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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우리들의 슬픔

우면산의 여름 50 : 광복! 그 굴욕의 명칭 12

 

 

 

우면산의 여름 50 : 광복! 그 굴욕의 명칭 12

 

                                                                                                 새벽 여명

 

 

미국의 전시 동원 해제

미국의 군사 전통은 평시에는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제2차 대전 이후 미군의 상비군 감축은 당연하엿다. 미국의 여론과 의회, 지식인들은 군사력의 대폭적인 감축을 원했다. 게다가 국가 재정상의 압박이 겹쳐 미국은 전시동원체제를 해제해야만 했다.

 

그 결과 미국의 재래식 병력은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영향력 확대에 대처할 수 없는 수준으로 급격히 줄었다. 종전 당시 1,200만이었던 미군은 1950년에는 146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미국은 핵무기를 독점하고 있었고 공군력에서 우위를 보이기는 했으나, 대폭 감축된 육군으로 전 세계에 걸친 소련의 위협에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미국은 국가 이익의 우선 순위상 아시아보다 유럽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스, 터키 등 유럽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 데 더 큰 관심이 있었기에, 아시아 지역의 미군 철수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남한에서의 미군 철수

1947년 당시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한국의 낮은 전략적 가치와 병력 부족을 이유로 조기 철군의 긴급성을 강조했다. 한국은 소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미군 주둔의 위험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안보를 책임 지기에는 너무 많은 보병이 필요한 지역이라고 평가하여 남한 지역에 점령군으로 주둔했던 미군을 조기에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또한 1947년 미국 합동전략조사위원회는 한국을 18개 원조 대상국 중 긴급성 면에서 그리스, 터키, 이탈이아, 이란에 이어 5번째, 안보 요구 우선순위에서 16개국 중 13번째로 낮게 평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주한 미군은 1948년 9월 15일부터 철군을 시작하여 ,1949년 6월 29일에는 군사고문단 495명을 제외한 모든 철군을 완료했다. 한국 정부는 주한 미군의 철수를 막아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한국 정부는 차선책으로 미국으로부터 군사 원조를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미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50년 1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 미국의 군사 원조를 받을 수 있는 법적인 조치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 원조는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는 수준이기보다는 치안을 유지하는 정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미국의 군사 원조는 1950년 당시 8만 명이던 한국군 중 3만 5,000명은 아예 무장을 시킬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한 수준이었다.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사고문단이 요청한 항공기와 해군용 함포, 육군의 각종 탱크와 포를 지원하지 않았다.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대량의 막대한 군사 원조를 지원받고 있던 북한과는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뚱의 침략 전쟁 공모 

 

김일성의 스탈린, 마오쩌둥 설득 작업

6.25 한국 전쟁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김일성과 스탈린이라는 두 인물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전쟁을 통한 한반도의 공산화에 두 사람이 합의하지 못했더라면 한국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1946년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직접 낙점을 받아 북한의 통치자가 된 김일성은 1949년 3월 스탈린에게 남한 전체를 적화시킬 전쟁에 대한 요청을 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이러한 요구에 적극 수용하여 군비 증강에 협조하였다. 그러나 남침 침공 요구에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국제 정치 상황이 불투명하였고 비록 군사지원단만 남아 있지만, 남한을 침공할 경우 결국에는 핵보유국인 미국과 일전을 벌이게 될 것이라는 예상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에 부담도 작용하였다. 또 중국의 내전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결국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였는데, 차후 국제 정치 상황이 소련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그러던 차에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이 선언을 통해 동아시아의 방위선을 설정했는데, 한국은 애치슨 선언에 벗어나 있었다.

 

또한 중국 내전에서 마오쩌뚱의 공산당이 승리했고, 소련도 비밀리에 원자폭탄을 개발하여 보유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스탈린은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미국의 개입 가능성은 훨씬 줄어들었다고 판단했다. 김일성은 1950년 1월 17일 스탈린에게 38도선을 돌파하겠다는 남침 계획을 올렸고, 1월 30일 스탈린은 이 남침 계획을 승인하는 비밀 전보를 평양으로 보냈다.

 

1950년 4월 김일성이 다시 모스크바를 극비리에 방문했을 때, 스탈린은 마오쩌뚱의 동의를 얻어 추진하라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재차 승인했다. 스탈린은 만약의 경우 미국과 일전을 벌이는 상황이 전개되면 소련은 빠지고 소련의 위성국이면서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공군을 이용하여 대리전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을 대신 끌여들여 미국과 대적하게 할 심산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소련의 음흉한 흉계는 결국 자신들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김일성과 마오쩌뚱을 이용하여 남한을 적화하여 공산 세계의 영역을 확장할 요량이었다.

 

소련에서 귀국한 김일성은 곧바로 베이징의 마오쩌뚱을 방문했다. 5월 13일 김일성의 방문을 받은 마오는 남침 전쟁이 시기 상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스탈린의 승인을 확인한 후 김일성의 남침 구상에 동의했다. 일단 동의한 이상 내키지는 않지만 마오는 적극적으로 북한을 돕겠다고 생각했다. 중국은 중국공산군 소속 한인 병사들을 북한으로 보냈는데, 이들은 남한 침공의 주축이었던 제5, 제6, 제12사단의 핵심이 되었다. 북한이 남침할 당시 전체 병력의 약 3분지 1 정도가 중국 등지에서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는 병사들이었다.

 

 

남.북한 군사력 불균형

북한이 전쟁을 도발할 당시, 북한군의 군사력은 신생국으로서는 막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김일성은 1945년 12월 북한을 남한 적화를 위한 '민주 기지'로 건설해야 한다고 선언한 직후부터 북한의 군수산업 육성을 추진, 일본 제국주의가 북한 전역에 건설했던 군수 공장을 모두 국유화하고 무기 생산에 노력을 집중했다.

 

북한은 1948년 3월 기관단총(따발총)을 자체 생산했으며, 권총, 박격포, 탄약, 포탄, 수류탄도 자체 생산할 수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만들어 놓은 군수산업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키는 무기 생산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 도발 당시 북한군의 주력 무기들은 대부분 소련으로부터 공급받은 것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무기로 소문나 있던 소련제 T-34 전차 242대, 120밀리 포 225문, 82밀리 포 1,141문 등 각종 포 3,040문, 야크-9 전투기 100대 이상, 그리고 아이엘-10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10만에 달하는 북한의 군대는 개인화기를 제외한 중장비 면에서는 거의 완벽하게 소련제로 무장했다.

 

소련에 의해 북한군이 신식으로 무장한 1950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상(국방상) 최용건은 "비행기, 탱크, 전함과 현대무기로 무장한 인민군은 어떤 전투 임무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의 적을 분쇄하기 위해 언제나 전투할 태세가 되어 있다."고 큰소리 치기도 했다.

 

반면에 한국군은 소련의 T-34전차를 공격할 수 있는 대전차 화기나 북한의 전투기를 격추할 수 있는 대공화기를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북한군은 한국군보다 곡사포는 8배, 박격포는 2.4배 더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한국군이 유일하게 북한보다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57밀리 로켓포(무반동총)였는데, 그것은 북한의 전차를 파괴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북한의 포병은 양적인 면에서 물론 질적이 면에서도 한국군을 완전히 압도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순간 한국군이 가지고 있던 가장 우수한 무기는 105밀리 곡사포 91문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176문이나 보유했던 자주포는 한 대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한국이 보유하고 있던 22대의 비행기는 모두 연락용 및 훈련용 연습기들이었고 전투기는 한 대도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반면 북한은 전체 항공기 211대 중 170대가 전투기였다.

 

 

 

 

불법 남침 전쟁의 발발

 

북한의 기습 공격

북한은 1950년 5월 29일 이미 남침 공격 계획을 완성해 놓은 상황에서 남한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평화 공세를 펼쳤다. 작전 계획 명칭은 '선제타격작전계획'으로, 원래 러시아어로 작성된 것을 극비리에 한글로 옮긴 것이었다.

 

침략 전쟁의 작전 계획은 북한군 총참모장 강건과 바실리예프 소련 군사고문단장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다. 당시 북한군 고급 장교들 중에서는 사단급 이상의 작전을 지휘해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군단급 이상의 작전 계획은 소련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의 제안에 의해 6월 16일 슈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의 최종 동의를 받은 남침 개시일은 6월 25일이었다.

 

예정대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에서 동시에 남침을 개시하였다. 같은 시각 김일성은 내각 비상회의를 개최하여 "이승만의 매국 역적 군대가 38도선 전역에서 공화국 북반부를 반대하는 무력 침공을 개시했다"고 허위 선전을 하였다. 평양 방송은 같은 날 오전 11시 "남조선이 북침했기 때문에 자위 조치로 반격을 가해 전쟁을 시작했다"는 내용의 선전포고를 하였다.

 

북한은 전쟁 전날부터 중대 발표가 있을 것이라며 북한 주민들에게 소집명령을 내려놓았다가, 전쟁을 시작하고 나서는 남한이 북침을 감행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전쟁에 나섰다고 선전하였다. 김일성이 전쟁을 도발한 그 순간부터 자신이 일으킨 전쟁이 남한의 북침에 대항하는 '방어 전쟁' 이자 '해방 전쟁'이라고 날조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약세 국군의 필사적인 저항

북한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기습에 대해 남한은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의 남침 징후 때문에 4월 21일 이후 계속되고 있었던 비상경게령도 6월 23일 자정에 오래된 데다가 농번기가 되었다는 이유로 해제하였다. 그래서 6월 24일 토요일 오전 일과를 마친 전 부대 병력은 외출과 외박을 허가했다. 6월 24일 밤 육군회관 낙성식에 참석한 전후방 부대 지휘관들은 저녁 늦게까지 파티를 계속했다.

 

서쪽 옹진 반도에서 동쪽 끝 강릉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선도하는 T-34 전차와 SU-76 자주포들이 국군의 방어 진지를 향해 돌진해오자 한국군은 이를 막을 어떠한 무기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전 전선에서 국군의 방어 진지는 돌파되기 시작하였고 국군 장병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사상자는 늘어만 갔다.

 

국군 병사들은 화염병을 들고 적 전차에 맞서거나 박격포로 전차에 대항했다. 폭탄을 등에 멘 채 육탄으로 전차를 향해 돌격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군가의 노래 가사처럼  국군은 새로운 신형 무기를 앞세워 공격해오는 적을 그야말로 '맨주먹 붉은 피'로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의 함락과 피난

전쟁이 시작된 지 단 하루 만인 6월 26일 오후 1시경 서울의 북부 관문인 의정부시가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이에 전방에서 철수한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창동을 중심으로 도봉산-수락산을 연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다.

 

다음날 27일 아침 북한군이 40여 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우고 공격을 시도하자, 방어 부대는 창동 지역을 포기하고 미아리와 태릉 일대로 철수했다. 제5사단장 이응준 소장은 미아리 일대에서 새로운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제7사단은 제5사단과 함께 정릉-미아리-청량리을 잇는 미아리 방어선을 구축했다. 도로만 잘 차단하면 적의 전차를 막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결과였다.

 

그러나 날씨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날 밤, 북한군 전차들이 미아리 삼거리에 설치해 두었던 장애물을 그대로 밀치면서 돌파하여 길음교를 통과, 서울 도심으로 진출했다. 북한군 전차가 서울 도심으로 진입한 사실을 모른 채 미아리 방어선을 지키던 국군은 다음날 28일 아침 적의 후속부대의 공격을 받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 방어의 최후 보루였던 미아리 방어선마져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국군이 서울에서 시가전을 실시하는 방안은 고려하지 않고 철수하자 북한군은 28일 아침부터 서울 도심으로 진입하여 점령하게 되었다. 미처 피난하지 못한 채 강북에 남아 있던 서울 시민들은 국군이 다시 수복하는 9월 28일까지 3개월간 공산 치하에서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국군은 북한군의 서울 이남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 철교와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켰다. 밀려오는 피난민 속에 적 침투부대가 섞여 언제 폭파장치가 해체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한강교 폭파가 실패한다면 적이 한강을 신속하게 건너 남쪽으로 진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폭파 담당 공병장교는 고심끝에 상부와 통신도 두절되었고 명령이 위임된 상태였기에 폭파를 실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이 조기폭파 문제는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 총살당하는 비극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28일 새벽 2시 30분경 한강교를 폭파한데는 조기 폭파로 시간상의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군의 전력 태반이 강북에 남아 있던 상태였고 한강 이북에서 미쳐 철수 명령을 받지 못하고 북한군과 교전 중이던 한국군의 퇴로마저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군 총병력의 약 절반이 분산되었고, 강북에 있던 중장비와 차량, 곡사포, 박격포, 기관총 등 장비와 무기들 대부분을 버린채 맨몸으로 한강을 건너 남으로 철수하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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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그 굴욕의 명칭'을 마치며...

 

 광복을 되돌아보며 해방에서 한국 전쟁 발발까지 살펴보았다.

 

우리는 광복의 기쁨을 이야기하기 전에 나라가 망한 이유와 광복후 혼란하던 우리 사회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되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나라의 망국이나 광복은 우리들의 힘으로 이루어진게 아니라 모두 남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며 우리 스스로 그러한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는 점이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사회는 백성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 결국은 나라까지 망해먹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우리는 역사의 주체자가 되지 못했고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충돌지점으로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반도에 위치한 나라이다. 지금은 남북이 서로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극단적인 대립으로 갈등의 골이 깊어가고만 있다. 북은 세습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면서 그동안 강성대국의 기치를 내걸고 핵무기 개발에 온 힘을 집중하여 왔고 지금쯤은 소형 핵무기를 개발. 보유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미국과 한국에 대해서는 능멸전술로 시간을 벌고 사방에 구걸을 하면서도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을 이양하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탈북자가 줄을 잇고 꽃재비 등 굶어 죽는 사람이 늘어나고 경제는 파탄이요  가난이 평등화되어 북한 주민들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한편 한국은 무능한 정치판이 경제를 발목잡고 좌익 세력들이 사방에 포진하여 간첩들과 공조하여 정부를 뒤흔들고 있다. 노사분규장에 어김없이 희망버스를 타고 나타나는 등 전국의 모든 갈등 지역에 제3의 세력이 선동과 선전을 일삼으며 정부와 공권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잇다. 친북.종북 세력들도 마찬가지로 그들과 합세하여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으며 사회 지도층과 권력층은 비리와 부패로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군대는 사기가 땅에 떨어졌고 부패의 도가 한계를 넘었다. 방산장비가 비리로 불량장비가 납품되었고 오작동되거나 불발되는 등 군납비리가 연일 터지고 있는 현실이다. 군은 당나라 군대가 되었고 패망한 월남 군대가 되었다. 또 그런 군대가 갈 곳도 없다. 군기지 건설에 목숨걸고 반대하고 사회 제 분야에서 썩지 않은 곳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광복 후 혼란스럽던 사회와 너무나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다.

 

군을 우습게 보고 비리와 부패가 만연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듯이 우리도 월남이 패망한 것과 같은 그 전철을 밟고 있지 않는지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