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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17 : 고려의 역사 186 (제27대 충숙왕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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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17 : 고려의 역사 186 (제27대 충숙왕실록 3)

두바퀴인생 2011. 11. 11. 03:51

 

 

 

한국의 역사 417 : 고려의 역사 186 (제27대 충숙왕실록 3)   

 

 

제27대 충숙왕실록

(1294~1339년, 재위 1313년 3월~1330년 2월, 1332년 2월 복위~1339년 3월, 총 24년)

 

1. 충숙왕의 위태로운 삶과 불안정한 왕위(계속)

 

그러나 충숙왕의 수난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귀국하던 그해 2월 왕고의 동생 연덕대군 왕훈이 위사 김영장의 처를 간음한 죄로 순군에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충숙왕과 심양왕 왕고의 세력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왕고의 힘에 밀린 충숙왕은 결국 왕훈을 풀어주게 하고 그를 원으로 보낸다.

 

그 후에도 왕고의 왕위찬탈 위협이 계속되자 충숙왕은 원의 지원을 받기 위해 다시금 원나라 위왕 아목가의 딸 금동공주(조국장 공주)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충선왕도 충숙왕의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태정제에게 충숙왕의 무고함을 간언한다. 이렇게 하여 충숙왕은 가까스로 왕권 회복의 기틀을 마련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듬해 10월 조국장공주가 용산원자를 낳고 산고로 인해 18세의 어린 나이로 횡사한다. 이 때문에 충숙왕은 다시 궁지에 몰리게 된다.

 

충숙왕의 입지가 약해진 틈을 타 왕고의 왕위찬탈 음모가 다시 진행됐다. 왕고는 태정제의 심임을 얻은 후에 평장정사 매려와 산인 역특미실불화를 고려에 보내게 하고 박중인, 조유, 조운경, 고자영 등의 측근들을 딸려 보냈다. 당시 왕고파인 유청신과 오잠이 원나라 중서성에 가서 충숙왕은 눈이 멀고 귀 먹은 벙어리라 친히 정사를 돌볼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충숙왕은 왕자 정을 세자로 책봉하여 원에 입조케 하였다. 이에 태정제는 매려로 하여금 유청신과 오잠의 말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충숙왕이 왕고의 세자인을 가져간 이유를 캐내게 했던 것이다.

 

충숙왕을 접한 매려는 유청신과 오잠 등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한편 왕고가 심양왕 직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 세자를 겸할 수 없다는 충숙왕의 설명을 듣고 모든 것이 왕고파의 무고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일로 입지가 강화된 충숙왕은 왕고의 도당인 조식, 김온, 권하, 전굉 등을 순군옥에 가두어 귀양을 보내는 등 왕권강화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몸이 약해져 1330년 2월 세자 정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가 그해 7월 원나라에 가서 머물렀다. 하지만 충혜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음탕한 짓을 일삼다가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자 1332년 2월 복위하였다.

 

복위한 충숙왕은 원에 머물러 있으면서 민상정과 조염휘를 파견하여 정승 윤석을 비롯하여 손기, 김지경, 배전, 오자군, 강서 등 수십 명에 대하여 왕을 잘못 받든 죄로 삭직하고 유배시켰다. 그리고 몽고 여자 경화공주를 데리고 1333년 3월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귀국 후 원나라가 지나치게 많이 요구하는 세공을 삭감케 하고 공녀와 환관의 징발을 중지토록 청원하는 등 몇 가지 업적을 세우기는 하였으나 이전부터 나타나던 대인기피증이 심해져 신하들을 멀리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리고 복위 8년 만인 1339년 3월에 지병이 악화되어 4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능은 의릉이며, 실록은 '충렬왕실록'과 함께 충목왕 2년인 1346년에 편찬되었다.

 

 

심양왕

심양왕(瀋陽王)은 고려의 왕이 원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봉작(封爵)의 하나이다.

 

1308년(충렬왕 34년)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무종(武宗)을 옹립한 공으로 심양왕의 봉작을 받은 것이 그 시초였다. 당시의 심양, 즉 지금의 펑톈·랴오양 등지는 고려인의 전쟁 포로나 유민(流民)이 많이 살면서 특수한 지역을 형성하여 두 나라 사이의 교통상·군사상·경제상 극히 중요한 곳이었다. 이 지방을 다스리기 위해 심양왕이 봉해졌다.

 

충렬왕이 죽은 후 심양왕이던 충선왕이 다시 왕위에 올랐고, 1310년(충선왕 복위 2년) 심왕(瀋王)에 개봉(改封)되었다. 이때부터 심양왕 대신 심왕으로 불리었다. 그 후 충선왕의 조카이자 한때 고려의 태자였던 연안군 고(延安君暠, 몽골 이름 툭타부카(脫脫不花))가 심양왕이 되면서부터는 이러한 지역에 대한 실권이 없어졌다. 원나라는 이때부터 심왕을 정치적으로 교묘히 이용함으로써 고려의 왕을 견제하는 도구로 삼았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충숙왕을 싫어하는 일부 무리들이 있어 고(暠)와 결탁하여 그를 왕위에 옹립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이후 왕고는 고려에서 태어난 태자 아유시리다라의 지지를 받으며 여러번 왕위를 주장했으나 결국 후계 없이 죽었고(1368), 공민왕이 후사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심양왕과 고려왕 사이에는 고려 국왕의 지위를 둘러싸고 여러 번 분규가 일어났다. 이러한 고려 자체 내의 정치적·사회적 혼란과 분열을 이용하여, 원나라는 쇠퇴해진 국력으로도 고려에 대한 외교정책에서 주도권을 쥐고 군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