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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26 : 고려의 역사 195 (제28대 충혜왕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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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26 : 고려의 역사 195 (제28대 충혜왕실록 3)

두바퀴인생 2011. 11. 20. 14:54

 

 

 

한국의 역사 426 : 고려의 역사 195 (제28대 충혜왕실록 3)   

 

 

제28대 충혜왕실록

(1315~1344년, 재위 1330년 2월~1332년 2월, 1339년 3월 복위~1344년 1월, 총 6년 10개월)

1. 충혜왕의 가족들

충혜왕은 정순숙의 공주, 희비 윤씨, 화비 홍씨,은천 옹주 임시 등 4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들 중 정순숙의공주(덕녕공주)가 충목왕과 장녕공주를, 희비 윤씨가 충정왕을, 은천옹주가 석기를 낳아 3남 1녀를 얻었다. 이들 가족들 중 4명의 부인과 서자 석기의 삶을 간단히 언급한다.

 

정순숙의 공주(?~1375년)

정순숙의공주 역련진반은 원나라 진서 부정왕 초팔의 딸이다. 그녀는 1330년에 충혜왕에게 시집왔으며, 덕녕공주에 책봉되었다.

 

충혜오아의 페륜 행위로 말미암아 마음고생이 심했으며, 충혜왕이 죽고 난 뒤에는 여덟 살밖에 안 된 충목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처결하였다. 이 때 배전, 강윤충 등과 친하게 지냈고, 그들은 공주의 권세를 믿고 권세를 부렸다.

 

그 후 충목왕이 병약하여 드러눕자 밀직부사 안목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정무를 처리하였다. 1348년 12월에 충목왕이 죽자 덕성부원군 기철과 정승 왕후에게 정동성의 사무를 대행하도록 했다.

 

그러나 희비 윤씨의 아들 충정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도 정사에 간섭을 심하게 하였다. 그 후 1350년에 원나라에 갔다가 시동생인 공민왕이 즉위한 후인 1354년에 귀국하였다.

 

공민왕 대에도 그녀는 왕후나 태후 못지않은 좋은 대우를 받았으며, 1367년에는 원나라로부터 정순숙의 공주에 봉해졌다. 그리고 1375년에 사망하여 경릉에 묻혔다. 그녀 소생으로는 충목왕과 장녕옹주가 있다.

 

희비 윤씨(?~1380년)

희비 윤씨는 파평현 사람으로 찬성사 윤계종의 딸이다. 1331년에 충혜왕에게 시집와서 입궁하엿으며, 경순공주에 봉해졌다. 이 때 충혜왕은 부를 세워 경순이라 하고 승, 주부 각 1명과 사인 2명을 두엇다.

 

1348년 아들 충정왕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지만 희비 윤씨는 덕녕공주의 힘에 밀려 섭정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1351년 충정왕이 쫓겨나 강화에 머물 때 그녀는 공민왕에게 청하여 강화로 가서 아들을 만나보고 수일 간 체류한 후에 귀경하였다.

 

그 후 오랫동안 쓸쓸한 여생을 보내다가 1380년에 사망하였다.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소생은 충정왕 하나뿐이다.

 

화비 홍씨(생몰년 미상)

화비 홍씨는 평리 홍탁의 딸이다. 홍탁은 경상도 진변사로 있었는데, 충혜왕이 그의  딸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1324년에 궁중으로 맞아들이지도 않고 그녀를 화비에 봉했다.

 

그 후 그녀는 재상 운침의 집에서 기거하였는데, 충혜왕은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 싫증을 내고 출입을 끓어버렸다.

 

사망년대와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소생은 없었다. 

 

은천옹주 임씨 (생몰년 미상)

은천옹주 임씨는 상인 임신의 딸이며 단양대군 왕유의 종이었다. 오지그릇(사기)을 파는 것을 생업으로 하고 있던 그녀는 어느 날 충혜왕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기 시작하였다.

 

1342년 충혜왕이 화비 홍씨를 후비로 맞아들이려 하자 그녀는 질투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이에 충혜왕이 그녀를 달래기 위해 은천옹주에 봉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녀를 가리켜 '오지옹주'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녀가 오지 그릇을 팔던 여자였다는 사실을 비꼬아 부른 별호였다.

 

그녀는 무척 음탕하여 충혜왕과 죽이 잘 맞았으며, 사치가 심하여 충혜왕으로 하여금 신궁을 짓도록 하고 자신이 그곳에 거처하였다. 충혜왕이 이른바 열약이라는 정력제를 먹여 다른 비빈들이 성생활을 견뎌내지 못하였지만, 유독 그녀만은 능히 충혜왕의 성욕을 감당하여 총애를 독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녀가 아들 석기를 낳았을 때 복잔치를 차렸는데, 이 때 예물로 사용된 비단은 모두 상인들에게 강제로 탈취한 것이었다. 이처럼 권세를 부리던 그녀는 1343년 충혜왕이 원나라로 압송되자 고용보 등에 의해 궁궐에서 추방되었다.

 

능과 사망연대에 관한 기록은 없으며, 소생은 석기 하나 뿐이었다.

 

석기(?~1375년)

석기는 충혜왕과 은천옹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충정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머리를 깍여 만덕사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공민왕 대에 원나라에 소환되어 그곳에 머물다가 고려로 돌아왔다.

 

1356년에는 임중보 등이 석기를 왕으로 추대하려 음모를 세웠다는 죄목으로 순군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정승 손수경, 밀직 홍준, 감찰대부 손용, 황숙경, 교령 정세공 등 10여 명이 연루되어 하옥되었다. 또한 석기는 제주로 유배되었는데 공민왕은 이안, 정보 등을 시켜 압송 도중에 바다에 빠뜨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석기는 빠져 죽지 않고 간신히 도망하여 민가에 몸을 숨겼다. 이에 이안 등은 석기를 불에 빠뜨려 죽였다고 거짓보고를 하였다.

 

1363년에 서북면 도순무사 전녹생이 "석기라 불리는 자가 평양부에 있는데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러자 공민왕은 경복흥, 임견미 등을 파견하여 석기를 체포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전녹생과 서해도 도순무사 김유가 이른바 석기라 불리는 자를 체포하여 죽이고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공민왕은 김유가 보낸 석기의 목을 저자에 내걸고 은천옹주의 아기 임신과 거짓보고를 했던 이안, 정보 등의 목을 벴다. 또한 그들의 측근들도 함께 처형되었다.

 

그러나 석기는 이 때도 죽지 않았다. 평양에서 죽은 자는 석기와 평소에 같이 다니던 승려였고, 정작 석기는 도피하여 안협의 주민 백언린의 집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조용히 살았는데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들어선 다음인 1375년에 경복흥, 이인임 등이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용케 찿아낸다. 그리고 그해 이인임, 경복흥, 최영, 최인철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석기는 평민으로 살면서 평민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석기가 죽자 평리를 지낸 양백익이 자신의 초막에 숨겨두었다. 하지만 이 사실이 곧 알려져 양백익은 유배되고 아이는 머리를 깍여 계룡산에 출가시키기로 하였는데, 아이가 미처 계룡산에 도달하기도 전에 일부 대신들의 사주를 받은 아전들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충혜왕 실록'은 우왕 11년인 1385년에 '충복왕 실록', '충정왕 실록'과 함께 이승인, 정몽주 등에 의해 편찬된 듯하다.

 

실록의 자료를 통해 <고려사>를 편찬한 사관들이 충혜왕에 대해 성질이 포악하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는 평을 한 것으로 보아 이승인, 정몽주 등은 충혜왕을 매우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었던 듯하다. 특히 실록에 충혜왕의 음탕한 행위를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그 비판 정도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