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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06 : 고려의 역사 175 (제25대 충렬왕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406 : 고려의 역사 175 (제25대 충렬왕실록 2)
제25대 충렬왕실록
(1234~1308년, 재위 : 1274 6월~1298년 1월, 1298년 8월 복위~1308년 7월, 1298년부터 동년 8월 초까지는 충선왕 재위기간이므로 총 재위기간은 33년 6개월)
1. 변발한 충렬왕과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계속)
이 같은 영토회복에도 불구하고 고려 사회에 대한 원의 복속정책은 점점 강화되었다. 원은 고려의 행정관제가 자신들과 다름없다고 비판하면서 격하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1275년에 중서문하성과 성서성을 합쳐 첨의부로, 추밀원은 밀직사로, 어사대는 감찰사로 격하되고, 6부도 통폐합되어 전리사, 군부사, 판도사, 전법사로 바뀌었다. 게다가 묘호에 조나 종 대신에 왕을 붙이도록 하였고, 왕의 시호 앞에는 일괄적으로 '충(忠)' 자를 붙이도록 강요하였다. 또 선지(宣旨, 임금의 명을 널리 선초함)는 왕지(王旨)로, 짐(朕)은 고(孤)로, 폐하(陛下, 섬돌 아래라는 뜻으로 임금을 부르지 않고 임금을 표현하는 호칭)는 전하(殿下, 궁궐 아래라는 뜻으로 왕족을 부르지 않고 표현하는 호칭)로, 태자는 세자로 격하되었다.
이 밖에 몽고직제의 영향으로 생긴 관직도 많았ㄴ느데, 몽고식 기병이 기병이 야간 순찰을 돌게 하는 순마소, 매 잡는 일을 임무로 하는 응방, 귀족의 자제로 일찍이 왕을 쫓아 원나라에 질자(독노화라고도 불렀으며, 일종의 볼모 시종)로 깄다가 순번제로 숙위를 맡는 홀치, 몽고어를 습득케하는 통문관 등이 있었다. 그리고 관직은 아니지만 원나라 공주를 따라와 보필하는 임무를 맡았던 검수령(사속인) 등도 관직 이상의 힘을 행사했다.
이러한 몽고직제에 속한 관원들은 토지를 지급받는 등 특권을 누렸으며, 원나라 세력에 의지하여 권세가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부역을 피해 도망하다 잡힌 양민들을 부리며 대농장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며, 주세를 가로채고 주현의 부세를 뜯어먹는 등 여러 방면에서 권력을 남용하였다.
게다가 원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온 이후에도 줄곧 몽고인 시종을 부리며 몽고어를 쓰고 몽고 풍속을 그대로 따르는 바람에 고려 왕실에는 몽고 언어와 풍속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민족성을 고취시키고 자주성 회복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던 승려 일연은 1281년에 <삼국유사>를 저술하여 고려 민족의 역사적 전통을 일깨운다. 또한 당대의 대학자 안향은 민족주의와 춘추시대에 의한 명분주의 정신을 강조하는 '주자학'을 도입하여 고려 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하지만 충렬왕은 정점 몽고에서 배운 사냥에 빠져 정사를 뒷전으로 미루고 국고를 탕진하였으며, 그의 총애를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던 궁인 무비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졌다. 이 때문에 제국대장공주와 세자 원의 반발이 심했지만 충렬왕은 잦은 사냥과 폐행은 계속되어 일부 측근 신하들의 권력 독식이 심화되었다.
이렇게 되자 충렬왕과 세자 간에 알력이 생겼고, 세자는 1296년에 원에 가서 진왕 감마라의 딸 계국대장공주에게 장가를 들어 원의 부마가 된다. 그런데 그 이듬해 5월에 세자 원의 모후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하여 충렬왕과 세자 간의 알력은 더욱 심해진다.
모후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세자 원은 그해 7월 귀국하여 궁인 무비와 환관 도성기 및 최세연, 전숙, 방종저 등과 중량장 김근을 죽이고 그들 도당 40여 명을 귀양 보낸 후 다시 원나라로 떠난다. 이로써 원 왕실은 세자 원을 지지하게 되고, 충렬왕은 스스로 왕위를 내놓고 물러나겠다는 글을 원에 보낸다.
충렬왕이 물러남에 따라 1298년 1월 세자 원이 즉위하여 왕위에 오르니, 그가 충선왕이다. 하지만 충선왕은 고려제도를 복원하는 등 자주적 기틀을 마련하려고 하다가 왕비인 계국대장공주가 원에 무고하는 바람에 즉위 7개월 만인 그해 8월에 국새를 빼앗기고 원으로 압송된다.
충선왕이 물러나자 왕위는 다시 충렬왕에게 돌아간다. 이후 충렬왕은 아들 충선왕을 제거하기 위해 왕위를 10촌 종제인 서흥후 전에게 계승시키고 계국대장공주를 그에게 개가시키려는 음모를 진행한다. 그는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1305년에 직접 원나라를 방문하여 2년간 머물게 된다. 그러나 1307년 정월에 원나라 성종이 죽고 충선왕이 무종의 옹립에 공을 세워 힘이 강성해지는 바람에 이 계획은 무산된다.
무종의 신망을 얻은 충선왕은 그 후부터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아직 태자로 있던 무종의 힘을 빌려 그동안 자신과 부왕 사이를 이간질시키던 왕유소, 송방영, 송린, 한신, 송균, 김충의, 최연 및 그 일당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때부터 충렬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모든 정사는 충선왕이 주관하게 된다.
아들 충선왕을 제거하기 위해 원나라행을 강행했던 충렬왕은 비참한 몰골로 1307년 4월에 귀국길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308년 7월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능호는 경릉이며 그 위치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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