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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00 : 고려의 역사 169 (제24대 원종실록 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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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00 : 고려의 역사 169 (제24대 원종실록 4)

두바퀴인생 2011. 10. 25. 01:06

 

 

 

한국의 역사 400 : 고려의 역사 169 (제24대 원종실록 4)

  

 

제24대 원종실록

(1219~1274년, 재위 1259년 6월~1274년 6월, 15년)

 

3. 김준과 임연의 말기 무신정권

  

1258년 3월 최씨 무신정권의 4대 게승자 최의가 유경, 김인준, 임연 등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고려 무신정권은 전환기를 맞는다. 60여 년간 지속되던 최씨 일가의 권력 독점이 종결되고 형식적이나마 정권이 왕에게 돌아가면서 무신정권은 말기적 경향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80년 이상 지속되던 무신정권의 틀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실제로 등장한 유경, 김인준 등이 여전히 무신정권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무신정권은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으로 이어지던 제1기 형성기와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로 세습된 제 2기 심화기를 지나 제3기 해체기로 접어든 것이다.

 

제3기 무신정권을 주도한 사람은 유경과 김인준이었다. 물론 초기에는 대사성으로 있던 유경이 제1등 공신에 올랐고, 별장 출신인 김인준은 그 아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난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김인준의 힘이 강해졌고, 결국 1260년 6월에 공신 1위였던 유경이 제5위로 전락하고 김인준이 제1위가 되면서 정권은 김인준의 차지가 된다.

 

김인준은 최충헌의 노비 김윤성의 아들이다. 김윤성에게는 인준과 승준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인준은 기골이 장대하고 궁술에 능한 인물이었다. 최이의 측근 박송비와 송길유는 김인준의 이 같은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최이에게 그를 추천하였다. 그 후부터 김인준을 최이의 충실한 심복으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김인준이 최이의 애첩 안심과 간통하는 바람에 고성으로 유배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고성에서 수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다시 최이의 부름을 받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개경으로 돌아온 그는 최이의 서자 최항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리고 최이가 후계자를 결정할 때 최항을 적극 추천하였다. 이 공로로 최항이 권좌에 오른 후 장군 바로 아래 직위인 별장에 임명된다.

 

그러나 최항이 죽고 그의 아들 최의가 권력을 세습한 후에는 찬밥신세가 된다. 최의는 최양백, 유능 등을 신임하고 김인준은 멀리했던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인준은 1258년 6월 유경, 박송비 등과 모의 하여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왕에게 넘겨준다.

 

이렇게 해서 최씨 무신정권을 몰락시킨 김인준은 장군직에 재수되고 위사공신 칭호도 받는다. 하지만 그의 공훈은 제2위였다. 대사성으로 있던 유경이 일등공신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은 그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최의 제거를 실질적으로 주도했고, 무장 세력을 움직일 힘도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그는 1260년에 유경을 5등 공신으로 밀어내고 일등 공신에 오르게 된다. 이 때부터 이름도 김준으로 개명한다. 또한 그의 아우 김승준도 권신의 반열에 끼면서 이름을 김충으로 개명한다.

 

권력을 장악한 김준은 그 후 1264년에 교정별감에 임명되어 군권 및 감찰권을 손아귀에 넣게 되고, 1265년에는 문하시중에 오르면서 동시에 해양후에 책봉된다. 실로 최씨 무신정권의 권력을 능가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정사의 결정권은 왕에게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곧잘 원종과 팽팽한 의견 대립을 보이곤 하였다. 특히 개경 환도 문제에서는 정치생명을 건 한판의 승부를 예고하고 있었다.

 

원종은 태자시절에 몽고를 방문한 이후 줄곧 친몽정책을 펴며 몽고의 요구대로 적극적으로 개경 환도를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준은 개경 환도 이후에 몽고의 입김이 강해지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지가 좁아진다는 판단에 따라 되도록 개경 환도를 늦추고 있었다.

 

하지만 김준의 그같은 계획도 한계는 있었다. 이미 조정에 대한 몽고의 압력이 극도에 달해 있었고, 조정 대신들 역시 태반이 친몽 세력으로 교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의를 제거한 직후 자신이 직접 몽고측에 출륙환도를 약속한 마당이기에 강화도를 고수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게 환도 문제를 놓고 원종과 치열한 대립을 하고 있는 가운데 원에서  그와 그의 아우 김충에 대한 호출 명령이 떨어졌다. 쿠빌라이는 양자강을 버팀목으로 삼고 끝까지 항전하고 있던 남송을 몰락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중이었고, 고려에게도 송나라 공략을 위한 원군을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김준과 김충은 바로 그 고려 원군을 이끌고  가야 할 입장이었다.

 

하지만 김준은 몽고에 입조할 생각이 없었다. 몽고 내부에서는 고려에서 귀화한 세력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고려의 무신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이 때문에 자칫하면 김준은 몽고 입조 중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굳이 몽고 입조를 감행할 그가 아니었다.

 

그는 차라리 자신의 입조 명령서를 들고 온 몽고 사신을 죽이는 것이 났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원종에게 몽고 사신을 죽이고 다시 한 번 몽고와 항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원종은 그의 의견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 때 장군 차송우가 그에게 원종을 제거하고 새로운 왕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