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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91 : 고려의 역사 159 (제23대 고종실록 4) 본문
한국의 역사 391 : 고려의 역사 159 (제23대 고종실록 4)
제23대 고종실록
(1192~1259년, 재위 1213년 8월~1259년 6월, 45년 10개월)
2. 최씨 무신정권의 전개와 몰락
고종대에 들어오면서 최충헌의 힘은 더욱 강화되어 권력세습의 기반이 마련된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무장한 호위병이 반경 10리를 가득 채웠고, 수행하는 조정의 관원들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심지어 거란군이 침략해 왔을 때 관군의 수 보다 최충헌의 호위 군사들이 더 많았을 정도였다. 최충헌의 위세는 절대군주에 뒤지지 않았을 정도로 막강하였다. 그런 까닭에 고종은 그를 국부로 대우한다는 의미로 1219년 그에게 왕씨 성을 내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왕씨 성을 받던 그해에 그에게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다. 1219년 9월 갑자기 병으로 드러누운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나이 70세에 고종으로부터 받았던 궤장을 반납하고 사성한 왕씨 성도 도로 반환하였다. 또한 감옥에 갇힌 모든 죄수들과 유배된 자들을 석방하였다. 그리고 하루는 악공 수십 명을 불러 종일토록 주악을 연주토록 하며 즐기다가 그날 밤 삼경 무렵 풍악이 한찬 무르익던 가운데 7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고려 조정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최씨 무신정권의 기틀을 다지며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하며 몸을 도사리던 그도 결국 노환을 이기지는 못했다.
최충헌이 죽자 그의 맏아들 최이가 교정별감에 올라 권력을 이양받았다. 최충헌은 원래 상장군 송청의 딸에게 장가들어 최이와 최향을 낳았고, 손홍윤을 죽이고 빼앗아온 여자인 임씨에게서 최성을 낳았으며, 강종의 서녀 왕씨에게서 최구를 낳았다.
이들 4명의 아들 중에서 이와 향이 권좌를 넘보고 있었다. 따라서 최충헌이 죽고 난 다음 이 두 형제간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최충헌은 병상에 눕자 형제지간에 다툼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곁에서 자신을 돌보고 있던 맏아들 최이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때부터 최이는 병을 핑계삼아 아버지를 찿지 않았고, 다만 측근 김약전을 보내 최충헌의 병시중을 들게 하였다.
그 무렵 최향 쪽에서는 최이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최충헌의 측근들 중에 최이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대장군 최문준, 상장군 지윤심, 장군 송유절, 낭장 김덕명 등은 촤충헌이 죽고 나면 최이로부터 보복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최향을 후계자로 옹립하려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최이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최충헌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거짓으로 통보하여 최이를 유인하였다. 그러나 최이는 그 말을 의심하고 가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몇 차례 더 최이에게 최충헌이 찿는다고 말했고, 그 때문에 최이는 그들을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음모가 탄로난 것으로 판단한 김덕명은 최이에게 모의 내용을 고발하였다. 이에 최이는 김덕명을 자기 집에 숨겨 놓았는데, 다시금 최준문과 지윤심이 찿아와 최충헌이 급히 찿고 있다고 전언하였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이는 그 두 사람을 체포하고, 유송절도 잡아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들 세 명을 유배하고, 최향과 최향의 장인, 처남, 노비 등도 유배시켰다.
그 며칠 후 최충헌이 죽자 최이는 교정별감에 올라 고려 최고의 권좌를 이어 받았다.
최이의 초명은 우이며, 아버지 최충헌을 도와 최씨 가문의 권력 유지에 많은 역활을 했다. 최충헌이 죽을 당시에는 벼슬이 추밀원부사에 올라 있었으며, 최충헌이 병상에 누운 후부터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1219년 교정별감에 오른 후에는 최충헌이 불법으로 빼앗은 전답과 노비들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최충헌이 저장하고 있던 많은 보물들을 고종에게 바쳤다. 또한 한림에 많은 선비들을 등용하여 무신정권 성립 이후 가장 많은 문신들을 배출하는 등 인망을 얻기에 많은 노력하였다.
이 무렵 최향은 유배지 홍주에서 큰 저택을 짓기 위해 대대적인 건축공사를 벌였다. 최이와 홍주 수령이 이를 금지시켰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또 주변 무뢰배들을 모아 반란을 홱책하고 부사 윤문거와 법조 이종, 판관 전량재 등을 살해하였다.
최향의 행패가 이렇듯 극심하였지만 주변 관리들은 그의 위세에 눌려 어떤 조치도 강구하지 못했다. 이에 최향은 더욱 기세가 등등해져 유배된 유송절과 자신의 측근인 김수영, 박문자 등을 홍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근방 수령들에게 격문을 보내 군사를 내어 자신을 응원할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수하들을 시켜 관가 창고를 열고 좁쌀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향의 수하들과 관원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고, 중앙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최이는 병마사 채송년과 지병마사 왕유, 부사 김의렬로 하여금 최향 무리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관군이 동원되어 토벌작전을 벌이자 최향은 수하들을 이끌고 근처 북산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고을 사람들이 병정들을 데리고 그들을 포위했다. 그러자 최향의 수하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최향은 바위에서 떨어져 동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때 병정들이 동굴 속을 수색하자 칼로 제 목을 찌르고 죽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나 병정들이 이를 눈치채고 달려들어 그를 포박하여 옥에 가둬 놓았더니 얼마 뒤에 죽어 버렸다.
그가 죽은 후 안찰사 전의는 김수영, 박문자 등을 체포하고 각처에 공문을 보내 유송절과 그 무리들을 체포하여 모두 사형시켰다.
최이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으며, 전의를 시켜 잔당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전의는 최이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산, 결성, 여양, 대흥 등 일곱 고을의 현감들을 처음에는 최향과 공모하였다가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자신들의 죄를 면하기 위해 격문을 돌린 자로 체포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이에 일곱 고을 현감들이 모두 사형에 처하여 졌고 홍주에서 조금이라도 최향과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은 모조리 붙잡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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