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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99 : 고려의 역사 167 (제24대 원종실록 3) 본문
한국의 역사 399 : 고려의 역사 167 (제24대 원종실록 3)
제24대 원종실록
(1219~1274년, 재위 1259년 6월~1274년 6월, 15년)
2. 원종의 가족들
원종은 정순왕후 김씨와 경창궁주 유씨 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들에게서 3남 2녀를 얻었다. 정순왕후 김씨는 태자비로 있을 때 태손 심(충렬왕)을 낳았으며, 경창궁주는 시양후 이, 순안공 종, 경안궁주, 함녕궁주 등을 낳았다. 이들 가족 중 두 왕비와 시양후, 순안공 등의 삶을 간략히 언급한다.
정순왕후 김씨 (생몰년 미상)
정순왕후 김씨는 경주 사람으로 장익공 김약선의 딸이다. 1235년에 원종이 태자에 오르면서 태자비에 책봉되었으며, 충렬왕을 낳은 후 곧 사망하였다. 원종이 왕위에 오른 후 정순왕후로 추봉되었다가 아들 충렬왕이 왕위에 오르자 순경태후로 추존하였다.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경창궁주 유씨(생몰년 미상)
경창궁주 유씨는 종실 신안공 왕전의 딸이다. 원종 원년인 1260년에 왕후에 책봉되어 경창궁주라 불렀으며, 시양후 이, 순안공 종, 경안궁주, 함녕궁주 등 2남 2녀를 낳았다.
원종이 즉위하여 태손 심을 태자로 봉하려고 할 때, 그녀는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하지만 원종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태손 심을 태자로 책봉하고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가 곧 충렬왕이다.
이런 이유로 충렬왕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충렬왕이 왕위에 오른 후인 1277년에 순안공을 위해 기도장을 차렸다가 그것이 충렬왕을 저주하는 행위라는 무고를 받아 서인으로 전락하여 쫓겨난다. 사망 연대와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시양후 왕이(?~1267년)
시양후 왕이는 원종의 둘째 아들로 경창궁주 유씨 소생이다. 1263년에 이름을 맏고 시양후로 책봉되었으나 1267년에 어린 나이로 요절하였다.
순안공 왕종(생몰년 미상)
순안공 왕종은 원종의 셋째 아들로 경창궁주 유씨 소생이다. 1263년 동복형 왕이와 함께 이름을 받고 순안공에 책봉된다.
1269년 국왕 폐위사건이 발생하여 원종이 몽고로 갈 때 국정을 맡아보았으며, 원종이 돌아오기 전에 임연이 죽자 그의 아들 임유무를 교정별감에 임명하였다.
1273년에 원나라를 방문하여 세조 쿠빌라이를 만났으며, 이 때 쿠빌라이는 그를 태자 심보다 더욱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 때문에 충렬왕의 미움을 받게 되고, 급기야 충렬왕 3년 1277년에 역모죄로 유배되기에 이른다.
그는 평소에 잔병이 많았는데, 그의 모후 경창궁주는 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맹인 종동을 불러 액운을 쫓는 기도장을 차렸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기도를 한 후에 남은 음식을 땅에 묻었는데, 내수 양선, 대수장 등이 이를 보고 "경창궁주가 그의 아들 왕종과 더불어 소경 종동을 시켜 임금을 저주하며 왕종으로 하여금 공주에게 장가들고 왕이 되도록 기도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여기서 공주란 원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 홀도로게리미실을 일컫는다. 이 같은 무고를 전해들은 리미실은 노발대발하며 왕종 모자를 궁에서 내쫓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충렬왕은 이습, 인공수, 어지저, 인후, 장순룡, 차신 등에게 명령하여 승려 종동을 국문케 하고, 중찬 김방경과 밀직사 허공, 감찰시승 조인규 등에게는 경창궁주와 왕종을 국문케 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복죄하지 않자 충렬왕은 직접 왕종을 불러 국문하였으나 여전히 복죄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재상들이 궁문 앞에 엎드려 왕종 모자를 석방 할 것을 청원하였다. 하지만 충렬왕은 리미실 공주의 주장대로 왕종 모자의 재산을 몰수하려 하였다. 이에 찬성 유경이 원나라에 보고하여 승인을 받은 후에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옳다고 상소하였다. 그래서 충렬왕은 조인규를 원에 파견하여 왕종의 재산을 몰수할 것을 청하도록 하였는데, 이 때 리미실이 강력하게 재산 몰수를 주장하는 바람에 조인규가 원에 가기도 전에 왕종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왕종은 원종의 총애를 많이 받았고, 원 세조로부터도 많은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재산과 재물이 많았다. 리미실은 아마 이 재산을 노린 듯하다. 그래서 몰수된 재산 전체를 자신이 차지하였던 것이다.
왕종의 재산 몰수와 유배형이 결정된 후에 원나라에 갔던 조인규가 '순안공 모자의 사건은 고려왕의 처치에 맡긴다."는 원 세조의 답장을 받아왔다. 그때 이미 경창궁주는 서인으로 전락하여 궁궐에서 내쫓겼고, 왕종과 승려 종동은 섬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 왕종은 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1285년에 풀려나 개경으로 소환되었다.
그의 여생과 죽음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고려사>에서 1296년 그를 위해 부를 두고 속관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그의 작위와 위치가 회복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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