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우면산의 가을 25 : 10.26 당시 신재순, "난 딸 둔 이혼녀였다."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우면산의 가을 25 : 10.26 당시 신재순, "난 딸 둔 이혼녀였다."

두바퀴인생 2011. 10. 25. 04:04

 

 

 

우면산의 가을 25 : 10.26 당시 신재순, "난 딸을 둔 이혼녀였다."

 

                                                                   우리집 근방 고급주택 미켈란 입구

 

어제 아침 날씨는 포근하였으나, 오늘은 날씨가 춥다니 옷을 단단히 입고 자전거를 타야 할 것 같다. 낮에는 비도 내렸고 기온이 내려가 난방도 돌렸다.  요즘은 해뜨는 시간이 점점 늦어져 아침 6시가 넘도록 어둡다.  교대-강남-고곳터미널-신반포 아파트를 돌아 다시 고속터미널 쪽으로 돌아서 구반포 아파트 쪽으로 가면 아파트 끝단에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는 곳이 있다. 지난 며칠 동안 모과나무에서 모과를 5~6개 정도 따다가 술을 담그고 차를 끓여 먹을 수 있게 얇게 썰어서 설탕에 재어 두었다. 마누라 왈, 향기가 좋다나?

 

새벽길을 나서면 골목 고양이들이 음식물 쓰레기 통 뚜껑을 열거나 통을 쓰려뜨려 놓고 잔치를 벌이고 있다. 새끼까지 합세하여 온 가족이 즐거운 식사를 즐기는 것이다. 저들끼리 서열다툼이나 영역다툼으로 덩치큰 고양이 두마리가 서로 어르렁거리며 싸우기도 하고 한밤에는 새끼 울음 소리가 애기 울음 소리 같기도 하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재빨리 차량 밑으로 숨는다. 항상 경계하는 눈초리로 나를 응시한다. 간혹 차량에 치어 죽은 고양이도 본다. 어미를 잃거나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는 고양이도 있다. 서울 인구의 일부를 이루는 고양이는 도시 곳곳에 살고 있으며 화단이나 계단 밑 담벼락 틈, 탱크 밑 등 비를 피할 수 잇는 곳이면 어디던지 살고 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어 고양이들도 노숙자처럼 어딘가 따뜻한 곳을 찿는다. 빌라 현관문을 열어 놓으면 내부로 들어와서 지하층 계단 밑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 사람들이 각종 음식물이나 물 등을 통에 담아 고양이가 먹도록 길바닥에 내놓기도 하지만 나중에 치우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계속 증가하며 도시 미관을 해치는 고양이 퇴치를 위해 대책도 강구해야 할 것이고 음식물 쓰레기 통 문제도 지혜롭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농작물을 해치는 야생 들짐승들도 골치아픈 일이다. 농부는 애가 타지만 동물보호단체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은 농사를 모르기 때문이며 농민의 마음을 이해못한다. 자연환경보존과 야생동물과의 공존은 좋지만 어느 정도는 적절한 한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주장만 옳다는 그릇된 사고가 너무 팽배하여 타인을 무시하는 태도가 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10.26이 내일이다. 서울 시장 선거도 있는 날이다.  박후보 편에 안철수까지 가세했다. 나경원과 한나라당이 분개한다. 과학자가 정치판에 뛰어 들었다고...서울 시장이 그렇게 대단하고 좋은 자리인가? 민주주의란 허울을 쓰고 벌이는 선거라는 것이 인간들을 정말 추악한 모습으로 변질시키는 모양이다.  거짓말과 표리부동안 언행으로 유권자를 속이고 권력에만 눈이 멀어 탐욕이 넘쳐나는 장님들 같다. 인간아 인간들아~~ 

 

 

박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운명을 달리한 지도 어언 40년이 지났다. 유신의 종말을 알리는 총소리는 고려 시대 무신들이 무신정변을 일으킨 후 계속된 권력 투쟁에서 집권 무신 권력자를 또 다른 주변 인물이 살해하면서 권력을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재규는 준비되지 않은 거사를 단행하였고 권력을 잡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어쩌면 우발적인 사건이었는지도 모르지만 평소 괄시를 맏아오던 차지철에 대한 그동안 쌓여 왔던 울분이 폭발하면서 그를 총애하던 독재자를 같이 제거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이토를 저격하여 살해한 안중근 같은 영웅이 되기를 희망했는지 모른다. 차지철의 오만방자한 태도와 언행이 결국은 박정희의 죽음까지 몰고간 꼴이 되고 말았다. 역사적인 평가는 후대에 다시 이루어지겠지만, 국력을 배양하고 경제를 살려 백성들이 가난과 배고픔에서 탈출하게 만든 그 위업은 평가절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려 무신정권이 끝나고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무신정권의 하수인 세력으로 민중을 탄압하던 태생적인 죄로 인하여 대몽항쟁의 순수성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혁명은 자주성, 명분, 정통성, 애민정신이 출발점이다. 그렇지 못하고 자신의 권력쟁탈과 부귀영화만을 위한 혁명은 그 생명력이 짧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에서 반정, 반란으로 거사하여 권력을 잡지 못하는 자는 역사에서 영원히 역적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대부분의 역사 기록을 볼 때 김재규는 실패자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역사란 승자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건은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에 의해 김재규와 중정 요원들이 체포 구금되고 신군부가 등장하여 12.12 시태를 야기하게 만들어 제5공화국이 들어서게 만든 꼴이 되고 말았다. 박정희의 친일파 전력이나 남로당 관련 사건도 모두 그가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혁명 후 18년 장기집권을 지속시키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무리한 수단을 강구하던 유신정권은 총을 들고 혁명으로 일어났으나 결국 김재규의 총 한방에 모두가 쓰러졌다.

 

그날 그 역사적인 운명의 자리에 함께 있었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싣는다. 역사의 큰 소용돌이 속에서도 살아남아 아직도 미모를 잃지 않은채 어연한 여인으로 살아온 그녀가 대견스럽고 잔잔한 눈빛이 애처롭기만 하다.

 

 

신재순 “10·26 당시, 난 딸 둔 이혼녀였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여인’ 신재순
32년 만에 밝힌 박정희 시해 그날 밤의 진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신재순(54)씨가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LA 중앙일보 백종춘 기자]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한국 현대사의 한 분수령이 됐던 1979년 10월 26일, 그 궁정동 만찬에 불려갔었다.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목격자의 한 명이 됐다. 사건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 그녀는 지금 중견 배우로 활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거의 은둔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외국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재미동포를 만나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인근에 자리 잡고 살았다. 세월은 어느덧 만 32년이 흘렀다. 20대 초반이던 그녀는 이제 손녀 3명을 둔 50대의 중년이 돼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을 받고 숨을 거둔 10·26사건 현장에 있었던 신재순(54·당시 H대 연극영화과 3년)씨. 그녀는 83년 이후 미국 LA 근교에서 살고 있었다. 3년 전부터는 가디나에서 구이집을 경영하고 있다.

 구이집에는 지난 9월 초 처음 들렀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카운터에 서 있는 여인이 신재순씨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소주가 몇 순배 돈 후 종업원을 통해 신씨를 모셨다. 앉자마자 기자 신분을 밝히고 음식점에 들른 것이 인터뷰 때문이라고 솔직히 말했다. 그녀는 단칼에 거절했다. 인터뷰는 하지 않겠다고. 음식이나 맛있게 들고 가라고 했다. 첫 대면은 그렇게 끝났다. 일주일 후 다시 그곳을 찾았다. 이번에는 첫 만남보다는 많이 부드러워진 상황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인터뷰는 사양하겠다고 했다. 쉽지 않았다. 그날 이후 여러 차례 다시 찾았다. 마침내 그녀는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인터뷰 날짜가 정해졌다. 언론과의 인터뷰는 약 14년 만이다.

 

그해 12월 16일, 심수봉씨(왼쪽 모자 쓴 사람)와 함께 육본계엄군법회의에 출두했을 당시의 신씨 모습. [중앙포토]
 -10·26 사건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했다는 ‘버러지’ 발언의 진상은 무엇입니까.

 

 

 “10·26 사건 이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총을 쏘기 전에 ‘각하, 이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습니다. 이는 보안대(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를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에서 시켜서 한 말입니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았어요. 94년에 출간한 자전적 소설 『그곳에 그녀가 있었네』에도 한결같이 주장했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조사 과정에서 요원들은 ‘함께 자리했던 심수봉이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너는 왜 다르게 이야기하느냐’며 다그쳤고 지속적으로 세뇌시켰습니다. 나중에는 나 자신조차 어느 게 진실인지 혼란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 발언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김 부장이 차 실장에게 총을 쏘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느냐는 지금도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같은 자리에 있었던 심수봉씨는 신씨의 책이 나온 후 4개월쯤 뒤에 펴낸 『사랑밖에 난 몰라』라는 책에서 “김 부장이 대통령 앞에서 다른 참모들과 다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버러지 같은…”이라는 발언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신씨의 이번 증언으로 김재규의 ‘버러지’ 관련 발언 부분은 새로운 정리가 필요하게 됐다. 당시 외부의 사건 목격자 두 명 얘기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반면 한겨레신문은 79년 11월 30일 류택형 변호사가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김재규를 찾아가 나눈 대화의 녹음을 공개하면서 김재규가 ‘버러지’ 발언을 한 것으로 지난 18일 보도했다. 한겨레가 전한 김재규의 관련 육성은 “나는 이 버러지 같은 새끼, 하고 이 말을 하고 ‘빵! 빵-! 하고”로 돼 있어 그해 11월 6일 합수부 발표와 유사하다. ‘버러지’ 부분 발언은 심수봉·신재순씨-합수부·김재규 간에 차이가 있어 계속해서 미스터리로 남을 가능성이 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검증에서 박 전 대통령을 총으로 쏘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중앙포토]

 

 

 -10·26 사건 이후 어떻게 지냈나요.


 “10·26사건은 나에게는 운명적인 사건입니다. 전혀 상상도 하지 않았던 뜻밖의 일입니다. 평생 지울 수 없는 사건으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만약 그 사건이 나지 않았다면 연예계 쪽으로 풀렸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습니다. 정말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참석한 자리에 대통령이 앉아 있었고 거기서 부하에게 총격을 받고 돌아가신 거예요. 이후 10·26사건을 무던히도 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어요. 아직도 충격이 남아 있습니다. 그 사건은 내가 태어나서 사람이 죽는 것을 처음 목격한 것이었습니다. 또 총격 사건이었기 때문에 총에 대한 공포가 여전합니다. ‘땅’ 소리만 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하지요. ”

 -당시의 총격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자신들이(김재규 부장과 거사 계획에 가담했던 중정 요원들) 계획했던 일이 성공했다고 확신해서 안 죽였을 거라는 생각은 해봤습니다. 데려다 주면서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말라’고 했었습니다. 그 이후 입이 무거운 여자가 됐지요.”

 -박정희 대통령과는 짧고도 비극적인 만남이 됐는데요.

 “ 독재를 하기는 했지만 경제적으로 나라의 발전을 많이 이루고 국민을 위했던 분입니다. 사건 현장에서 총상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나는 괜찮아’라고 한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의연했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분이었어요.”

  그는 또 다른 고백을 했다. 10·26 사건 당시 이미 결혼해 딸까지 둔 이혼녀였다고 했다. 대학생 미혼 여성으로만 알려졌던 것과는 달랐다.

 -대학생 때 결혼을 한 계기가 있다면.

 “대학 2학년 때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과 함께 휴학했었지요. 재력가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가정적인 남자는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도 차를 몰고 다닐 정도로 여유 있는 생활을 했습니다. 막 20대를 넘긴 젊은 나이였고, 참으며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 딸을 데리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후 자식의 미래를 걱정한 친정어머니가 어느 날 손녀를 친가로 데려갔습니다. 5~6년 전에 큰딸로부터 연락이 와 다시 만났습니다. 지금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잘살고 있습니다. 대형 은행의 간부로 일하고 있지요.”

 그는 이혼으로 끝난 두 번째 결혼에서도 딸을 하나 얻었다. 현재 같이 살고 있다. 큰딸이 낳은 딸과 작은딸이 낳은 두 딸 등 모두 3명의 손녀를 두고 있다.

 신재순씨에겐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 “자식들, 손녀들 잘되고, 하고 있는 비즈니스가 잘됐으면 좋겠어요. 또 내가 받은 만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고요. 그리고 나중에는 다시 한국에 가서 살고 싶습니다. 조용한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아름답게 마무리했으면 좋겠어요. 만약 기회가 된다면 연극도 해보고 싶어요. 언제든지 오면 받아준다는 학교 선배가 대표로 있는 극단이 있어요. 자신은 없지만 하고 싶어요.”

 신씨는 두 달 전부터 교회에 나가고 있다. 심수봉씨가 권유했다고 한다. 새로운 신앙인의 삶을 꾸려 가며 마음의 평안을 찾고 있다.

LA 중앙일보 김병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