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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92 : 고려의 역사 160 (제23대 고종실록 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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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92 : 고려의 역사 160 (제23대 고종실록 5)

두바퀴인생 2011. 10. 17. 03:25

 

 

 

 

한국의 역사 392 : 고려의 역사 160 (제23대 고종실록 5)

  

  

제23대 고종실록

(1192~1259년, 재위 1213년 8월~1259년 6월, 45년 10개월)

 

2. 최씨 무신정권의 전개와 몰락(계속)

 

1225년 최이는 사제에 정방을 설치하고 문무백관의 인사행정을 그곳에서 처리하였다. 또한 2년 뒤에는 사제에 서방을 설치하여 문객 가운데 뛰어난 유학자들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하지만 최이의 주변에는 권력을 얻기 위해 아부를 일삼는 무리들도 많았다. 특히 최산보(후에 주연지로 개명) 등의 음양술수를 하는 인물들이 최이의 환심을 사곤하였다.

 

어느 날 최산보는 은밀히 최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임금의 상을 보면 자리를 보전하지 못할 상입니다. 그런데 대감에게는 왕이 될 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운명이니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에 최이는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고, 그래서 심복 김희제에게 그 내용을 말했다. 그러자 김희제는 무서운 표정으로 최산보를 노려보면서 그 말이 신빙성이 있느냐며 다그쳤다. 이에 최산보는 아무 대답도 못하다가 다시 은밀히 최이를 찿아가 "일전에 한 말이 누설되면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여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최이는 최산보가 김희제 등과 반역을 모의하고 있다는 투서를 맏고 그들을 유배시켜 버린다. 투서 내용은 유배 중인 희종을 복위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최산보와 희종 간에 왕래한 편지가 발견되자 최이는 최산보, 김희제, 노지정 등을 바다에 빠뜨려 죽여 버린다.

 

최이는 이처럼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자는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가차없이 죽이는 등 잔혹한 일면을 드러낸다.

 

그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던지 1226년에 그가 발에 부스럼이 생겨 앓게 되었을 때 말단에서 고위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리들이 앞을 다투어 최이의 부스럼을 고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제를 올리면서 소지를 태워대는 바람에 장안의 종잇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을 정도였다. 그리고 허다한 의원들이 최이의 부스럼을 고치기 위해 줄을 섰으나 아무도 고치지 못하였고, 의원의 딸인 합문지후 임정의 처가 독을 빨아들이는 고약을 붙여주어서 효험을 보았다. 이에 고종은 특별히 임정에게 공부낭중의 벼슬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말하자면 최이는 왕보다 위에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1228년 최이는 오대진국공신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이웃집 민가 수백 호를 헐고 격구장을 만드는 바람에 백성들의 원성이 드높았다.

 

 

 

                         

 

 

 

이 무렵 고려 전역에서는 매일 밤 도적들이 민가를 털곤 하였다. 그래서 최이는 야별초를 조직하여 야간 순찰을 돌게 하였는데, 이 야별초는 후에 삼별초로 발전하여 무신정권의 전위부대 역활을 하게 된다. 또한 마지막까지 몽고에 항복하지 않고 배중손 등의 지휘 아래 삼별초의 난을 일으키게 된다.

 

1231년에는 최이의 처 정씨가 죽었는데, 고종은 장례 일체를 순덕왕후의 전례에 따르도록 함으로써 최이가 왕과 다름없는 존재임을 확인시켰다. 이 때 개경, 서경, 동경 3궁과 모든 종실, 재상과 그 이하의 모든 관리들이 제전(제사상)을 차리는 바람에 물가가 폭등하여 나라 경제가 흔들릴 정도였다. 또한 정씨의 무덤은 감실까지 금, 은, 비단으로 장식하는 등 왕비의 무덤보다 더 사치스러웠다고 한다.

 

그해 몽고가 대군을 이끌고 제1차 침입을 감행했다가 화의 조약을 하고 물러가자 최이는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백성들을 섬과 산성으로 이주시켜 몽고군과 전면전을 감행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강화도로 이어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최이가 강화도로 옮겨가야 한다고 강요하는 데도 불구하고 궁궐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최이는 녹전차 1백여 대를 동원하여 자기 집 재산을 모두 강화도로 옮기고 기일을 정하여 궁궐의 모든 기관을 강화도로 가도록 하였다. 그는 강화도로 떠나지 않는 관리는 모두 군법에 따라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동시에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강화도에 궁궐을 축성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도 아랑곳 않고 무릎까지 쑥쑥 빠져드는 진창을 헤치며 백관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강화도로 떠났다. 최이의 강압에 못 이긴 고종도 어가를 타고 강화도에 새 궁궐로 들어갔다.

 

고려의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갔다는 소리를 듣고 몽고는 다시금 대병력을 보내 고려를 침략하였다. 이후부터 약 30년간 몽고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강화도로 천도한 뒤에 고려 강토가 몽고군에게 도륙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최이는 강화도와 육지 간에 운하를 굴착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울릉도가 안전하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백성들을 그곳으로 이주시키려다가 풍랑으로 바다에 빠져죽은 사람이 많아지자 울릉도 이민을 중지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각 도에 사람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산성과 섬으로 이주시키기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 자신의 생활은 여전히 호사스러웠다. 걸핏하면 주연을 열어 먹고 마시는 일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이는 그의 강화도행이 나라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일임을 확인시켜주는 일이기도 하다.

 

1249년 몽고군의 제4차 침입이 있고 난 다음 그는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