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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우리들의 슬픔

우면산의 가을 28 : 탐욕과 혼돈의 시대

 

우면산의 가을 28 : 탐욕과 혼돈의 시대

 

 

                                                                                     새벽달

 

한낱 수도 서울 시장 보선에 온 나라가 법썩이다. 민생은 실종되고 한 줌도 안되는 권력을 잡기 위해 여야 할 것 없이 표심을 잡으려 모두가 거리로 뛰쳐 나왔고 재야, 시민단까지 가세하여 몸쌀을 앓고 있다. 과학자이며 교수인 안철수는 현실 정치의 대안으로 이구동성으로 추겨세우자 자신이 현실정치의 해결자로 판단했는지 본연의 위치를 망각하고 한 후보에게 자신의 견해를 쓴 편지를 주면서 힘을 보태겠다는 모습이다.

 

역사를 보면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신의 당대에 모든 것을 개혁하겠다는 생각, 자신이 하면 잘 할 수 있다는 생각만큼 어리썩고  위험한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고려 무신정권이 들어선 후 반복하여 절대 권력자를 정권을 농단한 난신적자라며 죽이고 다음 권력을 잡은 자 치고 제대로 태평성대를 이룬자는 거의 없다. 그 중에서 유독 경대승이란 자만이 그래도 민생을 가장 많이 생각하였던 사람으로 개혁을 시도하기 위해 절치부심했으나 이미 뿌리깊게 썩은 고려 조정과 무능한 왕, 사회구조를 바꿀 수는 없었다.

 

만약 박원순 후보가 당선되면 민주당과 야권은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왜냐면 내년 총선과 대선에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서울시 주요 직책과 예하 기관의 수장들은 야권이나 시민 단체 출신들이 자리를 메울 것이다. 남은 짧은 재임 기간 동안 무언가 치적을 쌓기 위해 무리한 재정을 투입할 것이다. 친북,용공 단체와 그 출신들도 서울시 발탁되면 서울시 재정을 자신들의 쌈지돈 처럼 빼갈 것이다. 오세훈 시장이 추진하려던 모던 시의 정책 계획은 다시 백지화되고 진행되던 모든 사업도 축소 내지 백지화 될 것이다. 무상급식 등 포플리즘 시정이 난무할 것이고 서울시 부채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결국은 서울 시민이 선택한 사람에 의해 시민들은 주머니가 털릴 것이고 시민들 삶의 고통은 더욱 증가할 것이다.

 

만약 나경원 후보가 당선된다고 뽀족한 기대도 하지 않는다. 한나라당은 고무될 것이며 내년 총선과 대선에 다시 정권을 잡을 생각에 빠져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환호성을 질러댈 것이다. 한편 민주당과 박원순 후보, 안철수는 엄청난 충격에 낙담하여 각자 흩어지며 지리멸렬 될 것이다. 어차피 탄생과 생각이 다른 결속력이 없는 집단들 끼리 야합하여 임시방편으로 뭉쳐봐야 나중에는 잘되면 밥그릇 싸움질이요 못되면 제빨리 빠져나가기 때문에 패잔병 이상의 꼴이 나타날 것이다.  야당이라는 민주당이 오죽 못났으면 자당에서 서울시장 후보를 내지도 못하고 시민단체에게 내 주었으니 말이다. 손 대표, 유시민 등 한미 FTA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있는 사람들이 노무현 정권 때 한 목소리로 찬성하며 지지를 호소했던 인간들이 아닌가! 정권이 바뀌면 생각도 바뀌고 일관성도 없이 오로지 정쟁만 일삼고 권력쟁취에만 탐욕이 가득하니 국익과 민생은 뒷전인 그들이다. 그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동안 권력의 달콤한 맛을 보았기 때문에 정치권을 떠나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마약 중독자에게 마약을 끓어라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강 고수부지 새벽

 

 

안철수는 학자인가 정치인인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이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선 박원순 무소속 후보를 구체적으로 지원하는 활동에 나선 건 적(籍)은 대학에 둔 채 몸은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폴리페서의 전형(典型)을 자처하는 것이다. 안 교수는 24일 박 후보 선거운동 캠프를 방문해 “멀리서나마 성원하고 있었다. 오늘은 응원하러 왔다”면서 엉뚱하게도 56년 전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에 불씨를 지핀 여성운동가 로자 파크스를 뒤따라야 한다는 자필 편지까지 전달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웬만한 정치인을 뺨치는 쇼다. 안 교수는 자신이 학자(學者)인지, 아니면 정치인(政治人)인지 그 정체성부터 분명히하고 거취를 결정하는 게 지금이라도 정직한 태도다.

 




안 교수는 불과 한달반 전의 공언(公言)조차 손바닥 뒤집듯 하고 있다. 범야권 후보 단일화를 내세워 10·26 보선 출마 포기를 선언한 지난달 9일 박 후보 선거운동 참여 여부를 묻는 질문에 “본업으로 돌아가겠다. 나는 선거운동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던 안 교수 아닌가. 하지만 박 후보가 검증을 통해 심각한 흠결들이 드러나 자력(自力)으로는 어려운 상황에 이르자, 안 교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도를 바꿨다. 정치인의 허언(虛言)을 능가한다. 지난 6월 KAIST 석좌교수에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 옮긴 그는 3개월 만에 서울시장 출마 의사를 공식화했다가 박 후보에게 후보직을 양보하고 대학 교수직이 자기 본업이라며 몸을 숨겼다. 위선·위장 아닌가. 대학과 정치판을 왔다갔다하는 행보는 대학은 물론 정계에도 큰 해악을 미칠 뿐이다. 물론 정당법·공직선거법 등에선 국가공무원의 정당 참여를 제한하면서도 국·공립대학의 총장·학장·교수·부교수·조교수·전임강사인 교원에게는 정치 참여를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 야욕에 빠진 정치지도자처럼 양다리 걸치기로 지성인에 부여된 사회적 도덕률을 파괴하는 건 지성인이 할 일은 아니다. 정치를 하려면 교수직을 버리는 게 정도(正道)다.

안 교수의 정치 활동은 박 후보 선거운동 지원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내년 4월11일 치러질 제19대 총선을 앞두고 안 교수 주도의 신당 창당설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안 교수는 지난달 2일 “대통령이라면 (사회를) 크게 바꿀 수 있는데 저는 그럴 생각은 없다”고 밝혔으나 내년 12월19일 제18대 대선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말 뒤집기도 서슴지 않는 안 교수의 이런 전력(前歷)에 비춰 그런 분석이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버젓이 정치를 하면서도 교수 행세를 하는 게 자신과 학생들에게도 부끄러운 행동 아닌가.

안 교수에 대해 많은 국민은 지금 실망을 넘어 개탄하고 있다. 대한민국도 정치판에 줄을 대 출세하려는 폴리페서들이 창궐하는 현상을 이젠 종결지어야 할 수준은 됐다. 수많은 폴리페서가 학문의 전당을 오염시키며 교육적·사회적·정치적 병폐를 키우고 있는 현실은 대한민국 지성계(知性界)의 수치다.

 

 

 

                                                                               구름에 싸인 새벽달과 가로등

 

 

 

 

언론의 광기
사회 전체가 즉물적인 충동 사회로 치닫는 현상을 앞장서 조장하는 것도 언론이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언론은 순응하든지,적극적으로 정권에 부역한 부끄러운 역사를 갖고 있다. 독재가 사라진 지금의 언론은 대중인기에 자발적으로 부역하는 판이다. 관음증을 부추기고, 팩트를 잘라내고, 사소한 사실을 침소봉대해 말초적 감각을 자극한다. 주류 언론까지 여배우 노출에 열광하고, 서태지 이지아의 이혼에 1,3면까지 배정할 정도다. 막장 드라마와 잡담으로 일관하는 방송, 포르노를 방불케 하는 인터넷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언론은 깊은 사색과 합리적 숙고를 통해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검증을 거치고 숙려가 보태지면서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 언론의 기능이지만 점차 이를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ㅋㅋ''ㅎㅎ'로 종결되는 SNS 등의 단편적인 정서를 여론으로 포장하고, 감정 편향을 소통으로 착각하는 것도 역시 언론이다. 경제 보도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각하다. 과장 편향 보도는 기업을 적대시하고 반시장적 정서를 생산해낸다. 사실과 가치를 혼동하고 선악의 이분법으로 덧칠해 과학적 인식을 방해한다.

성숙한 사회라면 가치들 간에 질서가 부여되고 그것에 대한 질서정연한 숙고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그런 질서의 체계를 찾기 어려워졌다. 새로운 미디어들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말초적 단어들로 채워진다. 언제나 그런 현상이 존재했었지만 문제는 그런 저차원의 여론이 점차 중심부를 지배하게 됐다는 점이다. 논리 아닌 고함이, 진지한 대화 아닌 즉물적 소통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언론의 자성이 요구된다.

 

 

 

 

 

독재자의 말로
중앙일보에 실린 신재순씨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문득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을 생각한다. 죽음이야말로 인간의 궁극적 공포다. 한 사람의 마지막 모습에서 그 사람의 크기는 가늠된다.

“독재를 하기는 했지만 경제적으로 나라의 발전을 많이 이루고 국민을 위했던 분입니다. 사건 현장에서 총상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나는 괜찮아’라고 한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의연했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분이었어요.”

신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말로는 쉽다. 그러나 죽음에 임해서도 오히려 남을 안심시키고 다른 사람을 걱정하기는 어렵다. 그냥 어려운 게 아니라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필부인가.

악랄한 살인자들일수록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치사하고 비굴하다. 그 때문에 학대를 받았던 국민의 울분은 더 솟구친다. 저 비열한 인간에게 짓눌려 지내야 했다니! 저 겁쟁이에게 숱한 이웃과 혈육의 목숨을 빼앗기며 떨어야 했다니!

독재자, 살인자들 하나하나 권좌에서 끌어내려졌다. 오직 제 한 몸의 권세와 재부만을 탐해 인민을 학대하고 학살하고 강탈하는 것은 무엇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악이다. 이런 악당이 인민의 힘에 의해 밀려나고 응징당하는 것을 일컬어 사필귀정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몇 안 남았다는 이기적 독재자들도 귀정의 순리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리고 일찍이 어느 누구도 권세와 재물을 저세상까지 가지고 갔다는 말을 들은 바 없다. 갈 때는 모든 것을, 자신의 육신까지 그 자리에 두고 가야 하는 것, 이 또한 귀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