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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95 : 고려의 역사 163 (제23대 고종실록 8) 본문
한국의 역사 395 : 고려의 역사 163 (제23대 고종실록 8)
제23대 고종실록
(1192~1259년, 재위 1213년 8월~1259년 6월, 45년 10개월)
4. 무신정권의 분열과 종말, 삼별초의 반란
한편 농민은 무인정권에 점차 반항심을 갖게 되었고, 무신들이 분열하자 이에 대두한 문신들은 왕을 중심으로 몽골과 강화(講和)할 것을 주장했다. 문신들은 외세와 결탁하여 주전파(主戰派)인 무인정권을 타도하려고 했다. 1258년(고종 45년) 무신 유경(柳璥)과 무신 김준(金俊) 등이 최의(崔竩)를 살해하자 정권은 일단 왕에게 돌아가고 대몽 강화가 결정되었다. 다음해인 1259년 태자 전(倎)이 몽골에 입조(入朝)하여 항복의 뜻을 표하고 강도(江都)의 성곽을 파괴하였다
무신정권은 여전히 대몽 강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김준은 비록 대세에 끌려 적극적으로 강화를 거부하지는 못하였으나 강화 정책에 불만이 없지도 않았다. 이에 김준을 죽이고 대신 정권을 쥔 무신 임연(林衍)은 친몽 정책을 수행하는 원종을 폐하는 등 노골적으로 강화를 반대했다. 그러나 국내 결속의 해이(解弛)와 강화 정책의 진전으로 몽골의 압력은 더해져 원종이 복위되고 또 몽골병이 출동하였다.
항몽전이 장기화되자 무신정권은 제정도 악화되고, 통솔력의 유지도 점차 어려워졌다. 최우의 아들 최항은 집권 8년 만에 병사하였고(1257년), 그 뒤를 이은 최의는 다음해인 1258년(고종 45년)에 그 수하 김준에게 제거됨으로써 최씨 정권은 막을 내렸다.
강화의 성립
1257년(고종 44년) 몽골에서 강화 교섭의 요구 조건을 양보해 오고, 고려에서도 다음해에 대몽 항쟁을 주도해온 최씨 정권이 무너짐으로써 강화 교섭은 직전을 보게 되었으니, 1259년(고종 46년)에 파견된 고려 태자는 몽골의 몽케 칸(원 헌종)이 죽은 직후 아우 쿠빌라이(원 세조)를 만나 강화를 성립시켰다. 제위 계승을 놓고 형제간에 무력 충돌을 하게 된 쿠빌라이는 그토록 완강한 항전을 벌여온 고려가 자신에게 화의를 요청해온 것에 큰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였고, 고려에 대해 전과 다른 호의를 보였다. 그는 고려 측에서 강화 조건으로 제시한 고려 왕국의 존속 보장과 몽골군의 즉각적인 철수 등과 관련된 여섯 개 조항의 요구를 모두 수락하였다.
무신정권의 종말
강화는 성립되었으나, 1264년(원종 5년) 몽골에서 친조를 요구하자, 무신들을 중심으로 반몽 여론이 다시 일어났다. 더욱이 몽골이 일본 원정을 위해 군대와 물자를 지원해 줄 것을 고려에 요구함에 이르러서는 반몽 여론이 크게 고조되어, 원종(元宗)을 중심으로 한 강화론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 사이에 새로운 무인집정 김준이 살해되고 임연(林衍)이 집권했으며, 1269년(원종 10년)에는 임연이 독단으로 원종을 폐위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몽골에 가 있던 세자(뒤의 충렬왕)가 몽골에 요청하여 지원을 받음으로써 원종은 복위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몽골이 고려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게 만든 사건이 되었다.
복위 직후 몽골에 간 원종은 태자와 몽골 공주의 혼인을 제의하고, 무신정권의 제거를 위해 병력 지원을 요청하였다. 1270년(원종 11년) 음력 2월 궁지에 몰린 임연이 원종의 귀국 직전에 병사하였으나 그의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무인집정이 되어 반몽 노선을 고수하였다. 그는 강도로부터 개경으로의 환도를 명하는 원종과 대립하다가 살해되었다(1270년). 이로써 무신정권은 끝이 나고 왕정이 복고되었으며 개경으로 환도가 결정되었다.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의 난(三別抄의 抗爭, 1270년 ~ 1273년)은 고려-몽골 전쟁이 끝난 뒤 삼별초가 몽골(원나라) 및 고려 왕조에 대항하여 일으킨 항쟁이다. 삼별초의 대몽항쟁 또는 삼별초의 항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강화도에서 항몽 세력의 주축을 이루었던 삼별초는 개경 환도에 반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배중손(裵仲孫)이 이끈 삼별초는 원종의 아우 승화후 온(溫)을 왕으로 옹립하고, 강화도에서 서남해 진도(珍島)로 거점을 옮겨 남부를 지배하며 항몽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정부군과 몽골 연합군에게 진도가 함락되자(1271년), 김통정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이 제주도로 옮겨 저항하다가 1273년(원종 14년)에 모두 평정되었다.
배경
다른 반란군들과는 다르게 삼별초는 난을 일으키기 전에는 고려 정부의 지휘하에 있었다.
삼별초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 집단이었고, 군부 독재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몽골이 고려를 침입해 오자, 최씨 무신정권은 1232년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후 몽골의 침략에 맞섰다. 하지만 허약한 기반으로 말미암아 고려는 잦은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반란 중 일부는 평정되었지만, 북부 지역의 반란 무리는 몽골로 이탈하고, 그 영토는 몽골 제국에 병합되었다. 또한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고려는 몽골 제국에 항복하였다.
몽골의 지원으로 군부 정권으로부터 권력을 되찾게 된 원종은 1270년(원종 11년) 삼별초를 해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배중손이 이끄는 강화도의 삼별초는 원종의 고려 정부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였다.
경과
애초에 무신정권의 사병 집단이면서 대몽 항쟁에서 선봉에 섰던 삼별초는 그러한 강화(講和)와 무신정권의 화해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개경 환도가 발표되자 즉각 반기를 들었다.
삼별초 지유(脂諭) 배중손과 야별초(夜別抄) 지유 노영희(盧永禧) 등은 항쟁을 결의하였다. 배중손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강화도와 육지와의 교통을 끊었으며, 왕족 승화후 온(昇化候溫)을 왕으로 추대하여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반몽정권(反蒙政權)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탈자가 속출하여 경계가 어렵게 되자 1천여 함선을 징발하여, 고려 정부의 재화와 백성을 모두 싣고 강화도를 떠나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며 남행하여 진도에 이르렀다. 그곳에 항구적인 근거지를 두고 용장사를 행궁으로 삼았다. 그 뒤 용장사 주변에 산성을 쌓고 관아도 세웠으며 제법 도읍지의 면모를 갖추고 그들은 역동적으로 움직였으며, 고려의 유일한 정통 정부임을 주장했으며 일본과 연계하고자 외교도 펼쳤다. 당시 진도와 그 인근 지역에는 과거 최씨 무신정권이 소유한 농장이 그때까지도 대규모로 존재했다. 동시에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의 세곡이 서울로 운송되는 길목에 진도가 있었으며, 이는 세곡으로 운반되는 식량과 자금을 빼앗아 자체 군량으로 쓰는 동시에 개경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또한 남해 연안과 각 도서·나주·장흥에서 동으로는 마산·김해·부산 등까지, 북으로는 전주에까지 출병하여 관군을 격파하고 위세를 떨쳤으며, 그해 음력 11월에 이르러 삼별초군은 제주도까지 점령하였는 등 1271년 초까지 여러 차례 여몽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개경 정부를 위협하였다.
그러나 1271년(김진관 12년) 음력 5월 상장군 김방경과 흔도(炘都)가 지휘하는 여몽 연합군이 세 방향에서 진도를 향해 공격한다. 삼별초는 진도의 관문인 벽파진에서 중군을 막는 데 주력했지만, 삼별초가 중군을 방어하는 동안 좌군과 우군이 배후와 측면에서 기습 공격을 하였다. 진도 정권이 수립된 지 9개월 만에 진도는 함락당하였다. 혼란에 빠진 삼별초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배중손은 남도석성에서 전사하였다.
1271년 말, 김통정이 이끄는 잔존 세력은 탐라(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다. 탐라에서의 삼별초는 처음 1년 동안 자체적인 조직 정비 및 방어 시설의 구축에 주력하였고, 이후 약 반년간 전라도 연해안에 대한 군사 활동을 전개하여 그 세력이 충청도와 경기도 연해안까지 확대되었으며, 개경까지 위협하였다. 그러나 여몽연합군의 조직적 공략으로 1273년(원종 14년) 음력 4월 제주 삼별초 역시 무너지고 말았다.
결과
삼별초의 항전은 고려 대몽항전의 최후를 장식한 것으로서 이후 고려는 14세기 중반까지 원의 정치적 관리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당시 고려 민중 중에서 삼별초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고, 남부 지방의 조세가 개경으로 운송되지 않기도 하였다.
몽골은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1294년까지 탐라를 직접 통치하였다. 한편 고려의 반란 진압에 도움을 줌으로써 일본 원정에서 고려 정부의 지원을 더 많이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삼별초의 난은 외세 침략에 대해 완강한 저항을 한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기도 하지만, 반대로 무신 사병 집단의 저항 정도로만 보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 1978년 삼별초의 난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이 제주도에 세워졌다. 진도에 있는 용장산성과 같은 유적지는 관광지로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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