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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94 : 고려의 역사 162 (제23대 고종실록 7) 본문
한국의 역사 394 : 고려의 역사 162 (제23대 고종실록 7)
제23대 고종실록
(1192~1259년, 재위 1213년 8월~1259년 6월, 45년 10개월)
3. 고려의 대몽항쟁
고려의 대몽항쟁은 고려가 몽골에 맞서 싸운 전쟁을 일컫는다. 좁게는 고려-몽골 전쟁을, 넓게는 삼별초의 항쟁을 비롯한 공민왕 때의 원나라와의 전쟁까지도 포함되기도 한다. 그러나 흔히 대몽항쟁이라 하면 고려-몽골 전쟁과 삼별초의 항쟁만을 가리킨다.
고려와 몽골의 접촉
고려가 몽골과 최초의 접촉을 가지게 된 것은 몽골에게 쫓겨 오는 거란인(금나라 군)을 협공하던 때부터이다. 거란인은 금이 망할 무렵 독립하였다가 다시 몽골군에게 쫓겨 고려의 강동성(江東城)에 내려와 서북 지방에서 약탈을 감행했다. 고려는 몽골과 합세하여, 조충(趙沖)·김취려(金就礪) 등을 보내어 이를 함락시켰다. 몽골은 이후 고려에 대해 매년 공물(貢物)을 요구함으로써 양국 사이는 소원해져 갔다.
고려-몽골 전쟁
그러다가 몽골의 사신 저고여(착고여)의 살해 사건을 계기로 몽골군은 1231년(고종 18년)에 제1차 침입을 행하게 되었다. 몽골은 공물에 대한 기대만이 아니라 만주와 화북을 점령하고, 나아가서 남송과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기지를 고려에서 구하려고 했다. 샬리타가 거느린 몽골군은 귀주에서 박서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으나 우회하여 계속 남진 수도 개경에 임박하였다. 이에 고려가 강화를 요청하자 몽골은 몽골인 감독관을 서북면에 두고 군사를 철수하였다.
1232년(고종 19년) 최우는 항전을 주장하는 자들을 참수하고 독단으로 강화 천도를 행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몽골은 제2차로 침입하였다. 고려의 반적 홍복원의 인도로 개경을 거쳐 한강 이남까지 내려온 몽골군은 샬리타가 김윤후에게 사살되자 곧 후퇴하였다. 몽골군은 그 후에도 고려왕의 친조와 항복을 요구하며 약 30년간 전후 7차에 걸쳐 침입하여 왔으나 고려는 강화에서 항전을 계속했다.
최우 무신정권의 몽골에 대한 대항은 자신들의 수하를 시켜 서북방면의 다루가치를 제거하려는 것이 전부였고 이마저도 대부분 실패했고 몽골의 잔인한 보복을 두려워한 농민들의 반대로 중단되었다. 항전은 농민들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제1차 침입 때는 관악산의 초적들이 항복하여 몽골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지광수 등에게 지휘된 충주 노예군의 항쟁은 특히 유명하였다. 또한 농민들도 몽골군에 완강히 저항하자 이에 몽골군은 곡식을 불태우고 잔인한 살육을 감행하였다. 이리하여 농촌은 황폐해 갔고 인구는 감소됐으며, 뿐만 아니라 황룡사의 구층탑과 부인사 소장의 대장경이 불타는 등 문화재가 소실된 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최씨 무인정권은 불력에 의존하여 난국을 타개하려고 대장경의 재조를 감행하여 이른바 팔만대장경을 조판했다.
고려-몽골 전쟁은 고려와 몽골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다만 한국의 입장에서 원의 침략, 몽골의 입구(入寇), 대몽항쟁, 몽난(蒙亂) 등으로 부르며, 특히 대몽항쟁으로 부를 때에는 고려-몽골 전쟁을 비롯하여 삼별초의 항쟁까지를 포함하기도 한다.
고려 고종 때 최씨의 무단정치(武斷政治) 하에 있는 동안 중앙아시아 대륙에서는 테무친이라는 영웅이 나와 몽골족을 통일하고, 1206년(희종 2년)에는 칭기즈칸이라 칭하고 강대한 제국(帝國)으로 군림하였다.
그는 세계를 정복할 목적으로 동·서양의 각국을 공격하여,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다음 남하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니 금은 대내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요나라 유민의 일부분은 대요국(大遼國)을 세우고 여진족과 화합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렸으나 다시 몽골에 쫓기어 1216년(고종 4년)에는 마침내 고려의 국경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에 몽골은 동진국(東眞國)과 동맹을 맺고, 이를 소탕하기 위하여 고려에 들어오자 고려도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을 무찔렀다(→강동성 전투). 몽골은 이를 계기로 고려에 큰 은혜라도 베푼 듯이 고려와 협약을 맺고 해마다 과중한 세공을 요구하는 한편 몽골 사신은 고려에 들어와 오만방자한 행동을 자행하여, 고려는 차츰 그들을 적대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 1225년(고종 12년) 음력 1월 몽골 사신 저고여(箸告與)가 국경지대에서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이라 하고, 고려는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 주장하여, 양국 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지고 마침내는 국교단절에까지 이르러 몽골은 고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였다.
제1차 전쟁
칭기즈칸의 대를 이은 오고타이(태종)는 1231년(고종 19) 장군 살리타이(한자: 撒禮塔)에게 별군(別軍)을 주어 침입에 착수하여, 음력 8월에 압록강을 넘어 의주·철주 등을 함락하고 계속 남하하였다. 고려군은 이를 맞아 구주(귀주)·자주(慈州)·서경 등에서 크게 무찔렀으나 대체로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드디어 몽골 군사가 개경을 포위하자 고종은 할 수 없이 살리타이가 보낸 권항사(勸降使)를 만나고 왕족 회안공 정(淮安公 侹)을 적진에 보내어 강화를 맺게 하였다.
그 결과 싸움은 일단 중지되고 몽골은 이듬해인 1232년 음력 1월 군대를 철수하였는데 몽골 사료에는 이때 전국에 다루가치(한자: 達魯花赤) 72명을 두었다고 전하나 《고려사》에는 전혀 이런 기록이 없다.
제2차 전쟁
고려는 비록 몽골과 강화를 하였으나 이는 고려의 본의가 아니었고 또 앞으로 몽골의 태도 여하를 몰라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이)는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어 강화 천도를 결정하고, 1232년(고종 19년) 음력 6월에 수도를 강도(江都 : 강화도)로 옮기고 장기 항전의 각오를 굳게 하였다. 이는 몽골에 대하여 적의를 보인 것이므로 살리타이는 7개월 만에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서경의 고려군 포로 홍복원을 앞세워 개경을 함락하고 남경(南京 : 한양)을 공격한 다음 한강을 넘어 남쪽을 공략하였다.
그러나 해전에 약한 몽골은 강화도를 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다시 남하하여 처인성(處仁城 : 용인)을 공격하다가 살리타이는 매복하고 있던 고려의 김윤후에게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대장을 잃은 몽골은 사기를 잃고 철수하였는데, 이때 부인사(符仁寺) 소장의 《고려대장경》 초조판(初彫板)이 불타 없어졌다. 한편 몽골의 철수에 기세를 올린 최우는 북계병마사 민희(閔曦)에게 가병(家兵) 3천을 주어 앞서 반역한 홍복원을 토벌하고, 가족을 사로잡고 북부 여러 주현(州縣)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제3차 전쟁
1235년(고종 22년) 몽골은 남송을 공격하는 길에 따로 당을태(唐兀台)에게 대군을 주어 다시 고려를 치게 하였다. 몽골은 개주(介州 : 개천)·온수(溫水 : 온양)·죽주(竹州 : 죽산)·대흥(大興 : 예산) 등지에서 큰 타격을 받으면서도 4년간에 걸쳐 전국 각지를 휩쓸었다. 유명한 《황룡사 9층탑》도 이때에 파괴되었다.
이같이 몽골은 육지에 화를 입혔으나 강도만은 침공치 못하니 조정은 강도에 웅거하여 방위에 힘쓰는 한편 부처의 힘을 빌려 난을 피하고자 《대장경》의 재조(再彫)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강도에서는 백성에게 미치는 피해를 우려하여 1238년(고종 25년) 겨울 김보정(金寶鼎) 등을 적진에 보내어 강화를 제의하였고, 몽골은 왕의 입조를 조건으로 이듬해 봄에 철수를 시작하였다. 철수 후 고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다가 몽골의 독촉으로 입조의 불가능함을 말하고 왕족 신안공 전(新安公 佺)을 왕제(王弟 : 왕의 아우)라 칭하여 대신 몽골에 보내고 1241년(고종 28년)에는 신안공의 종형(從兄 : 사촌형) 영녕공 준(永寧公 綧)을 왕자로 가장시켜 몽골에 인질로 보냈다.
제4차 전쟁
오고타이 칸(원 태종)의 대를 이어 구유크 칸(한자: 貴由 : 정종)이 즉위하자 몽골은 고려의 입조와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조건으로 아모간(阿母侃)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치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 몽골은 정종이 죽고 후계자 문제로 분규가 생겨 한때 철군하였으나, 몽케 칸(헌종)이 즉위하게 되자 1251년(고종 38년) 예케(한자: 也窟 또는 也古)를 시켜 고려에 대거 침입하였다.
이에 고려는 전쟁을 각오하고 강도를 굳게 지키니 몽골은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동주(東州 : 철원)·춘주(春州 : 춘천)·양근(楊根 : 양주)·양주(襄州 : 양양) 등을 공격한 다음 충주성에 이르렀다. 이때 돌연 예케는 병을 이유로 귀국하였는데, 도중 개경에서 고려의 철수 요구를 받았다.
그는 어느 정도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여 고종은 강도를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예케의 사신과 회견하였으며, 한편 충주성 전투도 70여 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몽골이 불리하게 되어 드디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부 지방에 있던 몽골의 군대는 철수를 주저하고 있다가 고려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淐)을 몽골에 보내어 항복을 표시함으로써 완전히 철병하였다.
제5차 전쟁
그러나 몽케 칸(원 헌종)은 왕자의 입조만으로 만족치 않고, 국왕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하면서 1254년(고종 41년) 음력 7월 자랄타이(한자: 車羅大 또는 札剋兒帶)를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침입케 하였다.
그는 전국 각처를 휩쓸고 계속 남하하여 충주성과 상주산성(尙州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이때 자랄타이는 돌연 몽케 칸의 명으로 군을 돌이켰는데, 이때 고려가 받은 피해는 어느 때보다도 심하여 《고려사》에는 포로가 20만 6천 8백여 명, 살상자는 부지기수라고 하였다.
제6차 전쟁
이듬해 몽골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대장으로 인질로 갔던 영녕공과 홍복원을 대동하여 대거 침입하여, 갑곶 대안(甲串對岸)에 집결하여 강도에 돌입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마침 전에 몽골에 갔던 김수강(金守剛)이 몽케 칸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여 몽골은 고려에서 철수하였다.
제7차 전쟁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대책에 불과하였으며, 더욱이 1257년(고종 44년)에는 해마다 몽골에 보내던 세공을 정지하게 되자 몽골은 또 자랄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케 하였다. 그간 정부는 재차 김수강을 철병 교섭의 사신으로 몽골에 파견해서, 몽케 칸을 알현케 하여 그 허락을 얻으니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몽골은 일단 군대를 북으로 후퇴시키고 고려의 태도와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결과
이처럼 7차에 걸친 몽골의 침입은 고려의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막대한 인명·재산·문화재의 피해를 입힌 채 몽골은 고려왕의 입조·출륙을 요구했다. 고려는 몽골의 철수를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등 교섭이 잘 진행되지 않다가, 1258년(고종 45년)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가 김준(金俊)에게 피살되자 정세는 돌변하여 몽골에 대한 강화의 기운이 생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1259년(고종 46년) 음력 3월 박희실(朴希實)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자랄타이와 회견,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태자 전(倎) 등 40여 명을 몽골에 보내고 강도의 성을 헐게 하여 고려의 강화 태도에 확증을 보이니 28년간의 싸움 끝에 드디어 고려는 굴복하였다. 그해 음력 6월 고종이 죽고 태자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었는데, 그는 몽골에 태자를 다시 인질로 보내어 성의를 표시하였으나 강화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그 후 강도에서는 무신간의 알력이 생겨 한때 원종이 폐위되었으나 다시 복위하였고, 몽골의 초청을 받고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1270년(원종 11)에 귀국하여 개경에 환도하니 이로부터 고려는 몽골의 간접간섭하에 들어갔다. 이는 강화에 천도한 지 39년 만의 일이다.
고려는 강화도의 작은 섬을 안전지대로 삼아 근 40년간 질풍 같은 몽골의 대군을 맞아 항전하는 동안 상하 모든 사람은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극히 왕성하였는데, 삼별초의 난을 일으킨 무사들의 항거정신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으며, 특히 부처의 힘을 빌고자 15년간에 걸쳐 《팔만대장경》을 완성한 사실은 한국 역사상 주목할 만한 문화의 형성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신흥 제국 몽골의 팽창 정세를 정확히 관찰하지 못한 무신정권의 허술한 오판으로 자초한 전란이기도 해서 국내 각지는 적의 침략을 당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민족의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문화재는 소실되고 정치적으로는 몽골의 간섭을 받아 충렬왕 이후 공민왕까지는 부마국(鮒馬國 : 사위나라)으로 변질되어 자주성을 잃은 왕조가 되었으며, 모든 정치기구와 그 명칭은 제국이 아닌 왕국으로써의 관제로 개편당했고, 동·서북면에는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동녕부(東寧府) 등이 설치되어 국토의 손실을 가져왔다.
한편 여·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과 왕실의 내부·심왕당(瀋王黨)의 대두 등은 고려 쇠퇴의 중요한 원인을 만들었다. 문화적으로도 몽골 지배하의 80여 년간은 문물교환·인물교환이 잦아 이른바 몽골풍의 유행을 보게 하여 고려인의 생활양식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동서 문화의 교류에 힘쓴 몽골의 영향을 받아 천문·의학·수학·역법(曆法)·예술·목화·화약·정주학(程朱學) 등이 전래되어 고려 문화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원나라의 상류층 사회에서도 고려양(高麗樣)이 유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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