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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02 : 고려의 역사 171 (제24대 원종실록 6) 본문
한국의 역사 402 : 고려의 역사 171 (제24대 원종실록 6)
제24대 원종실록
(1219~1274년, 재위 1259년 6월~1274년 6월, 15년)
4. 원의 고려복속정책과 삼별초의 난
원종 즉위 후 원의 고려복속정책이 가속화되면서 개경 환도 문제를 놓고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친몽파와 대몽강경책을 구사하던 무신정권 사이에 치열한 힘 대결이 전개된다. 이 같은 현상은 새로운 무신집정 김준을 거쳐 임연 집정기에 와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몽고의 입김이 점차 강화되면서 상대적으로 무신정권은 입지가 좁아져 결국 몰락으로 치딛는다. 그리고 궁지에 몰린 나머지 마지막 무신집정 임유무가 살해되자 개경 환도는 자연스럼게 이뤄진다. 이에 강화도를 근거지로 무신정권의 권력 기반이었던 삼별초는 장군 배중손의 지휘 아래 승화후 온을 왕으로 세우고 난을 일으키게 된다.
삼별초는 원래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으로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일컫는다. 이들은 비록 무신정권의 사병으로 조직되었으나 경찰과 군대를 겸하고 있었으므로 공적인 조직에 가까웠다.
이러한 삼별초의 정확한 설치연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삼별초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야별초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232년 고종 19년에 나타난다. 그리고 신의군 및 좌.우별초는 각각 1257년과 1258년에 처음으로 언급된다. 따라서 삼별초는 최씨 무신정권 말기에 조직된 단체임을 알 수 있다.
삼별초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야별초는 야간 경비를 담당하는 일종의 방범대로서 도둑이 들끓자 최이가 설치한 조직이다. 비록 방범대에 불과했지만 야별초는 그 어떤 정규군보다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최정예부대였다.
이 야별초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숫자가 늘어나게 되어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신의군이 여기에 가세하여 삼별초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삼별초는 수도경비대, 친위대, 특공대, 경찰대, 전위대 등의 모든 역활을 수행했다. 이렇게 되자 정규군의 힘은 약해지고 오히려 삼별초가 정규군을 대신하게 되었다. 몽고와의 전투에서도 아들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정적을 제거할 때도 이들의 힘을 이용하였다.
김준, 유경 등이 최의를 제거할 때도 삼별초의 힘이 동원되었다. 또 임연이 김준을 제거할 때도 샴별초가 동원되었으며, 송송례가 임유무를 죽일 때도 삼별초의 활약이 컸다. 이처럼 삼별초는 점차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삼별초의 주요 근거지는 강화도였으며, 자신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강화도를 고수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임연이 궁지에 몰려 실각하고 원종은 원에서 귀국하는 길에 바로 개경 환도를 추진하여 삼별초의 명부를 빼앗아 병권를 장악하려 하였다. 당시 개경은 몽고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개경환도는 고려의 몽고 복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원종이 빼앗은 삼별초 명부가 몽고군의 손에 들어가면 삼별초 구성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뒤따를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말하자면 고려의 최정예 부대이며 군사력을 가진 삼별초는 붕괴 위기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삼별초가 개경 환도를 반대하고 난을 일으킨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270년 6월 삼별초는 장군 배중손과 야별초를 이끌고 있던 노영희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키고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 같은 삼별초의 반란은 그동안 몽고의 침입과 학살, 파괴로 반몽감정이 깊어진 고려 하층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일반 민간은 고려 왕실이 친몽적 경향을 띠며 출륙환도를 단행한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보였고, 삼별초는 이 같은 민간 동향을 기반으로 반몽 세력을 규합하려 했던 것이다.
삼별초는 강화에다 관부를 설치하고 강화도에 남아 있던 귀족들을 모두 배에 태워 진도로 이송시켰다. 강화도는 육지에서 너무 가까워 몽고군의 반격이 용이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보다 안전한 진도로 근거지를 옮긴 것이다. 이 때 인력 이송에 동원된 배는 무려 1천여 척이나 되었다.
삼별초가 근거지를 진도로 옮기자 고려 조정은 무척 당황하였다. 몽고군은 원래 해전에 약했고, 고려 정부군은 삼별초에 대항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도로 근거지를 옮긴 삼별초는 순식간에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곧 전라도 일대를 제압하였다. 이 때문에 전라도 토적사참지정사 신사전과 부사 이빈이 삼별초에 쫓겨 개경으로 도망쳐 오기도 하였다.
삼별초의 위세가 이처럼 강해지자 조정은 1270년 9월 김방경은 전라도 추토사로 임명되어 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때 몽고 원수 야해도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께 나섰다.
이리하여 여몽연합군과 삼별초 간에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연합군은 군사력을 믿고 대대적인 공세를 전개하여 삼별초를 궁지에 몰아넣곤 하였으나 그때마다 해전의 나약함이 드러나 다시 전세가 역전되곤 하였다.
삼별초는 진도, 거제도 등 도서해안과 남해, 합포, 동래, 김해 등지에서도 강력한 군사활동을 벌였다. 또한 11월에는 제주도를 공략하여 새로운 거점확보에도 성공하였다.
그러나 1271년 고려인으로 몽고에 항복하여 몽고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가 새로운 몽고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 정부군과 함게 진도에 대한 총공세를 감행한다. 이 때 진도가 함락되어 배중손이 전사하고 왕으로 옹립되었던 승화후 온이 홍다구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삼별초는 대단한 타격을 입었다.
그 후 김통정이 잔여 삼별초를 규합하여 제주도에 본부를 설치하고 다시금 반격작전을 감행한다. 이 결과 삼별초는 점차 제해권을 되찿고 영향력을 확대하여 한때는 안남도호부(경기 부천)를 공략하여 연합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도 하였다. 이에 여몽연합군은 제주도에 대한 공격계획을 수립하여 1273년 2월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이 때 여몽연합군은 함선 160척, 수륙군 1만 명이었다.
연합군의 이 같은 대공세에 밀린 삼별초는 계속 후퇴하다가 뿔뿔이 흩어졌다. 삼별초를 이끌고 있던 김통정은 그해 4월에 전사하였고, 잔여 삼별초 1천 3백여 명은 모두 포로로 붙잡혔다. 이로써 삼별초의 난은 발발 3년여 만에 완전히 종결되었다.
삼별초의 항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경상도 밀양과 청도의 농민들이 삼별초에 호응하여 관헌을 습격하였으며, 개경의 관노들이 삼별초에 동조하여 몽고의 다루가치와 고려의 관리를 죽이고 진도로 도망가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탄로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이처럼 삼별초의 난은 단순히 무신정권을 수호하고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한 군사반란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그 차원을 넘어선 고려 백성들의 지지와 호응을 얻게 되고 백성들이 합류하게 되면서 저절로 대몽자주전쟁의 성격으로 승화되게 되었다. 하지만 삼별초의 난이 몽고군의 입지를 강화시켜 몽고의 고려복속정책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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