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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04 : 고려의 역사 173 (삼별초의 대몽항쟁에 대한 평가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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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04 : 고려의 역사 173 (삼별초의 대몽항쟁에 대한 평가 2)

두바퀴인생 2011. 10. 29. 04:40

 

 

 

한국의 역사 404 : 고려의 역사 173 (삼별초의 대몽항쟁에 대한 평가 2)   

 

 

삼별초 대몽항쟁에 대한 평가 2

 

사람은 모르다가 아는 것과 잘못 알고 있다가 진실에 직면했을 때 두뇌 속에서는 잠시 혼란 상태가 조성된다. 특히 역사적 지식에 대해서 왜곡된 역사를 잘못 알고 있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역사를 기술하는 사관은 객관적인 사료와 자료에서 주관적인 해석을 가하며 생존자와 승자에게 유리한 기술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기>를 쓴 '사마천'은 전한 '무제'에게 궁형을 당한 가운데 치욕을 참고 남은 여생을 절치부심하며 사기를 기술하였다. 무제는 사마천이 사기를 모두 기술하자 가져오라 하였는데, 그 내용을 본 무제는 대노하여 기록물을 내던지면서 당장 불에 태우라고 하였다. 무제에 대한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 사실적인 기술로 인해 분노를 샀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마천은 다른 한 부를 복사하여 이미 고향으로 보내 숨겨놓은 상태였다.

 

이처럼 역사 기록은 100%로 사실적인 기록은 힘들다. 그러나 그것보다 역사 기록을 왜곡해석하여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 조작하는 행위는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그런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정확하게 평가해보는 것은 역사를 보는 눈을 맑게 해주고 미래에 대한 혜안을 키우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 삼별초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재해석 해보는 것은 우리들이 역사를 보는 눈과 마음을 맑게 해 줄 것이다.

 

고려의 대몽항쟁 가운데서 별미는 삼별초의 대몽항쟁이다. 우리는 삼별초에 대해서 막연히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고려 조정을 위해 목숨을 다해 끝까지 몽고군에 항쟁한 유일한 집단으로 오늘날에도 많이 인용되고 강조되며 그들의 항몽정신을 되새기면서 교훈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과연 삼별초가 진정 고려를 위해서 대몽항쟁을 벌인 것일까? 삼별초가 태생적으로 창설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항몽정신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등을 되씹어 보고자 한다.

 

아래 글은 '천안공전 이익주 교수'의 글에서 부분 발췌하여 요약.인용하였다.

 

 

삼별초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싸웠나?

 

삼별초는 어떠한 존재인가? 몽고의 침략에 맞서 조국 고려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호국의 화신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항전한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에 불과한가? 

 

지금 대부분의 후대 사가들이 들먹이고 있는 전자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 명쾌한 설명없이 혹 과장되거나 조작된 이야기는 아닌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해 볼 필요은 없을 것인가? 실제로 삼별초가 대몽항쟁을 벌였던 1270~1274년을 중심으로 앞 뒤 시기의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이러한 의문은 좀처럼 지우기가 힘들다.

 

민중을 억압하기 위해 야별초를 조직하다.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등 세 개의 별초군을 합해 부른 이름이다. 그것이 설치된 시기는 대략 1230년대 최우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이다.

 

고려사를 보면,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으므로 우수한 병사들을 모아 매일밤 순찰하며 도적을 막게하고 이를 야별초라 하였다. 도적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자 야별초를 각 지방에 내려 보내 도적을 막도록 했는데, 그에 따라 야별초의 군사가 증가되어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었다. 또 몽고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을 모아 부대를 만들고 신의군이라 하였다. 이것을  이름하여 삼별초라 하였다.

 

여기서 삼별초의 모체가 되는 야별초는 나라 안의 도적을 막기 위해 조직되었다는 사실이다. 도적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있었지만 도적은 성격에 따라 달랐고 여기에 도적의 사회사가 있다. 최우가 야별초를 두어 도적을 막으려 했던 도적은 도대체 어떤 도적일까? 왜 하필이면 그 당시 도적이 그토록 많았을까? 그렇다면 최우가 이를 막기 위해 별도의 군대를 조직할 정도였다면 도적들의 기세가 조직적인 반란군 이상 수준이 되었다는 점이다.

 

무신정변 이후 지배층의 수탈이 더욱 심해지고, 한편으로는 집권자들의 권력쟁탈전이 격심해지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이완되었고 백성들이 그 틈을 이용하여 항쟁하였는데, 망이.망소이 난, 청주 민란, 김사미.효심의 난 등이 그것이다. 그들은 지역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각 지방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였으며 그 위세가 야별초라는 특수부대를 조직하여 지방에 내려 보낼 정도로 심각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초적들의 민란은 1196년 명종 26년 최충헌이 집권하여 항쟁을 강력하게 진압하자 이전처럼 군.현을 단위로한 조직적인 항쟁을 벌이지 못하고 수십, 수백 명 단위로 항쟁을 벌이는 그 규모가 축소되었다. 이들을 도적, 산적, 화적 등으로 부르지만, 당시는 초적으로 불려졌다.

 

최충헌이 죽고 최우가 집권하여 야별초를 만들어 진압하려 했던 것도 바로 이들이다. 즉, 야별초가 상대했던 도적이란 그저 남의 물건이나 훔치는 좀도적이 아니라 지배층의 불법적인 수탈에 저항하여 항쟁했던 민중 세력이었으며 여기서 야별초의 반민중적 태생적 성격이 잘 나타난다.

 

더욱이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핵심 군사력이었다. 최충헌은 자신의 호위 군사의 숫자가 거란군을 대적했던 수보다 많았으며 이동로 주변 사방 10리 밖까지 호위 군사들을 배치하여 통제하였을 정도였다. 최우는 삼별초로 하여금 자신의 호위군사로 활용하면서 사병처럼 부렸고 백성들의 항쟁뿐 아니라 정적을 제거하는 세력으로도 동원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녹봉도 다른 군인들보다 더 많이 받았고 권력자로부터 보너스도 두둑하게 지급되었다. 그리고 진급에서도 특혜를 누렸다. 이처럼 특별 대우를 받던 삼별초는 몽고 침입시에는 대몽전에도 투입되었는데 지방에도 파견되어 지방군과 백성들을 지휘하여 대몽전을 전개하기도 하였고 강화도 궁궐 수비와 강화섬 방어에도 주력군으로 활약하였다. 이는 국가 안보와 정권 안보를 구분하기에 애매한 점으로도 작용하였다.

 

대몽항전을 정권유지 차원에서 이용

1231년 고종 18년 몽고의 1차 공격이 시작되었다. 고려의 총력저항에도 불구하고 구주(평북 구성:신의주와 개천.정주 사이 중간 지점), 자주(평남 순천: 신의주-정주-안주-순천-평성-평양의 중간지점)  등지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충주성 방어전투를 승리하여 몽고군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또 경기 일원에서 초적들이 일어나 대몽항전에 참여하였고, 말 그대로 총력전을 전개하였다.

 

1차 침공 후 몽고군이 철수하자 무인들의 항전파와 문신들의 강화파로 갈리어 두 가지 주장이 제기되어 조정은 왕, 문신, 무신들 간에 첨예한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최우는 몽고와의 강화는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므로 적극 경계하였고 반대하였다. 최우는 대몽항전이 장기화 되면 될수록 자신의 정권은 장기간 유지될 것으로 정치적인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력을 앞세운 최우의 강압에 의해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고의 침입 횟수가 증가되면서 전쟁의 피해도 점점 격심해졌고, 1236년 한 해 동안 몽고에 잡혀간 사람만 무려 206,800명이나 되었고 살륙당한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문화재 소실은 물론 전국토가 몽고군의 방화로 초토화되고 말았다. 계속된 침공과 항전에 지친 사람들이 점점 이탈하면서 투항하는 사태가 속출하였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강화 조정에서는 각 지방에 대한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심지어 백성들이 몽고군을 반길 정도였다.

 

몽고, 고려 조정, 민중의 삼각 대립

백성들의 항쟁은 1236년 전라도 일대 초척 이언년 형제가 백제부흥을 내세운 봉기가 대표적이다. 몽고군의 침공 이후 발생된 봉기로 정부의 통제력이 이완된 틈을 타서 일어난 반란이었다. 또 전쟁의 위해가 격심해지자 백성들이 이탈하기 시작하였고 강화 천도를 반대하고 사대가 당연한 것으로 주장하며 강화론이 문신들 사이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으나 최우의 강력한 항전 의지로 인해 모든 것이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전쟁이 20여 년이나 지속되자 문신들의 강화론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전쟁의 피해가 날이 갈수록 막심해지고 있다는 명분과 몽고가 강화 조건을 낮춤으로써 대두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강화론은 더욱 설득력을 높여갔고 최씨 무인정권은 내분으로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몰락의 길로 가고 있었다.

 

강화론의 대표적인 문신 유경이 김준과 같이 정변을 일으켜 최의를 살해함으로써 최씨 무신정권은 종말을 고하였다. 그러자 강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무신 출신의 대표격인 김준이 반대를 하였다. 그래서 강화파와 항전파가 대립하는 가운데 갈등이 증폭되었고 무신들의 입지가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몽고에서 귀국한 태자 원종이 즉위하여 친몽정책을 추진하자 왕과 무신들간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기 시작하였다. 그후 몽고는 송나라와 전쟁에 고려 군대를 파견하도록 요청하였고 무신정권의 실권자들을 호출하는 등 고려의 무신정권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하였고 그런 가운데 무신정권의 내분으로 임연이 김준을 죽인고 권력을 장악하고 국왕 원종을 폐위하고 항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원종의 지원요청에 몽고군이 달려와 무력 시위를 벌이자 임연은 다시 원종을 복위시키게 된다.

 

원종이 몽고에 친조하고 있는 동안 임연이 등창으로 갑자기 죽게 되자 그 아들 임유무가 권력을 승계하였으나 원종이 무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몽고군을 이끌고 귀국하는 가운데 개경에 도착하여 무신정권으로 하여금 개경으로 출륙하도록 명령하였으나 임유무가 거부하는 가운데 원종의 밀지를 받은 세력에 의해 정변이 일으나 임유무를 제거함으로써 드디어 80년 동안 집권하였던 무신정권을 타도하게 된다.

 

삼별초, 또 하나의 고려 정부. 무엇을 위한 대몽항쟁이었나?

무인정권이 붕괴되고 강화가 본격적으로 성립될 기미가 보이자 강화 무신정권의 실질 군사력인 삼별초는 동요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강화 후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무신정권의 수족이었으며 강화를 반대하였고 몽고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진 인원으로 편성되고 무장된 삼별초는 당연히 강화후에는 섬멸의 대상이 될 것은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개경 조정에서 삼별초 명단을 작성하여 몽고군에게 넘기는 문제가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그래서 배중손을 중심으로 뭉친 삼별초는 새 왕을 옹립하고 관리를 임명하는 등 또 다른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강화도 조정의 모든 재물과 곡식, 귀족 가족들을 1천여 척의 배에 모두 싣고 진도로 천도를 결행하게 된다. 그 항해 대열이 꼬리를 물고 길게 내려갔다고 한다.

 

삼별초는 진도에 도착하여 궁궐을 짓고 산성을 쌓는 등 1273년까지 대몽한전을 전개하였다. 삼별초는 남해.거제.마산.김해.동래 등 남해안 지역 일대를 장악하였고, 나주.전주.인천까지 진출하여 위력을 과시하였다.  또 전라, 경상도 조운선을 차단하여 개경 조정에 타격을 주었고, 몽고의 일본 정벌에도 차질이 초래되었다.

 

삼별초에는 일반 백성들의 참여가 쇄도하였고 백성들의 지지와 호응이  있었기에 항쟁이 가능하였다. 그래서 경상도 밀양에서 백성들이 봉기하여 개경 조정에 반대하였다. 또 개경 관노가 반기를 들어 다루가치와 관리를 살해하고 삼별초와 합류하려고 시도하였고, 경기도 화성 대부도에서도 봉기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진도로 가서 진짜 국왕을 섬기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는 백성들의 자발적인 의사였으며 강제력이나 시간적 여유가 없던 진도의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의 공격에 밀려 배중손 이하 주력군 대부분이 전멸하고 잔여 세력은 제주도로 이탈하였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무신정권의 붕괴와 강화파의 승리는 지배층 내부의 권력투쟁에 불과하였고 강화의 성립은 새로운 지배층과 외세와의 결탁이라는 점에 불과하였으며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가중되었고 항전은 불가피하였다. 고려 조정, 몽고 세력과 반몽고 세력과 대립 구도로 삼별초의 항쟁 목표와 일치하였으므로 백성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삼별초의 항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첯째는 지배층 내부의 정쟁에서 패배한 무신정권의 잔존 세력의 정치적 반란이었으며, 둘째 민란의 전통이  대몽항쟁의 전통으로 계승된 백성들의 항쟁과 자연적으로 병합되었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역사적 의미는 전자이나 외세 침략과 지배층에 반대하는 백성들의 저항이 폭발적으로 나타났던 점은 후자에 해당될 것이다. 따라서 제주도 삼별초 세력의 최종 몰락은 삼별초 항쟁과 백성들의 항쟁이 완전히 진압된 것으로 외세에 의해 좌절되었다는 점이다.

 

 

삼별초의 역사적 평가

 

삼별초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1930년대 일제 식민치하에서 신채호에 의해 주창된 것으로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측면으로 역사적 평가를 하였다. 또 5.16 군사혁명 이후 혁명의 정통성과 당위성.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고려의 무신정권을 민족적.진취적인 성격으로 묘사하는 등 정치적 의도에 의해 왜곡 해석되고 강조되었다.

 

단지 외세와 싸움이 민족적이라고 평가가 가능할 것인가? 삼별초는 무신정권에 의해 태어났고 기생하면서 백성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활용되었고 무신정권의 권력유지에 이용되었던 세력이었다. 무신정권이 붕괴되자 삼별초가 갑자기 민족적인 군대로 둔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최씨 무인정권의 대몽 항전론과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국가안보와 정권안보를 구분하지 못하고 필요에 의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민중과 민족의 개념을 혼돈하여 민중을 도외시한 민족주의는 전체주의나 국수주의 같은 극우 논리에 빠질 위험성이 많다. 삼별초라는 반민중적 세력이 민족주의적일 수는 없으며, 독재자의 민족주의도 진정한 민족주의가 될 수가 없을 것이다.

 

얼마전 뉴스에 리비아의 민주화 사태가 240여 일 이상 장기간 내전을 치른 끝에 카다피가 끝까지 항전하다가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한 날이라 의미가 새롭다. 민중을 도외시한 리비아의 카다피 독재정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다가 40여 년만에 종말을 고하였다. 북한 김일성 세습 독재정권도 63여 년이 지났다. 둘 다 고려 무신정권 80여 년 기간보다 짧은 기간이지만, 리비아는 40여 년 만에 결국 망했고, 북한은 아직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다. 장기 독재정권인 시리아와 예맨도 리비아와 같은 길을 갈지 모른다. 북한은 경제는 현재 빈사상태이며 아사자가 속출하고 탈북자가 계속 증가되는 가운데서도 핵무기를 개발하는 등 무력증강에 심혈을 기울여 정권유지에 안간힘을 쏟으면서 폭정과 폭압은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 북한이 얼마나 더 갈 것인지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민중을 도외시한 독재정권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