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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05 : 고려의 역사 174 (제25대 충렬왕실록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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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05 : 고려의 역사 174 (제25대 충렬왕실록 1)

두바퀴인생 2011. 10. 30. 03:21

 

 

 

한국의 역사 405 : 고려의 역사 174 (제25대 충렬왕실록 1)   

 

제25대 충렬왕  

 

충렬왕(忠烈王, 1236년~1308년)은 고려 제25대 국왕(재위: 1274년~1298년, 복위:1299년~1308년)이다. 는 거(昛), 초명은 심(諶)·춘(賰), 시호충렬경효대왕(忠烈景孝大王). 원종과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金氏)의 맏아들이다.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으며, 이후 고려 군주들은 원나라의 황녀나 종실의 딸을 정비 또는 후궁으로 맞이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다. 그 결과 고려원나라의 정치적 속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고려왕조에서 최초로 양위하였다가 복위한 군주이기도 하다. 흔히 몽골에서 내린 시호를 처음 사용한 고려군주로 알려졌지만 몽골 제국이 하사한 시호를 최초로 받은 왕은 그의 부왕인 원종이었다. 34대 공양왕의 외고조부이기도 하다.

 

 

생애

그는 원종의 맏아들이며 1260년(원종 1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1272년 원나라에 갔으며, 1274년(원종 15년) 음력 5월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하고 변발·호복 등 몽골 풍속에 따랐다. 그 때문에 조정 신하들마저 이 풍습을 따랐고, 후엔 백성들까지 몽골의 풍습을 따른다. 이때 승려 일연(一然)은 충렬 11년인 1285년삼국유사》를 만들어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혼인한 그해 음력 6월 원종이 죽자 고려에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으나, 자주성을 잃은 종속국으로 전락했다. 왕위에 즉위한 그해 원나라 세조의 강요로 일본 정벌에 동로군(東路軍)을 파견하였다.

 

1277년(충렬왕 3년) 원나라의 병마를 사육하기 위해 제주도에 목마장(牧馬場)을 설치했다. 1280년(충렬왕 6년) 정동행중서성이 설치되자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도 했다. 1290년(충렬왕 16년) 합단(哈丹)이 내침하여 강화로 천도했으며, 김방경(金方慶)의 활약으로 수차 왜구·여진의 침입을 격퇴할 수 있었다.

 

평가

재위 중 자주 원나라에 내왕하면서 풍습과 제반 문물제도를 받아들였고, 경사교수도감을 설치하여 경학과 사학의 진흥에 힘썼다. 또 원나라의 속방(屬邦)에 맞게 관제를 격하하였고, 몽골의 내정 간섭을 많이 받았다. 몽골 풍속이 많이 들어왔으며, 또한 왕비와 그 일족이 막대한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고려 농민은 유민(流民)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가계

  •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 충선왕
  • 정화궁주(貞和宮主) 왕씨
    • 강양공(江陽公) - 공양왕의 모후인 국대비 왕씨(國大妃 王氏)의 조부.
    • 정녕원비(靜寧院妃)
    • 명순원비(明順院妃)
  • 숙창원비 김씨(淑昌院妃)

 

기타

이후의 고려 국왕들은 모두 그의 후손으로 이어진다. 공양왕신종의 6대손이나 모계로는 그의 후손이다.

그의 직계 왕통은 4대손인 충목왕충정왕, 4대손인 우왕과 5대손 창왕의 대에서 단절되지만, 차남 강양공 자의 외증손이 34대 공양왕이 된다.

 

 

 

 

 

 

 

 

제25대 충렬왕실록

(1234~1308년, 재위 : 1274 6월~1298년 1월, 1298년 8월 복위~1308년 7월, 1298년부터 동년 8월 초까지는 충선왕 재위기간이므로 총 재위기간은 33년 6개월)  

 

 

1. 변발한 충렬왕과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

 

원 세조의 부마가 된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급속도로 원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철저한 친원정책 덕분에 고려 왕실은 오히려 무신정권에게 잃었던 힘을 회복하게 된다. 이에 따라 조신들의 힘은 미미해져 정치가 실종되고, 사회 전반에 변발과 호복차림의 몽고 풍속이 만연하여 고려는 점차 자생력을 잃어간다.

 

충렬왕은 원종의 맏아들이자 정순왕후 김씨 소생으로 1236년 2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심 또는 춘,  이름은 거이다. 그는 1259년 6월 고종이 죽자 몽고에 입조해 있던 원종을 대리해 임시로 국사를 대리하였으며, 1267년에 태자로 책봉되엇다. 그 후 1272년에 원나라에 입조하여 연경에 머물렀으며, 1274년에 원 세조의 딸 홀도로게리미실 공주에게 장가들어 원의 부마가 되었다. 그리고 1274년 6월 원종이 죽자 귀국하여 고려 제25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충렬왕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 귀국할 때 이미 몽고 풍속에 따라 머리를 변발하였고 복장도 호복(되옷)을 하고 있었다. 또한 원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 홀도로게리미실을 맞이할 때는 모든 신하들에게도 변발을 강권하였으며, 변발을 하지 않은 자는 회초리로 쳐서 환영식장에서 쫓아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 조신들은 모두 변발을 하게 되었고, 이를 지켜본 백성들은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철저하게 친원정책을 표방한 충렬왕은 원의 요구를 받아들여 즉위 4개월 만인 1274년 10월에 일본원정을 단행한다. 그동안 고려를 통하여 일본의 조공을 요구하던 원나라는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자 무력으로 일본을 정벌하여 세력을 과시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고려군을 동원하였던 것이다.

 

일본 정벌을 위해 충렬왕은 김방경, 임개, 손세정에게 군사 8천를 내주었고, 원나라는 도원수 홀돈, 우부원수 홍다구, 좌부원수 유복형 등이 이끄는 몽고군과 한족 연합군 2만 5천을 동원했다. 여기에 뱃길 안내자 및 수군 6천 7백 명이 가세하여 총 4만 군사가 9백여 척의 배에 나눠 타고 일본정벌길에 올라 대마도를 장악하였다. 하지만 태풍으로 인해 일본 본토로 나가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그러나 원나라는 여기서 물러나지 않고 다시금 일본정벌을 준비하기 위해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1281년에는 15만의 여원연합군을 형성하여 일본으로 떠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태풍으로 인해 본토 진입에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 세조는 지속적으로 고려 조정에 일본 정벌을 강요하여 민간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그런 가운데 1290년 원을 괴롭히던 내안의 합단군이 고려에 내침하여 충렬왕이 조신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천도하는 지경에 이른다. 합단은 한 때 원주와 충주를 함락하고 개경을 위협하는 등 고려군을 궁지로 내몰았으나 원나라의 도움으로 1년 반 만에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싸움에서 원충갑, 한유희 등이 활약이 컸으나 고려 왕실은 줄곧 원나라의 지원에만 의존하는 나약한 모습으로 일관하여 원나라의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북방 야인과 왜구들의 침입이 잦아져 고려 사회는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김방경 등의 활약으로 이 같은 난국이 극복되고 가까스로 국운을 보전할 수 있었다.

 

1290년에는 반역자 최탄이 몽고에 바침으로써 생긴 동녕로를 원 세조에게 직접 환부해 줄 것을 요청하여 서북면 일대의 국토를 회복하기도 하였다. 그 후 1293년에 원 세조가 사망함으로써 원의 일본 정벌 압력도 사라지게 되어 고려 사회는 조금씩 안정을 되찿아갔으며, 1294년에는 삼별초가 최후까지 저항하다 몽고군에 점령되었던 탐라를 돌려받아 제주라 고치고 목사를 파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