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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35 : 고려의 역사 204 (제31대 공민왕실록 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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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35 : 고려의 역사 204 (제31대 공민왕실록 7)

두바퀴인생 2011. 11. 29. 03:29

 

 

 

한국의 역사 435 : 고려의 역사 204 (제31대 공민왕실록 7)   

 

 

제31대 공민왕실록

(1330~1374년, 재위 1351년 10월~1374년 9월, 22년 11개월)

1. 개혁주의자 공민왕의 배원정책과 고려의 국권회복(계속)

한편으로 홍건적의 침입은 무장들의 힘을 강화시켜 공민왕 초기에 어렵게 복구했던 문신 중용정책이 점차 퇴조되었다.

 

홍건적 침입의 피해가 미처 복구되지 못한 가운데 왕이 아직 개경 입성을 못하고 흥왕사에 기거하고 있던 1363년 윤3월에 찬성사 김용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고려 조정은 또한번 위기를 겪는다. 공민왕의 환궁 중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환자 안도적, 첨의평리 왕자문, 판전교지사 김한룡, 우정승 홍언박 등이 목숨을 잃고 공민왕도 살해될 뻔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공민왕이 자신의 모습을 닮은 안도적의 희생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였다. 반란군은 곧 변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최영과 오인택 등에 의해 제압된다. 그런데도 김용은 이 때 자신이 반란을 회책한 인물이 아니라며 자신의 반란군 수하를 모조리 살해한다. 그래서 그는 1등 공신에 오르는 등 술책을 부리다가 잔당들이 잡혀 실토하는 바람에 탄로가 나서 결국 거열형에 처해지게 된다. 그리고 난을 진압한 최영, 오인택 등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한때 홍건적과 싸워 개경 수복에 공이 컸던 이성계의 존재도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최영과 오인택에 의해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공민왕이 채 숨도 돌리기 전인 1364년 정월, 자신의 오빠 기철이 반란을 획책하다가 잡혀 공민왕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에 원한을 품은 원의 왕후 기씨가 원나라 군대 1만을 동원하여 공민왕을 제거하도록 사주하였다. 기왕후의 사주를 받은 최유가 원나라 군대를 이끌고 덕흥군 왕혜를 왕으로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였다.

 

최유는 의주를 함락하고 다시 선주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하지만 최영, 이성계 등의 활약으로 최유는 보름 만에 압록강을 건너 퇴각하였다가 그해 10월 원나라 군사에 포박되어 고려로 압송되었으며 다음 달인 11월에 처형되었다. 고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1365년 정월 밀직부사 김유를 원나라에 보내 덕흥군을 고려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원나라측은 덕흥군의 병을 핑계로 고려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는 모두 기왕후의 조종에 따른 조처였다.

 

고려 사회가 계속되는 변란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가운데 동녕로 만호 박배야대가 연주를 침입하였으나 최영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격퇴하였고, 남해안과 경상도 일대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백성들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김용의 난 (1363년,흥왕사의 난)

 

김용은 안성 사람으로 성질이 음흉하고 능청스러워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었다. 또한 오만하고 가식이 많아 미운사람에 대해선 어떤 형태로든 피해를 주고, 약한 사람들을 업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가 출세를 하게 된것은 공민왕이 왕자 신분으로 원나라에 입조해 있을 때 시종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여러 관직을 겨쳐서 대호군에 이르렀고, 공민왕이 즉위한 이후에는 응양군 상호군 벼슬에 올랐다. 이 무렵 원나라 승상 탈탈이 공민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김용의 인품이 간사하고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반골의 형상이 있으니 벼슬을 주지 말것을 권고 하였는데, 이때 조일신과 최덕림이 사신을 매수하여 반주(反主) 김용과 승지 유숙, 김득배 등이 왕의 근신으로 국정을 농락당한다고 말하도록 꾸몄다. 그 바람에 유숙과 김득배는 파면되었으나 정작 김용은 공민왕의 신망에 의지하여 파면되지 않았다.

 

그 후 김용은 시종공 1등공신에 올라 수충분의 공신 책록을 받았으며 토지와 노비를 지급받고 밀직 부사자리에 올랐다.1351년 조일신이 난을 일으켜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당시 그는 내전에서 숙직을 한 한 덕분으로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며, 그 후에도 적극적으로 왕을 보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다.

 

그러나 조일신의 난이 종결된 이후에 왕을 제대로 보필하지 않은 죄로 장형을 당하였고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 이후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장사성을 토벌할 장수를 요구하자, 공민왕은 유배지에서 그를 소환하여 안성군에 봉하고 파견하였다. 그리고 김용이 소임을 끝내고 귀국하자 도첨의사사 벼슬을 주었다.

 

당시 김용은 정세운, 홍의, 김보 등과 함께 공민왕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서로 권력을 다투고 있었다. 그런데 김보가 모친상을 당하자 은밀히 행성도사 최개를 시켜서 왕에게 조정 백관의 3년 거상제도를 실시하도록 청원하라고 했다. 이는 김보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급한 나머지 그는 미처 왕의 결재가 떨어지기도 전에 도평의사사에 압력을 가하여서 3년 거상제도를 실시할 것을 명령했다. 얼마뒤 공민왕이 그 사실을 알고 그를 제주도에 유배시키고, 이 제도를 당장 폐지하였다. 이처럼 그는 권력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가리는 성격의 소유자이고 또한 교활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공민왕은 끝내 그를 버리지 못하고 다시 소환하여 첨의 평리로 있다가 다시 중서문하시랑평장사로 있었다.

 

이때 김용은 신귀의 처와의 간통사건에 말려들어서 곤욕을 치르는 중이었다. 신귀의 처 강씨는 남편이 지방관으로 강직당한 틈을 이용하여 많은 대신들을 상대로 간통하였는데, 김용도 그 무리에 속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강씨의 시어머니가 어사대에 며느리를 고소하자 강씨는 결국 고문(국문)을 당하고 자신과 관계한 대신들을 발고하자 많은 대신들이 간음죄로 처벌되었다. 하지만 김용을 권세를 이용하여 파직은 면할수 있었다.

 

이외에도 김용은 살인사건에도 가담했다. 오래 전부터 자신과 왕의 총애를 다투던 정세운이 안우와 김득배,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을 크게 무찔러 공을 세우자 이를 시기한 김용은 왕의 편지를 위조해서 안우와 김득배, 이방실등으로 하여금 정세운을 살해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후에 김용은 안우, 김득배, 이방실에게 살인죄를 뒤집어쒸워 안우는 수하를 시켜서 망치로 때려죽였으며, 김득배와 이방실도 참수 당하였다.

 

이렇듯 권력을 위해서는 살인도 서슴지 않았던 야심가 김용은 급기야 왕의 절대권력을 누리기 위해서 공민왕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기철의 난이 끝나고 공민왕이 기철을 죽인것을 안 기 황후는 사신을 보내어서 왕을 갈아치우기로 결심하여 덕흥군을 왕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을 김용에게 전해준다. 이에 공민왕 33년(1363년) 윤 3월 초 하룻날 밤, 그는 개경으로 상경하려고 했으나 김용의 군대가 막아서 어쩔수 없이 흥왕사에서 행재소를 마련한다. 이때 김용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미리 짐작한 공민왕은 자신과 얼굴이 비슷한 안도치를 자신처럼 변장시키고 자신과 태후는 밀실에 숨어서 다행히 목숨은 건진다. 그리고 공민왕의 침소에는 변장한 안도치(안도적)이 대신 누워있다가 죽음을 당한다.

 

그러나 그는 공민왕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도당으로 하여금 궁중에서 처음부터 공민왕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환관 최만생(이 사람이 후에 1374년 공민왕을 살해)을 시켜서 명령하여 왕의 밥상을 차리라고 하였다. 공민왕을 안심시켜 스스로 나오게 하려는 계책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개경에 머물고 있던 재상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재상들이 묘련사에 모여 왕의 복을 비는 행사에 참가했다가 사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순군들을 소집하여 반란 세력을 토벌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김용이 그곳에 능청을 떨며 나타나 유탁에게 반란 소식을 전하고 최영과 오인택등과 함께 순군들을 몰고가 자신의 반란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자신의 수하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리고 유탁은 역모사건이 김용의 소행인지 알고 있으면서 추이를 지켜보기 위해 그의 행동을 방관하고 있었다.

 

그후 반란군이 완전히 진압된 직후 김용은 반란 진압의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체포한 몇몇 잔당들이 김용을 의심하자, 공민왕과 그의 권신들은 그를 의심하게 되었고 결국 그는 유배되었다. 그리고 나서 흥왕사 난(김용의 난)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 지자, 공민왕은 대호군 임견미와 호군 김두를 보내서 김용을 경주로 이배시켜 안렴사 보림으로 하여금 국문(고문)하도록 하였다. 이때 김용은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거짓말을 이렇게 했다고 한다

 

"내가 8년 동안이나 재상으로 있으면서 하고 싶은 일은 안 해본 적이 없는데 왜 우리 국왕을 해쳤겠는가? 나는 단지 시중 홍언박을 제거하려고 했을 따름이다"

 

라고 하자 그를 따르던 임견미등이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전하의 침소에 누워있던 안도치(안도적)을 죽였느냐?"

 

김용은 그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반란의 주모자임이 밝혀지자 개경 저자거리에 사지가 흩어진체로 효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