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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96 : 고려의 역사 164 (제23대 고종실록 9) 본문
한국의 역사 396 : 고려의 역사 164 (제23대 고종실록 9)
제23대 고종실록
(1192~1259년, 재위 1213년 8월~1259년 6월, 45년 10개월)
5. 전란 중에 핀 연꽃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은 고종 때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만든 목판각으로 현재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정식 명칭은 '해인사고려대장경도감(각)판'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판각되었다는 데 의미를 두어 <고려대장경>이라고도 부르고, 매수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를 풀어내는 8만 4천 법문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고려는 현종 2년 1011년 에 거란족이 침입하자 민심을 달래기 위해 대장경을 판각하였다. 흔히 '초조대장경'으로 불리는 이것은 북송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이뤄진 문화적 성과였다. 그 후 문종의 아들 대각국사 의천이 초조대장경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거란의 대장경을 참조하고 중국과 일본에서 많은 불경을 구해 <신편제종교장총록>을 만든다. 이 목록을 바탕으로 선종대에 판각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속장경'이다.
그 후 '초조대장경'과 '속장경'은 부인사에 보관하였는데, 1232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부인사가 불타는 바람에 이 양대 대장경은 소실되고 말았다. 이에 무신집정 최이는 1236년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다시 한 번 대장경을 판각하는 대역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12년 만에 판각을 완료하게 되는데 이것이 <팔만대장경>이다.
<팔만대장경>의 판각 목적은 초조대장경 판곽과 마찬가지로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는 데 있었다. 이는 단순히 신앙적인 의미가 아니라 대장경 판각 사업을 통해 전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으려는 일종의 정신 교화라고 할 수 있다.
판각작업은 최이의 후원과 개태사의 승통 수기의 교정을 바탕으로 강화도의 대장도감과 남해와 강화의 분사 대장도감에서 이뤄졌다.
대장경판은 성격상 정장과 부장으로 구분된다. 정장은 <대장목록>에 수록되어 있는 경으로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1,497종 6,558권의 경전을 말하며, 부장은 <대장목록>에 수록되지 못한 <종경록> 등의 4종 150권을 일컫는다.
이렇게 완성된 대장경판은 1251년 강화 왕성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처음으로 행차하였다. 이는 판각 후 처음으로 전질을 인출(찍어 낸 것)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행차였다.
그 후 대장경판은 강화도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줄롣 수장되었다가 1318년 선원사로 옮겨졌고 , 1398년 5월에 해인사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장경은 판각 이후 누차에 걸쳐 인쇄되어 배포되었는데, 판각 직후에 지속적인 인출사업에 따라 여러 부가 배포되었으며, 고려 말의 한학자 이색은 1381년에 부친의 유지에 따라 대장경을 인출하여 신륵사에 보관하기도 하였다. 또 조선으로 넘어와서는 1393년 태조의 명에 따라 인쇄하여 연복사 5층 석탑에 보관하였으며, 세조, 연산, 고종 대에도 몇 부씩 인출되어 전국 사찰에 보내졌다.
일본은 학술연구와 신앙적 차원에서 고려 말부터 누차에 걸쳐 대장경의 인출을 요구하였는데, 심지어는 우리 백성들을 납치하여 송환을 미끼로 약 83차례에 걸쳐 대장경을 청구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총 63부가 일본에 인출되었으며, 세종대에는 대장경판 자체를 일본에 하사하려고도 하였다. 하지만 경판을 하사하면 더 큰 요구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이는 실시되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 합볍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대장경 인경작업을 하였고, 1915년에 총독 데라우치는 1부를 교토의 센유사에 봉안하였다. 이것은 그 후 동경제국대학에 기증되었으나 1923년 대지진 때 불타 없어졌다.
대장경은 이처럼 일본이 전쟁도 불사하고 구해 가고자 하였던 뛰어난 문화재이자 학술 자료였던 것이다. 현재는 동국대학교가 1953년부터 23년간의 작업을 통해 완성한 축소판 영인본이 전세계의 유명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팔만대장경>은 단순히 팔만사천의 법문을 담고 있는 정신적 산물이며, 여몽 30년 전쟁이라는 뻘구덩이 속에서 피어오른 눈부신 연꽃이었다.
'고종실록'은 1277년 충렬왕 3년에 편찬되엇다. 이 때 감수국사에는 유경, 수국사에는 원수, 동수국사에는 김구가 임명되었다. 하지만 1309년 충선왕 원년에 '충헌왕 실록'으로 개칭되었고 일부 수정되었다.
'고종실록'을 편찬한 사관들은 고종의 치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고종시대에 안으로는 권세를 잡은 가신들이 잇따라 나라의 명령을 제 마음대로 하였고, 밖으로는 여진과 몽고가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침범하였으나 당시의 나라 형세는 매우 위태로웠다. 그러나 왕이 조심스럽게 법을 지키고 수치를 견디고 참았기 때문에 왕위를 보전하였을 뿐만아니라 마침내 정권이 왕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적이 들어오면 성을 튼튼히 하여 굳게 지키고 적이 물러가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맺었으며, 심지어는 태자를 시켜 예물을 가지고 직접 몽고에 들어가게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사직을 유지하고 나라를 길이 보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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