌군사, 위득유를 지병마사, 손세정을 부사로 임명하엿다. 또 김문비를 우군사로 삼고, 나유와 박보를 지병마사, 반부를 부사로 임명한 후 전체를 삼익군이라고 하였다. 한편 몽고는 도원수 홀돈을 원수로, 홍다구를 우부원수로, 유복형을 좌부원수로 삼고 군사를 통솔하게 하였다.
연합군은 합포를 떠나 곧 대마도에 도착하여 섬을 장악하였으며, 다시 일기도로 진격하니 일본군이 진을 치고 버티고 있었다. 이에 따라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일본군은 1천여 명의 희생자를 내며 대패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다시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여 좌부원수 유목형이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는 등 여몽연합군의 피해가 속출하자 연합군은 뱃머리를 돌려 후퇴하였다. 그런데 퇴각하던 날 밤에 폭풍이 몰아쳐 많은 전함들이 파손되고 군사들이 수장되는 바람에 연합군은 황급히 귀환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원정에 실패한 원의 쿠빌라이는 1277년에 다시금 일본정벌을 독촉한다. 하지만 이 때 위득유 등이 김방경이 갑옷을 감추고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무고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 바람에 김방경은 홍다구로부터 고문을 받고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쿠빌라이 앞에서 결백을 증언하여 풀려난다.
제2차 일본 정벌은 한동안 연기되다가 1280년에 일본정벌을 위한 기구인 정동행성이 세워지고, 이듬해 3월에 재개된다.
제2차 원정에서는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 혼도와 홍다구가 이끈 몽고군과 한군 등 총 5만 군대가 선발대로 출발했고, 범문호가 이끄는 남만군 10만이 후발대로 출발했다. 이들 연합군 15만은 다시 한 번 일본 본토를 노렸으나 홍다구가 이끄는 몽고군이 크게 패하고 후발대로 도착한 범문호의 남만군 10만이 8월 폭풍을 만나 모두 수장되는 바람에 대패하고 돌아왔다. 이 때 김방경의 뛰어난 통솔로 고려군의 피해는 경미하였으나 밀물과 썰물에 밀려다니는 남만군 10만의 시체가 합포 포구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이렇듯 1,2차 원정에서 일본에 대패하자 쿠빌라이는 정동행성의 기능을 더욱 강화하여 일본정벌에 혈안이 된다. 이 때문에 고려는 막대한 물질적 피해와 노동력 손실을 입게 되어 누차에 걸쳐 일본정벌 계획을 중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1294년에 죽을 때까지 일본원정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못하였다. 하지만 쿠빌라이가 죽자 원나라 내부에서 일본 정벌이 불가함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승상 완택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일본정벌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정벌을 위해 만들어졌던 정동행성은 여러 차례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다가 1299년부터는 고려와 원을 연결하는 교량적 역활을 하는 기구로 변모되었고 공민왕 대에 가서야 비로소 타파되었다.
쿠빌라이가 그토록 일본을 정벌하고자 했던 것은 그 스스로가 일본에 보냈던 조서에서 밝힌 대로 후대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명예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1276년에 그동안 앙자강을 버팀목으로 겨우 지탱하던 남송이 무너지자 동북아에서 일본은 원에 조공을 바치지 않은 유일한 나라로 남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이 점이 마음에 걸려 끓임없이 일본정벌을 추진하였지만 해군력이 약한 몽고군으로서는 일본정벌은 무리였다. 일본은 이 때 자신들을 지켜준 태풍을 일러 '가미카제' 즉 '신풍'이라고 불렀으며, 이 명칭은 태평양전쟁 때에 일본 전투기들의 자살특공대의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몽골 앞잡이' 홍대순·홍복원·홍다구
배가 난파하려 하면 쥐들이 먼저 알고 도망친다고 했던가? 나라가 망할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조선의 매국노' 이완용이 조선의 멸망을 재촉했다면 고려가 몽골에 망할 때는 홍대순(洪大純) 홍복원(洪福源) 홍다구(洪茶丘) 3대(代)의 매국노가 있었다.
홍대순은 평안도 의주 근처 군사요충지인 인주(麟州)의 지역사령관격인 도령(都令)으로 있으면서 1218년(고려 고종 5년) 몽골이 거란을 압박할 때 자발적으로 몽골에 투항하였고 1231년(고종 18년) 몽골이 장수 살례탑을 보내 고려를 침공할 때는 자발적으로 향도(嚮導)가 되어 몽골의 진격을 앞에서 이끌었다.
홍대순의 아들 홍복원(1206~1258년)도 아버지를 따라 무인(武人)의 길을 걸었다. 1232년 고려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하며 대몽(對蒙)항전에 들어가자 홍복원은 몽골군의 일원으로서 서북지방을 책임지는 낭장으로 있었다. 이듬해(1233년)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이가 병사들을 보내 서경(西京·평양) 탈환작전을 펼칠 때 홍복원은 대패하고서 겨우 목숨만 건진 채 원나라로 숨어들어갔다.
이후 몽골은 다시 고려를 야금야금 침략하기 시작하는데 그 앞잡이가 홍복원이었다. '고려사'의 한 대목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원(元·몽골)의 군사가 매년 침입해 주와 군들을 함락했는데 이는 모두 홍복원이 인도한 것이다." 그 지역(北界·북계)현황을 홍복원이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에서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릴 것 같던 홍복원은 복병을 만나 비명횡사 하게 된다. 당시 인질(禿魯花·독로화)로 몽골에 끌려와 있던 왕족인 영녕군 왕준(王·1223~1283년)이 바로 복병이었다. 왕준은 고려 8대왕 현종의 8세손으로 명목상의 왕족에 불과했다.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승화후 왕온은 그의 친형이다.
그러나 고려가 고종 24년(1237년) 마침내 몽골에 항복하고 몽골이 고종의 친조(親朝·직접 황제를 찾아와 알현하는 것)를 요구하자 그 대안으로 이듬해(1238년) 왕준을 고종의 친자식이라고 속여 몽골에 보내게 된다. 요동지방으로 끌려간 왕준은 홍복원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고려사'는 "홍복원은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길어지니 사이가 나빠지고 왕준은 점차 불평을 품게 되었다." 그 사이에도 고려가 조공(朝貢)을 제대로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1246년(고종 33년), 1247년 몽골은 고려를 침공하였는데 이때도 홍복원은 선봉에 설 만큼 몽골 황실의 든든한 총애를 받았다.
홍복원과 왕준 사이의 사단은 1258년에 벌어졌다.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두 사람이 다투던 도중 홍복원은 왕준에게 "속담에 기르던 개가 도리어 주인을 문다더니 그 격"이라고 면박을 주었다. 이 말을 몽골 황족인 왕준의 부인이 들었다. "내가 개와 살고 있단 말이냐!" 부인은 즉각 황제에게 고했고 황제는 칙사와 장사 수십명을 보내 홍복원을 발로 밟아 죽여버렸다.
홍복원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홍다구(1244~1291년)가 매국노의 피를 이어받았다. 1261년 몽골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했고 황제도 홍다구에게 홍복원의 관직을 계승해 몽골 내 고려군민에 대한 관할권을 내려주었다.
홍다구가 고려에 끼친 해악은 아비 홍복원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원종 12년(1271년) 황제의 칙서를 갖고서 고려를 찾은 홍다구는 원종을 보고서 배례(拜禮)도 하지 않을 만큼 오만했다. 고려와 일본이 내통하고 있다는 거짓정보를 황제에게 올려 몽골이 두 차례에 걸쳐 일본정벌(東征·동정)에 나서게 만든 것도 홍다구의 공작이었다.
사실 지휘부 일부만 뺀다면 온전하게 고려의 국력을 동원한 정벌이었기에 고려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충렬왕 3년(1277년) 제3차 일본정벌을 획책했지만 몽골 내 상황으로 인해 실행되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홍복원에게는 홍다구 같은 매국노 아들만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홍다구의 아우인 홍군상(洪君祥·생몰년 미상)은 "영녕공은 원망할지언정 조국을 배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충렬왕 18년(1292년) 몽골이 재차 일본정벌을 계획하며 고려로 하여금 배를 비롯한 군수물자를 동원하려 하자 홍군상은 고려의 뜻을 존중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홍군상이 직접 사신이 되어 고려를 방문하고 돌아갔고 최종적으로는 일본정벌 강행이 결정됐으나 배를 짓고 있던 도중 1294년 황제가 죽었다. 홍군상은 몽골 승상 완택(完澤)을 간곡하게 설득해 일본정벌은 중단됐다. 이에 고려조정에서는 홍군상에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칭호를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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