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408 : 고려의 역사 177 (제25대 충렬왕실록 4)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408 : 고려의 역사 177 (제25대 충렬왕실록 4)

두바퀴인생 2011. 11. 2. 04:20

 

 

 

한국의 역사 408 : 고려의 역사 177 (제25대 충렬왕실록 4)   

 

제25대 충렬왕실록

(1234~1308년, 재위 : 1274 6월~1298년 1월, 1298년 8월 복위~1308년 7월, 1298년부터 동년 8월 초까지는 충선왕 재위기간이므로 총 재위기간은 33년 6개월)  

 

3. 일본정벌 전쟁 배경 및 관련 인물들

 

몽고는 세조 쿠빌라이가 즉위하면서 국호를 원으로 바꾸고 영토확장 정책을 더욱 가속화한다. 한반도는 물론이고 중국 대륙에서도 양자강 이남 남송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복속시켰고, 그 여파는 유럽까지 미쳤다. 이에 따라 남송 몰락도 시간 문제였고, 동북아 지역에서 복속되지 않은 나라는 오직 일본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은 여전히 남송과 유대관계를 형성하며 무역을 하고 있었고, 쿠빌라이는 이 같은 일본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1267년에 고려의 중재를 받아 일본에 사신을 보내고 속히 조공하라는 천서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 무렵 조이라는 자가 고려가 일본과 내통하여 원나라에 대항할 계책을 꾸미고 있다고 거짓 고변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이는 원래 고려 사람으로 진사 시험에도 합격한 바 있는 문사였다. 그런데 여몽전쟁 중에 고려를 배반하고 몽고에 투항하여 그곳에서 수재 칭호를 얻었다. 그는 한어, 몽고어, 금어 등 여러 나라 언어에 능통하고 국제정세도 밝은 인물이었다. 따라서 쿠빌라이에게 일본의 존재를 인식시킨 것도 아마 그였을 것이다.

 

당시 고려가 일본과 선린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한 조이의 주장에도 몇가지 근거는 있었다. 1263년 고려는 도서지역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들 때문에 대관서승 홍저와 첨사부녹사 곽왕부 등을 일본에 보낸 일이 있었다. 그리고 왜구의 근거가 대마도임을 확인하고 일본 조정이 왜구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요청했고, 일본은 고려의 요청을 수용해 대마도의 왜구들을 진압하였다. 그래서 중국으로 가던 일본 사절단이 풍랑을 만나 구주에 임시 정박했을 때도 고려 조정은 그들에게 쌀을 내주고 도움을 주었으며, 난파된 일본 상선을 구제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기도 하였다.

 

이 같은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조이는 1267년 정월 일본으로 향하던 몽고 사신이 풍랑으로 되돌아오자 이것을 고려의 고의적인 방해전술이라고 보고했던 것이다.

 

이 당시 몽고 사신들을 안내하던 사람은 송군비와 김찬이었다. 원나라로부터 일본문제에 대한 추궁을 받은 고려는 즉시 송군비를 원에 파견하여 해명을 하였다. 하지만 쿠빌라이의 추궁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고려는 1267년 9월에 반부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고 안경공 왕창을 원에 보내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반부는 일본에 당도하여 쿠빌라이의 친서와 고려 국왕의 국서를 전달했지만 일본 조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결국 이듬해 7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다. 고려는 이런 사정을 전달하기 위해 반부를 원으로 보냈다.

 

고려로부터 일본의 무성의한 태도를 전해들은 쿠빌라이는 몽고 사신을 직접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흑산도와 일본 간의 뱃길을 살피는 시찰단을 보냈다. 말하자면 그는 고려의 보고를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쿠빌라이가 원종에게 보낸 조서는 고려에 대한 이 같은 불신을 잘 말해주고 있다.

 

"먼젓번 당신에게 일본으로 가는 사신의 길 안내를 부탁하였더니 말을 꾸며서 바람과 물결이 험하여 쉬이 건널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반부 등이 어디로 해서 일본을 다녀왔단 말인가? 참으로 가증스럽고 어리석은 처사가 아닌가. 그대가 건널 수 없다는 곳을 건넜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번 보고에는 반부가 일본에 갔더니 그를 압박하여 돌려보냈다고 했는데 이 말도 어디 믿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제 다시 흑적, 은홍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반드시 일본에 도달하게 하려고 하니 마땅히 대신으로 하여금 길 안내를 하게 하여 이전처럼 지연시키거나 방해하지 말 것이다."

 

이렇게 하여 1268년 12월에 신사전과 진자후, 반부 등의 안내를 받아 원나라 사신 흑적과 은홍 등은 일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 본토에는 가지 못하고 이듬해 3월에 대마도에 도착하여 왜인 2명을 대리고 다시 원나라로 되돌아갔다.

 

왜인 2명을 데리고 신사전을 비롯한 고려인들과 흑적, 은홍 등이 연경에 도착하자 쿠빌라이는 무척 기뻐하며 고려인들에게 상을 내리고 2명의 왜인에게 일본이 원에 내조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대마도로 돌아간 왜인은 그 뒤 아무런 소식도 알려오지 않았고, 일본 조정 역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원은 다시 고려를 의심하고 추궁하기 시작하였다. 쿠빌라이는 원종에게 고려에 난파한 남송의 상선을 그대로 돌려보낸 일을 따지는 한편, 일본으로 가는 고려의 귀화인을 통해 한때는 일본이 해마다 고려에 공물을 바쳤다는 말을 들었다며 고려가 일본과 내통하고 원과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지 않느냐고 추궁하였던 것이다.

 

이에 고려는 남송의 배를 놓아준 적은 있으나 그것은 단순히 상선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일본에게서 공물을 받았다는 문제도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1272년 삼별초의 난이 한창이던 때에 이를 진압하러온 홍다구에 의해 새로운 문제가 하나 제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