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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15 : 고려의 역사 184 (제27대 충숙왕실록 1) 본문
한국의 역사 415 : 고려의 역사 184 (제27대 충숙왕실록 1)
제27대 충숙왕
충숙왕(忠肅王, 1294년 ~ 1339년)은 고려 제27대 [[|군주|국왕]](재위: 1313년~1330년, 복위 1332년~1339년)이다. 초명은 도(燾), 휘는 만(燾), 자는 의효(宜孝), 시호는 충숙의효대왕(忠肅懿孝大王)이다. 충선왕과 몽골인 의비 야속진의 둘째아들이다.
조카 심양왕의 무고로 원나라에 유수생활을 하고 옥쇄를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압수당하기도 했다.
생애
충선왕의 서자로 어머니는 몽골인 출신 후궁인 의비 야속진이었다. 1313년(충선왕 5) 강릉대군(江陵大君)으로 있다가 양위 받아 즉위하였으며, 아버지 충선왕(忠宣王)은 상왕(上王)으로 있었다. 조카 연안군(延安君) 고(暠)를 심양왕(瀋陽王)의 세자로 삼아 양위하고 원나라 양왕(梁王)의 딸을 맞게 하였다. 이리하여 원나라 부마의 대우를 받게 된 심양왕 고는 왕위 찬탈의 뜻을 품고 충숙왕이 주색과 사냥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구실을 참소하여, 충숙왕이 원나라에 5년간 체류하였으며, 그때 왕인(王印)까지 빼앗긴 일이 있었다.
심양왕의 쿠데타 기도와 국내 친원세력의 암살 위협에 여러번 시달림을 당했다. 이러한 복잡한 사정으로 1325년에 귀국한 충숙왕은 심양왕 고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한종유(韓宗愈) 등 신하들의 반대로 취소하고, 왕자 정(禎 : 후의 충혜왕)을 세자로 삼은 뒤 1330년 양위하였다. 그리고 원에 가서 부마 상주국 일수왕의 호를 받았다. 그러나 나이 어린 충혜왕은 수렵·유희를 일삼고 소행이 옳지 못하자 원나라의 명으로 1332년 다시 복위되었다가 1339년 죽었다.
가계
- 공원왕후 홍씨(恭元王后 洪氏, 1298년~1380년) - 남양 홍규의 딸.
- 충혜왕(忠惠王, 1315년~1344년, 재위: 1330년~1332년, 복위 1339년~1344년) - 고려 제 28대 왕.
- 공민왕(恭愍王, 1330년~1374년, 재위: 1351년~1374년) - 고려 제 31대 왕.
-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 ? ~ 1319년) - 원 세조 쿠빌라이(忽必烈)의 5남인 영왕(營王) 야선첩목아(에센티무르, 也先帖木兒)의 딸.
-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 1308년 ~ 1325년) - 다루마바라(원 순종)의 아들 위왕 에무게(아목가, 魏王 阿木哥)의 딸로, 쿠빌라이(원 세조)의 고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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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 충숙왕실록
(1294~1339년, 재위 1313년 3월~1330년 2월, 1332년 2월 복위~1339년 3월, 총 24년)
1. 충숙왕의 위태로운 삶과 불안정한 왕위
충선왕은 왕위를 충숙왕에게 물려주면서 동시에 이복형 왕자의 아들이며 조카인 왕고를 세자로 세웠다. 이 같은 충선왕의 이해 못할 행동은 고려 조정을 왕위쟁탈전의 소용돌이로 휘몰아간다. 이 때문에 충숙왕은 누차에 걸쳐 원나라에 소환당하는 수모를 겪다가 급기야 왕위를 내놓아야 하는 위기 상황에 내몰린다.
충숙왕은 충선왕의 차남이자 몽고녀 의비 소생으로 129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도, 이름은 만, 자는 의효, 몽고식 이름은 아지눌특실리다. 1298년 강릉군 승선사에 봉해졌다가 장성해서는 강릉대군으로 진봉되었으며, 1313년 3월 원나라의 심양왕직을 고수하던 충선왕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27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20세였다.
충숙왕은 충선왕이 즉위 전부터 줄곧 원나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을 거의 원나라에서 보냈다. 게다가 모후 역시 몽고 여자였던 까닭으로 그에게는 원나라가 고려보다 훨씬 더 친근했을 것이다. 그런데 충선왕이 갑작스럽게 왕위를 넘겨주는 바람에 그는 엉겁결에 고려왕이 되었다.
원래 충숙왕에게는 감이라는 이름을 가진 형이 하나 있었다. 그는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1310년 부왕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충선왕은 즉위 후 단 2개월을 제외한 재위기간 전부를 원나라 연경에서 보냈고, 이로 인해 고려 조정은 항상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조정 중신들은 누차에 걸쳐 원나라에 왕의 환국을 청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몇몇 조신들이 세자 왕감을 중심으로 힘을 형성하려 했다. 이에 이미 충렬왕과 부자간의 세력다툼을 벌여본 바 있는 충선왕은 세자 왕감과 그 주변인물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충숙왕은 냉혹한 정치적 결단의 희생자가 된 동복형 왕감을 대신하여 고려왕에 올랐다. 하지만 상왕인 충선왕이 건재한 상태였기 때문에 왕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충선왕은 이복형 왕자의 아들 왕고를 총애하여 그를 세자로 세운 상태였다. 이 때문에 왕고는 지속적으로 왕위찬탈 음모를 꾸며 충숙왕을 곤경에 빠뜨리곤 하였다.
충숙왕 재위 초년에는 충선왕이 일시 귀국하여 개경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만 하더라도 각 도에서 올라오는 결재서류는 모두 충선왕에게 먼저 올라갔다. 또한 충선왕은 한때 자신이 108만 승려에게 음식을 먹이고 108만 개의 등에 불을 켜겠다고 공언한 바 있었는데 이를 실천하기 위해 이른바 '만승회'라는 행사를 치르는 통에 국고가 탕진되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공덕을 10여 개 조목으로 손수 작성하여 은밀히 식목도감에 보내 백관들로 하여금 찬양문을 올리게 하는 등 노골적으로 공명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 같은 행동의 목적은 원 왕실로부터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충선왕은 낡은 궁궐을 중수하고, 민지와 권보에게 명령하여 태조로부터 원종에 이르는 역대 왕들의 실록을 7권으로 축약한 <본국편년강목>을 편찬케 하는 등 왕실의 권위를 세우는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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