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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07 : 고려의 역사 176 (제25대 충렬왕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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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07 : 고려의 역사 176 (제25대 충렬왕실록 3)

두바퀴인생 2011. 11. 1. 03:20

 

 

 

 

한국의 역사 407 : 고려의 역사 176 (제25대 충렬왕실록 3)   

 

제25대 충렬왕실록

(1234~1308년, 재위 : 1274 6월~1298년 1월, 1298년 8월 복위~1308년 7월, 1298년부터 동년 8월 초까지는 충선왕 재위기간이므로 총 재위기간은 33년 6개월)  

 

2. 충렬왕의 가족들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를 비롯하여 정신부주 왕씨, 숙창원비 김씨, 시비 반주 등 4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이들 중 제국대장공주가 충선왕을, 정신부주 왕씨가 강양공 자와 정녕, 명순 등 1남 2녀를, 시비 반주가 소군 서를 낳았다. 이들 중 3명의 부인과 강양공 왕자, 소군 왕서의 삶을 간략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시비 반주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이에 대한 언급은 생략한다.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1259~1297)

장목왕후는 원 세조 쿠빌라이와 아속진가돈의 딸로서 봉호는 제국대장공주이며 몽고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이다. 고려에서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을 원하자 1274년에 당시 태자 자격으로 원에 입조하고 있던 충렬왕과 혼인하였다. 그리고 1274년 6월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해 11월에 고려에 왔으며, 이듬해 정월에 원성공주에 책봉되었다.

 

그녀가 개경에 왔을 때 충렬왕에겐 이미 정화궁주(정신부주 왕씨)와 그녀 소생 1남 2녀, 그리고 시비 반주 소생인 소군 왕서 등의 가족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원 세조의 딸이라는 이유로 제1왕비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정화궁주는 그녀를 대할 때마다 아랫자리에서 무릎을 끓고 앉아야 했다. 이는 장목왕후가 고려 출신의 왕비들과는 현격하게 대른 대접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목왕후는 지배국의 공주 신분임을 앞세워 국왕보다 더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때문에 충렬왕은 때때로 그녀의 강압에 못 이겨 정사를 처리하는 일이 잦았으며, 심지어는 원부인인 정화궁주를 감금하여 왕을 만나지 못하게까지 하였다.

 

또한 그녀는 원종의 셋째 아들인 순안공 왕종을 역모로 몰아 그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 자기가 소유하고, 왕종을 유배시키는 한편 그의 모후 경창궁주도 서인으로 전락시켜 궁궐에서 내쫓는다.

 

이렇듯 장목왕후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왕권을 능멸하자 충렬왕은 사냥과 여색이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장목왕후와 충렬왕 사이에는 갈등이 이어지고, 이것이 확대되어 후에 세자 원(충선왕)과 충렬왕의 권력다툼으로 발전한다.

 

장목왕후가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며 경계하던 인물은 궁인 무비였다. 그녀는 충렬왕의 총애를 받으며 주변에 많은 측근들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충렬왕은 그녀와 어울려 가무를 즐겼고, 사냥에도 항상 그녀를 대동하고 다녔다. 이러한 왕의 극진한 배려 때문에 장목왕후는 그녀를 어쩌지 못하고 속만 태우다가 1297년 5월 3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가 죽자 당시 원에 입조해 있던 세자 원이 입국하여 모후의 죽음이 궁인 무비와 그 주변 무리들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무비를 비롯한 그 측근들을 모두 죽이고 도당 40여 명을 유배시켜 버렸다.

 

장목왕후는 죽은 해 9월에 고릉에 매장되었으며, 충렬왕은 그녀에게 장목인명왕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1298년 충선왕이 일시적으로 왕위에 올라 그녀를 인명태후로 추존하였으며, 1310년에 원나라 무종이 제국대장공주에 추봉하였다.

 

정신부주 왕씨(?~1319년)

정신부주 왕씨는 종실 시안군 왕인의 딸이다. 충렬왕이 태손으로 머물 때 혼인하여 입궁하였으며, 충렬왕이 왕위에 오르자 정화궁주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1274년 제국대장공주가 입국하자 제2비로 전락하여 별궁에 유폐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276년 12월에 어떤 사람이 다루가치 석말천구 처소에 '정화궁주가 공주를 저주하고 있으며, 제안공 왕숙과 김방경 등 43인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내용의 투서를 하였다. 이 때문에 정화궁주 및 왕숙, 김방경 등이 하옥되었다. 하지만 재상 유경이 장목왕후를 찿아가 울면서 이들의 무죄를 주장하여 가까스로 풀려났다.

 

장목왕후 사후에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충렬왕과 함께 상수궁으로 거처를 옮겨 함께 지냈으며, 충렬왕 사후에도 10년을 넘게 살다가 1319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소생으로는 강안공 자와 정녕, 명순 두 원비가 있으며,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숙창원비 김씨(생몰년 미상)

숙창원비 김씨는 위위윤으로 있다가 물러난 김양감의 딸이며 용모가 뛰어난 여자였다. 그녀는 일찍이 진사 최문에게 시집갔으나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그런데 장목왕후가 죽자 충선왕은 부왕이 총애하던 궁녀 무비를 죽이고 대신 그녀를 충렬왕에게 바쳤다.

 

충렬왕의 사랑을 받은 그녀는 숙창원비에 봉해졌는데, 충렬왕이 죽은 후 빈전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충선왕과 눈이 맞아 불륜관계를 맺었다. 그 얼마 후에 충선왕은 그녀를 숙비로 봉해 다시 자신의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충선왕의 이같은 행위는 고려 풍속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몽고에는 부왕이 죽으면 모후를 제외한 나머지 후궁들은 아들이 취하는 풍습이 있어 그 전례를 따른 듯하다.

 

그녀를 숙비로 맞아들인 충선왕은 한때 완전히 정사를 폐하고 그녀와 노는데만 열중하였는데, 그녀와 노는 일에 방해가 된다 하여  팔관회를 정지시키는 일도 있었다. 또한 원나라 왕태후에게 부탁하여 몽고부인들이 머리에 쓰고 있는 고고를 구해다가 그녀에게 선물하기도 했을 정도로 그녀에 대한 충선왕의 애정은 지극했다.

 

그녀는 충선왕이 원나라에 머물 때도 곧 잘 원나라 사신들의 연회에 초청되기도 했고, 궁인들을 거느리고 박연폭포로 나들이를 떠나는 일도 잦았다. 또한 매일같이 사원을 출입하며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온갖 사치를 부리며 화려한 옷을 입고 다녔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소생은 없었던 것 같다.

 

강양공 왕자(?~1308년)

강양공 왕자는 충렬왕의 맏아들이자 정신부주 왕씨 소생이다. 그는 맏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제국공주 소생 충선왕에게 밀려 세자에 오르지 못했으며, 제국공주의 미움을 받아 1279년에 충청도 아주 동심사로 보내져 그곳에서 지내야 했다. 이는 당시 다섯 살의 어린아이였던 세자 원을 위협한다는 이유때문이었다.

 

하지만 1283년에 소환되어 강양공에 봉해졌으며, 1308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에게는 유, 고, 훈 등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 중 둘째 아들 왕고는 충선왕이 친자식처럼 사랑하여 궁중에서 키웠으며, 나중에 충숙왕에게 선위하면서 그를 세자로 세웠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봉호인 심양왕 자리를 그에게 물려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이 같은 충선왕의 충애를 기반으로 왕위를 넘보게 되었고, 누차에 걸쳐 충숙왕을 무고하여 곤경에 빠뜨렸다.

 

소군 왕서(생몰년 미상)

소군 왕서는 충렬왕의 둘째 아들로 시비 반주 소생이다. 시비 반주는 충렬왕이 태손으로 있을 때 최의의 시비로 있었는데, 그가 제거되자 김준에 의해 충렬왕에게 바쳐졌다.

 

그 후 충렬왕은 그녀에게서 아들을 얻었는데 그가 왕서이다. 왕서는 제국공주 장목왕후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어떤 이유로 장목왕후가 그를 좋아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덕분에 그는 대궐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왕소군이라는 칭호도 얻었다. 그리고 중량장으로 임명되어 거만한 행동을 하다가 충렬왕의 눈밖에 나서 1276년에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었다. 출가 이후 그의 삶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