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397 : 고려의 역사 165 (제24대 원종실록 1)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397 : 고려의 역사 165 (제24대 원종실록 1)

두바퀴인생 2011. 10. 22. 18:00

 

 

 

한국의 역사 397 : 고려의 역사 165 (제24대 원종실록 1)

  

 

제24대 원종

 

원종(元宗, 1219년~1274년)은 고려 제24대 국왕(재위: 1259년~1274년)이다. 초명 전(倎), 식(植)으로 개명하였고, 는 정(禎), 는 일신(日新), 시호원종충경순효대왕(元宗忠敬順孝大王)이다. 고종과 안혜태후(安惠太后) 유씨(柳氏)의 맏아들이다. 비는 김약선(金若先)의 딸인 정순왕후(靜順王后)인데, 이후 충렬왕이 순경태후(順敬太后)로 추존했다. 1235년(고종 22년)에 태자가 되었으며, 1259년 강화를 청하기 위해 몽골에 갔다가 그해 고종이 죽자 이듬해 귀국하여 즉위했다. 원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충경왕(忠敬王)이다.

 

최충헌은 그의 고모부이자 처외증조부였다. 그의 비 정순왕후최충헌의 외증손녀이자 최우의 외손녀였다.

 

고려 역대 국왕 중 묘호에 조(祖)나 종(宗)자를 사용한 마지막 왕이며, 이후에는 원나라의 간섭으로 조나 종이 아닌 왕자를 붙여야 했고, 앞에 글자는 원나라의 충성을 맹세하는 증거인 "충 (忠)"자를 넣어야 했다. 그리고 이때 이후로 "짐"은 "고" 또는 "과인"으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선지"는 "왕지"로 명칭이 격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관직 용어들의 명칭들도 모두 격하되었다.

 

 

생애

1269년 임연에 의해 잠시 폐위되었으나, 원나라의 도움으로 다시 왕위에 올랐다. 같은 해 최탄(崔坦) 등이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몽골에 투항하자, 몽골은 서경에 동녕부를 두었다.

 

1270년 개경 환도를 주장하였으나 임연의 아들 임유무가 크케 반대하였다. 원종은 삼별초를 시켜 임유무를 제거하였다. 임유무가 죽음으로써 무신 정권 또한 끝이 났다. 개경으로 환도한 후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자 배중손을 중심으로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났다.

 

1273년 원종 14년에 이들의 반란은 제주 삼별초를 끝으로 여·몽 연합군에 의하여 평정되었다. 탐라에 다루가치 총관부를 둔 원나라로부터 일본 원정을 위한 전함 300척을 만들라는 요청을 받았다. 원나라에서 매빙사(妹聘使)가 오자 결혼도감을 설치하여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능은 소릉(韶陵)이다.

 

가계

  • 정순왕후 김씨(靜順王后) - 경주 김약선의 딸
    • 충렬왕
  • 경창궁주 유씨 (慶昌宮主) - 종실 신안공 전의 딸
    • 시양후 태(始陽侯 珆)
    • 순양공 종(順安公 悰)
    • 경안궁주 (慶安宮主) - 종실 제안공 숙과 혼인
    • 함녕궁주 (咸寧宮主) - 종실 광평공 혜와 혼인
  • 장인 : 김약선
  • 장모 : 우봉 최씨
  • 처외조부 : 최우, 최충헌의 아들

기타

원나라로부터 시호를 하사받은 첫 군주였다. 그러나 사망 직후 아들 충렬왕이 바로 묘호를 올렸으므로 묘호가 쓰이고 있다. 그에 이어 아버지 고종에게도 충헌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충렬왕은 원나라로부터 세 번째로 시호를 받은 군주였다.

 

 

 

 

 

 

 

 

 

제24대 원종실록

(1219~1274년, 재위 1259년 6월~1274년 6월, 15년)

 

1. 원종의 친원정책과 무신정권의 종식

 

원종 시대는 무신정권의 말기이자 원의 고려복속정책이 본격화되던 시기로서 고려 조정은 왕실 중심의 친몽파와 무신들이 이그는 반몽파로 갈라진다. 원종은 몽고의 힘을 빌려 왕권을 회복하려 하고 무신정권은 그 같은 왕실의 정책을 경계하며 몽고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힘을 형성하려 한다. 이것이 결국 쌍방간의 힘대결로 번지게 되어 결과적으로 몽고의 내정간섭의 빌미만 확대시키게 된다.

 

원종은 고종의 맏아들이자 안혜왕후 유씨 소생으로 1219년 3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전, 이름은 식, 자는 일신이다. 그는 고종이 오랫동안 재위하는 바람에 1241년 정월에 태자에 책봉되어 1259년 4월 몽고와의 화의 조약에 따라 고종을 대신하여 몽고에 입조했다.

 

그가 몽고에 가 있던 1259년 6월 고종이 죽자 실권자 김준(김인준)은 고종의 둘째 아들 안경공 창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조신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 결과 원종은 1259년 6월 41세의 나이로 고려 제24대 왕에 올랐으며, 그가 몽고에 가 있는 동안은 김준 등 무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태손 심이 왕위를 지켰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원종은 몽고에서 돌아와 비로소 왕위를 넘겨받았다. 이 해에 몽고는 헌종의 동생 세조 쿠빌라이가 황제로 등극하여 국호를 원으로 고쳤다.

 

원종이 몽고를 방문했을 때 몽고는 헌종의 죽음으로 쿠빌라이와 아리패(아리케) 형제가 서로 왕위를 놓고 대치하면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중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원종은 태자의 신분으로 아우 쿠빌라이를 찿아갔는데, 쿠빌라이는 신하들의 조언에 따라 그를 일국의 왕으로 대접하였다. 이는 대륙의 모든 나라가 몽고의 무력에 굴복하여 항복했는데, 오직 고려만이 7차례나 침공하여 전국토를 초토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에서 30여 년을 항전하며 몽고에 항복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일종의 특별대우였다.

 

몽고군은 고려 침공에서 장수 살례탑이 수원 전투에서 김윤후에게 화살을 맞고 살해되는 등 많은 장병들이 피해를 보았고, 고려군의 게릴라식 전투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며, 또한 한반도 지형상 그들 특유의 대우회, 기동, 포위 전법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 백성들과 군사들이 모두 섬이나 산성으로 피난하여 저항함으로써 기병 특유의 평지전이 아닌 산악전을 전개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30여 년 만에 고려 태자가 직접 연경까지 와서 항복을 해오자 쿠빌라이는 그토록 반가웠던 것이다.  

 

쿠빌라이는 원종이 자신을 찿아오자 당나라조차도 정복하지 못했던 고려의 태자가 자기를 따르게 되었다면서 매우 즐거워하였고, 후에 자신의 딸과 태자 심을 결혼시켜 원종과 사돈관계를 맺게 된다. 또한 쿠빌라이는 고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하 속대리로 하여금 원종을 호위하게 하였고, 이 같은 쿠빌라이의 호의적인 태도를 접한 원종은 그 후부터 다소 친몽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원종이 귀국하였을 때 개경에서는 궁궐 신축공사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김준을 위시한 조정 대신들은 내심으로 출륙환도를 거부하고 강화에 머무르면서 힘을 키워 몽고와 대적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