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425 : 고려의 역사 194 (제28대 충혜왕실록 2)
제287대 충혜왕실록
(1315~1344년, 재위 1330년 2월~1332년 2월, 1339년 3월 복위~1344년 1월, 총 6년 10개월)
1. 희대의 패륜아 충혜왕과 고려 왕실의 위기(계속)
한편 원나라로 압송된 충혜왕은 1340년 3월 형부에 갇혔고, 이 때 김인, 김륜, 한종유, 홍빈, 이몽가, 이엄, 노영서, 안천길, 손수경, 윤원우, 남궁신 등도 함께 갇혀 심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충혜왕은 탈탈대부의 도움으로 그해 3월에 풀려나 4월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원나라에서는 고려 출신 여자 기씨를 순제의 제2왕후로 삼았는데, 그녀는 기철의 누이동생이었다.
원나라에서 돌아온 충혜왕은 이전과 다름없이 음행을 일삼으며 정사를 어지럽혔다. 1341년에 왕이 예천군 권한공의 둘째 처 강씨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호군 박이라적으로 하여금 궁중으로 데려오게 하였는데, 이라적이 데려오던 중에 그녀와 먼저 간통한 사실을 알고 왕이 직접 두 사람을 때려 죽였다. 또 그해 11월에는 내시 전자유 집에 깄다가 그의 처 이씨를 강간하였으며, 그 며칠 뒤에는 자기가 때려 죽인 박이라적의 처를 찿아가 강간하였다.
이외에도 충혜왕은 임홍보의 시비와 간음하엿으며, 재상 배전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이 배전의 처와 그의 동생 금오의 처를 강간하였다. 또 만호 전찬 이포공의 처를 강간하고 귀양보냈다. 이렇게 되자 거리의 불량배 3명이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주부 공보의 처를 강간하는 사건까지 벌어지기도 하였다. <고려사>에 기록된 강간사건만 해도 이와 같을진데, 기록되지 않은 일을 합한다면 충혜왕의 음행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충혜왕의 행동은 단순히 이처럼 음탕한 행위에만 그치지 않았다. 매일같이 연회를 베풀고 사냥과 수박회를 즐기는가 하면, 민가의 재물을 갈취하고 백성들을 강제부역에 동원하는 바람에 원성이 끊일 날이 없었다.
1343년 3월 어느 날 밤에는 민천사 누각에 올라 비둘기를 잡으려다가 햇불이 옮겨 붙어 누각을 태운 일도 있었고, 그 다음 날에는 연회장을 만들기 위해 민가 1백여 채를 강제 철거하고 토지와 재산을 강탈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해 4월에는 개경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개경 사람들 사이에 근거없는 소문이 유포되기를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 명을 잡아다가 새로 짓는 대궐 주춧돌 밑에 파묻으려 한다고 하였기에 집집마다 놀라 어린아이를 안고 도망치는 자가 있었으며, 못된 소년들이 이틈을 타서 마음대로 강탈하고 절취하였다."
이 기록에서처럼 충혜왕은 새로운 궁궐을 짓기로 하고 백성들을 강제부역에 동원하여 민생이 어지럽게 하였다. 그는 직접 공사장 담장에 올라가 감독을 하였으며, 궁궐이 준공되자 각 도에서 칠을 거둬들여 단청을 하였다. 이 때 단청의 안료를 수송하는 기한을 늦추면 그 벌로 몇 곱절의 값에 해당하는 베를 징수하였다.
충혜왕의 학정이 계속되자 이를 참지 못한 현효도가 왕에게 독약을 먹이려다 실패하여 사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기철 등은 원나라 조정에 고하여 충혜왕의 폐정이 극에 달했다며 그를 소환하여 폐위시킬 것을 건의 하였다.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충혜왕은 1343년 10월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신축한 신궁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신궁생활은 채 한 달도 가지 못하였는데, 충혜왕의 학정을 보고받은 원나라 조정에서는 협의 끝에 그를 소환하기로 결정하고 대경 타적과 낭중 별실가 등 6명을 보냈다.
이들은 하늘에 제사할 것과 대사령을 반포하라는 원나라 순제의 조서를 가지고 왔다는 핑계를 댔고, 충혜왕은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정동성으로 갔다. 이 때 타적이 발로 왕을 걷어차며 포박하여 원으로 압송하였다. 이 때 왕과 같이 있던 백관들은 대부분 도주하였고, 왕을 호위하고 있던 좌우사 낭장 김영후, 만호 강호례, 밀직부사 최안우, 응양군 김선장 등은 창에 맞았으며, 지평 노준경과 용사 2명이 피살되었다.
타적이 충혜왕을 포박하여 말에 태워 원나라로 달려가자 충혜왕은 천천히 갈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타적은 칼을 빼들고 위협하며 그를 급히 압송하였다.
충혜왕이 압송 된 뒤 기철, 홍빈, 채하중 등이 정사를 처결하며 은천옹주를 비롯한 충혜왕의 애첩 및 궁인 126명을 궁궐에서 추방하였다.
이 때 원으로 압송된 충혜왕은 원나라 조정의 결정에 따라 게양현으로 유배되고 원나라 순제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그대 왕정은 남의 윗사람으로서 백성들의 고혈을 긁어먹은 것이 너무 심하였으니 비록 그대의 피를 온 천하의 개에게 먹인다 하여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러나 내가 사람을 죽이기를 즐겨하지 않기 때문에 게양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니 그대는 나를 원망하지 말라."
게양은 연경에서 2만 리 떨어진 곳이다. 충혜왕은 이곳을 향해 가던 중 악양현에서 1344년 정월 30세를 일기로 죽었는데, 아마 독살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고려에 전해지자 백성들 중에 아무도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는 기뻐서 날뛰며 이제 다시 갱생할 날이 왔다는 사람까지 있었다 한다.
충혜왕의 시신은 1344년 6월 개경에 도착하였고, 그해 8월 영릉에 장사지냈다.
기철(奇轍, ?∼1356년, 공민왕 5).
고려 후기의 권신. 본관은 행주. 몽고식 이름은 빠엔부카이다.
고조부는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기윤숙이며, 아버지는 총부산랑을 지낸 기자오이다.
누이 동생이 원나라 순제의 제 2황후가 되어 태자 아이유시리다라를 낳고 원나라에서 세력이 강대해지자, 이를 배경으로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성 참지정사에 임명되고, 고려로부터는 정승에 임명된 뒤 덕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때부터 그의 일족과 도당들이 교만하고 포악해져 남의 토지를 빼앗는 등 불법행위를 자행하였다. 뒤에 다시 원나라로부터 요양성평장에 임명된 뒤 대사도에 이르렀다.
1356년 원나라가 점차 쇠약해지자 자기 위치를 지키기 위해 친척과 일당을 요직에 앉히고 역모를 꾀하였으나, 사전에 이를 알게 된 공민왕에 의하여 권겸, 노책 등과 함게 주살되었다.
기황후
중국 원나라의 황제 순제(順帝)의 황후인 기황후(奇皇后, ?~?)는 고려의 여인이었다. 13세기 몽골의 초원에서 일어나 14세기 동아시아를 거점으로 중동을 지나 러시아와 동유럽까지 아우르는 거대 영토를 가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제국이었던 원나라의 황후가 고려의 출신의 여인이라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게다가 이 기황후는 황후의 자리에 오른 것에 그치지 않고 황후가 된 이후 37년간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여 원나라와 고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
고려의 공녀에서 원나라 황후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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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成吉思汗]이 몽고 부족을 통합하고 나선 정복 전쟁은 중국 대륙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를 닥치는대로 치고 들어가 끝도 없이 영토를 넓히는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파죽지세로 일어나 그 누구도 당할 자 없었던 몽골제국의 7차례나 되는 침입에도 고려는 30여 년간 꿋꿋이 항거하였지만, 결국 대제국 건설의 강렬한 야망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고려는 장기간에 걸친 항거 덕분에 고려는 국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몽골제국의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 수도를 대도(현재 북경)로 옮기고 국호를 원으로 한 것이 1271년의 일인데, 이 시기 고려는 아직 몽골 제국이 정복한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완전히 복속되지 않았고 자체적인 국호와 정권을 인정받는 독립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제국이었던 원나라의 테두리 안에 들어간 100여 년 동안 고려는 원조정으로부터 수많은 내정간섭에 시달려야만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왕자들은 인질로 원나라에 가야만 했고, 왕은 원 조정에서 마음대로 갈아치웠으며, 혼인 통교를 앞세워 원나라 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되어 들어와 고려 정치에 간섭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한반도의 서경 이북의 북쪽 땅은 원나라의 직접 통치구역이 되었고 원나라의 정복 전쟁을 돕는다는 명분하에 수많은 물자와 군사가 약탈에 가깝게 동원되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원나라는 고려에 공녀라는 매우 야만적인 요구를 해왔다. 공녀란 말 그대로 여자를 공물로 바치는 것이다.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80년간 정사에 남아 있는 것만 50여 회에 이르고 왕실이나 귀족이 개인적으로 요구한 일도 허다하였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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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페이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황후의 초상화. | |
원의 공녀 요구 이유는 유목민족 출신인 원나라 왕실에 여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원나라에는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여자 외에도, 원의 귀족·고관이 요구하는 여자도 공급해주어야 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군인 집단 등의 혼인을 위해 많은 수의 여자를 필요로 하기도 하였다.
공녀는 고려 전체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어린 딸을 공녀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결혼을 시키는 일이 많아져 조혼의 풍습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공녀는 하층민에서만 차출하는 것이 아니라 원나라 왕실의 요구에 상응하는 정도의 신분을 가진 여자도 필요했기 때문에 귀족의 여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려에서 간 공녀들은 대개 원나라 궁궐의 궁녀나 고관 귀족의 처첩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거리의 기생으로 팔려가 이국땅에서 슬픈 생애를 살아야만 하기도 했다. 공녀는 그만큼 고려 여인들의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치욕이었기 때문에 개중에는 공녀로 뽑히면 가지 않기 위해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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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제(북원의 혜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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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도 이런 고려 공녀 중의 한 명이었다. 기황후의 본관은 행주이고 아버지는 기자오(奇子敖)이다. 기자오는 문하시랑평장사를 한 기윤숙(奇允肅)의 증손으로 음보로 관직을 할 정도였으니 그렇게 한미한 집안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기황후는 이 기자오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가 다섯에 언니가 둘 있었다. 기황후는 공녀로 뽑혀 1333년 고려 출신 환관이던 고용보(高龍普)의 주선으로 원왕실의 궁녀가 되었다. 당시 원나라 왕실에는 고려 출신 환관들이 많았다. 원나라는 소수의 몽고족이 다수의 한족을 다스리는 나라였기에 한족들이 중앙정부로 진출해 힘을 얻는 것을 극도로 막고 있었다. 하지만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식자층이 필요했다. 유목민 출신으로 교양을 쌓을 틈이 없던 원나라 지배층들은 이런 요구를 고려에서 바친 글을 아는 환관들을 통해서 해결했다. 고용보도 고려에서 원으로 간 환관이었다.
고용보는 조국, 고려에서 온 기황후를 차를 따르는 궁녀 자리에 앉히고 황제인 순제의 눈에 띄게 했다. 당시 원나라 황제인 순제(혜종)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왕실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고려의 대청도에 1년간 귀양을 간 경험이 있었다. 고려에서 살았던 경험 탓이었을까? 순제는 곧이어 기황후를 총애했다. | |
황제의 총애는 황후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기황후는 당시 순제의 제1황후이던 타나시리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타나시리는 기황후에게 수시로 채찍질을 하고 인두로 살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순제의 제1황후 타나시리는 순제와 정적 관계이던 집안의 딸로 순제와의 사이도 무척 좋지 않았다. 기황후가 순제의 총애를 받은지 2년 되던 1335년 황후 타나시리의 형제들이 순제에 반대하는 모반을 일으키지만 실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황후 타나시리도 반란에 가담하였다는 벌을 받고 죽었다.
순제는 총애해 마지 않는 기황후를 황후 자리에 올려놓으려 했지만, 실권자이던 바얀[伯顏, 메르키트 바얀]이 몽고족이 아니면 황후가 될 수 없다고 반대하여 결국 이 일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황후 자리는 몽고 옹기라트 부족 출신의 바얀 후투그(伯颜忽都)에게 돌아갔다. 바얀 후투그는 매우 어진 성격으로 황후가 되고 나서도 거의 앞에 나서지 않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한번 황후의 꿈이 좌절되었던 기황후는 이후 1338년 아들 아이유시리다라[愛猷識里答臘]를 낳고 이듬해 메르키트 바얀이 실각하자 마침내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 |
원나라의 실권자로 부상하다
![](http://ncc.phinf.naver.net/ncc01/2011/7/1/230/7px.jpg) 기황후는 황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어차피 제1황후는 허수아비 황후와 다름없었다. 그녀는 황후 직속 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으로 개편하여 고용보를 자정원사(資政院使)에 앉히고 왕실 재정을 장악하였다. 막대한 왕실 재정을 틀어쥐게 된 기황후는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1353년에는 황제를 압박하여 자신의 아들인 아이유시리다라를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고, 같은 고향 출신인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군사 책임자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삼아 군사권도 장악하였다.
기황후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풍속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고려양(高麗樣)이라고 한다. 고려의 복식과 음식들이 원나라 고위층들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고 명문가에 속하려면 고려 여자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는 생각이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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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기황후가 원나라 정치를 쥐락펴락하게 되자 고려에 남은 그녀의 가족들도 덩달아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원나라에서는 그녀의 아버지 기자오를 영안왕(榮安王)으로, 부인을 왕대부인으로 하였으며, 선조 3대를 왕의 호로 추존하였다. 또한, 기황후의 오빠 기철(奇轍)을 원나라의 참지정사, 기원(奇轅)을 한림학사로 삼자, 고려에서도 이들을 덕성부원군, 덕양군에 봉할 수밖에 없었다. 기씨 집안이 고려를 넘어서 원나라로부터 힘을 얻게 되자 고려 조정은 기씨 집안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다. 문제는 이 기씨 집안의 아들들이 원나라의 힘을 고려에 유익하게 쓰기보다는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이용했다는 데 있었다. 기황후도 가족들을 위해 고려에 대한 내정 간섭을 지나치게 했다. 기씨 집안의 악행은 결국 공민왕(恭愍王) 즉위 후 원나라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이들을 비밀리에 제거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때도 기황후는 공민왕을 제거하고 충선왕(忠宣王)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군사를 보내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이때 이미 원나라의 국세가 기울고 고려가 원나라 군대를 잘 막아내서 실패로 그쳤다.
물론 고려여인인 기황후가 원나라의 황후가 되어서 좋은 점도 있었다. 충렬왕 때 시작되어 80년간 지속된 공녀 징발이 금해진 것도 이 시기였고, 고려가 원나라의 테두리 안에 들어간 후 계속 제기되었던 입성론(立省論), 즉 고려의 자주성을 인정하지 않고 원나라의 한 개의 성으로 만들자는 논의가 사라진 것도 이때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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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 그는 북원의 소종이 되었다. | |
원나라의 몰락과 기황후의 최후
![](http://ncc.phinf.naver.net/ncc01/2011/7/1/208/7px.jpg) 원나라는 순제 때 문치주의 정치를 펼치면서 문화적으로는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순제 즉위 전 있었던 왕위 다툼의 여파가 여전히 남은 상태에서 기황후가 정권을 잡은 후 시작된 황위를 둔 정쟁이 원나라의 힘을 점차 약화시켰다. 원나라는 소수의 몽고족이 다수의 한족을 다스리는 체제였기 때문에 작은 혼란도 국가의 존망을 좌지우지할 위기로 비화될 가능성이 많은 나라였다.
기황후는 남편 순제에게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장성한 자신의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 줄 것을 종용했다. 순제는 이를 거부했고 그 와중에 황태자 반대파와 지지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반 황태자파의 지도자 볼루드 테무르가 1364년 수도 대도를 점령했을 때 기황후는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이 내전은 결국 황태자 지지자인 코케 테무르(擴廓 帖木爾)가 1365년 대도를 회복하면서 수습되었다.
기황후는 1365년 제1황후이던 바얀 후투그가 죽은 후 제2황후라는 딱지를 떼고 원나라의 제1황후로 올라섰다. 그러나 그녀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원나라 중앙 정부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그동안 몽고족의 지배에 반감을 품었던 한족들이 홍건적이 되어 일어나면서 원나라는 수습할 수 없는 혼란으로 치닫게 되었다.
1368년 마침내 주원장이 이끄는 명나라 대군이 원나라 수도 대로를 밀려들자 원나라 왕실은 피난길에 올랐다. 기황후도 이때 남편 순제와 아들 아이유시리다라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을 떠나면서 기황후는 구원병을 보내주지 않는 고려를 원망했다고 한다. 원나라 왕실은 응창부로 수도를 옮겼다가 카라코룸까지 피난했다. 피난 와중에 순제는 죽고 그 자리를 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가 이어 북원의 소종이 되었다. 대도를 떠나 응창부까지 가는 동안의 기황후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기황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우리나라 연천에 기황후의 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조선시대 기록인 [동국여지지]에 전하고 있다. 능이 있었다고 전하는 지역에 고려시대 양식의 기와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능을 둘러싼 담장의 기와였다는 것이다. 어쩌면 기황후는 응천부에서 카라코룸으로 가지 않고 고려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때 동아시아와 유럽을 호령했던 대제국 원나라의 황후였던 고려 여인 기황후는 오랫동안 원나라 망국의 한 원인으로 평가되면서 우리나라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황후라는 존재가 14세기 말 고려와 원나라의 역사에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