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우리들의 슬픔

우면산의 가을 20 : 대통령에 대한 기억들......

 

 

우면산의 가을 20 : 대통령에 대한 기억들......

 

 

 

                                                                                방배역 사거리                                                                            

 

새벽에 자전거로 한바퀴 돌면서 신반포 아파트를 통해 오랫만에 한강 고수부지로 나갔다. 자세한 사진은 다음에 올릴 예정이다. 동호대교까지 갔다가 다시 여의도쪽으로 올라오면서 자전거를 처음 사서 타고 나갔던 작년 여름이 떠오른다. 헬멧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기억이 나고 멋만 내려던 나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지금도 자전거를 타면서 헬멧을 쓰지 않고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자넉거 교통사고가 증가하고 있는 요즘 안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경광등과 헬멧을 쓰도록 권장하고 싶다. 한강 고수부지에 나가면 자전거 도로가 잘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신이나서 빨리 달리다보면 더 빨리 달리고 싶어진다. 내 자전거는 속도를 내고 싶어도 그리 빨리 달리지 못하는 싸구려 자전거다. 그래도 가속이 붙으면 빠르다. 그러다가 넘어지거나 부딪히면 머리를 다치기 쉽기 때문에 빨리 달리지도 않지만 헬멧은 반드시 쓰고 다닌다.

 

 

블로그에 고려의 역사를 올리면서 KBS 드라마 '태조 왕건'과 '무인시대'를 다시보기로 보면서 실록을 읽다보니 실감도 나고 재미도 있고 이해도 쉬운 장점이 있다. 이미 방영된 여러 역사 사극을 다시보기로 보는 것은 역사를 알고 관심을 갖고 있다면 그 당시 그 인물이 왜 그런 길을 선택하게 되었는지를 다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를 잘 모르니 그냥 흥미위주로 재미로 보고 작가가 조작된 이야기로 상황을 연출해도 시청자들은 그 작가의 허구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일반 대중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쓰여진 모든 역사서들도 마찬가지로 승자에 의해 쓰여진 역사라 그 진실성은 알 수가 없다. 그냥 기록된 대로 인정하고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로등과 새벽달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통리 고려를 세웠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줄 수가 있다. 배형경, 신숭겸 등 개국 공신 4인방에 의해 고무된 왕건이 궁예를 제거하고 견훤과 지루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기면서도 그의 특유의 친화력과 포용력을 발휘하여 견훤을 끌어안게 되자 후백제는 저절로 멸망의 길을 가게 되어 통일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왕건은 그의 조상이 당왕실과 혈연관계를 내세우는 등 그에 대한 여러가지 조작된 이야기들이 많으나 그것은 나라를 세운 당위성을 내세우기 위해 후손들이 역사를 조작하였을 것이다. 태조는 호족들의 힘을 무시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과 연합하여 세운 나라로 정략결혼으로 29명의 후비를 두는 등 통일 고려의 기초를 다지는 데 그쳤다.

 

호족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강했던 고려 초기, 태조의 아들 왕자 무가 등극하였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혜종은 즉위 후 계속되는 호족들의 왕권 위협에 시달리다가 죽음이 임박해지자 개경파와 서경파의 정권다툼 속에서 호족들의 힘에 의해 정종이 등극하게 된다. 정종은 짧은 치세를 마감하고 죽게 되자 그의 동생 광종이 호족들의 옹립으로 왕위를 있게 도니 그가 광종이다. 광종은 즉위하자마자 7년 동안 몸을 낮추고 지내면서 호족들에 대한 반격의 기회를 엿보게 되는데 7년이 지난 후 어느 정도 발언권이 강화되었다고 판단되자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과감한 개혁작업에 돌입하게 되면서 호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중앙집권화를 꿰하게 된다. 그래서 후주에서 건너온 쌍기에 의해 '노비안건법'과 '과거제'를 도입하여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화와 왕권강화에 반기를 드는 수많은 호족들을 도륙하면서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실시한다. 그래서 심지어 혜종과 정종의 아들까지 목숨을 빼앗는 잔인함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광종의 과감한 개혁정책은 결과적으로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왕구너을 안정시키는 역활을 하엿으며 과거제를 통해 신진 세력을 대거 등용함으로써 정치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켯으며, 문화적으로도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발전을 일궤냈다.

 

국방 분야에서도 북방으로 여진족이 머물고 잇던 지역을 평정하여 영토를 넓혔고, 여진과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제를 정비하고 병력을 증강시켰다.

 

하지만 그는 개혁 과정에서 중국에서 귀화해온 세력들에게 너무 많은 힘을 실어주어 내국 관료들의 반발을 쌌으며, 역모에 대한 두려움으로 왕족, 신하 등을 무차별하게 살상하는 폐단을 낳았다.

 

과감한 개혁정책을 통해 스스로 황제로 칭하며 고려의 위상을 높였고, 때로는 중원의 연호를 사용하며 외교적 이익을 노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도 975년 5월 치세 26년 2개월 만인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피로 범벅된 개혁 정책도 그의 아들 경종이 즉위하면서 물거품이 된다. 광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자 모든 정책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노비들이 다시 노비로 전럭하고 호족들에 의해 '복수법'이 제정되어 억울한 죽음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전을 치르는 웃지못할 상황이 전개된다.

 

이렇세 역사는 돌고도는 모양이다. 시행착오와 오류를 반복하고 개혁이 용두사미가 되고  그러니 사이 백성들은 고통스럽게 살 수밖에 없고 지도층은 사치와 향략에 빠져 권력 싸움에 세월을 보내는게 대부분이었다.

 

 

 

 

                                                                                    어느 아파트 후분

 

우리는 여러 대통령을 지도자로 만났지만 그리 아름다운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꼭 고려 무신시대 정권을 탈취를 하는 모습처럼 반복되었고, 한 번 권력을 잡으면 자손만대까지 갈 요량으로 갖가지 묘책을 강구하면서 백성들을 수탈하고 탄압하였으며 그들끼리는 호의호식을 즐기며 권력을 향유하려고 했다.

 

이승만은 초대 창업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탄생시켰으나 6.25전쟁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고 미국의 군원물자로 근근히 연명하면서도 권력투쟁과 파벌싸움으로 점철되면서 자유당 장기집권을 시도하려다가 결국 4.19 혁명으로 하와이로 망명하는 비운의 대통령이 되었고, 윤보선은 무능하여 극심한 국가혼란사태가 초래되어 결국 5.16 군사혁명으로 쫓겨났으며, 혁명 정부를 세우고 집권한 박정희는 경제개발, 월남파병 등 과감한 개발독재와 군사독재로 가난에서 벗어나 경제대국으로 가는 초석을 마련한 대통령이었으나 유신체제로 장기집권을 획책하다가 부하 김재규에게 암살되었고, 전두환은 중정부장 김재규의 박대통령 암살이라는 국가적 대혼란과 위기를 극복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강압통치로 5.18을 유발하였고, 노태우는 올림픽 개최 등 전두환의 후광이 힘입어 우유뷰단한 통치를 펼치다가 결국 6월 항쟁에 항복한 대통령으로 결국에는 두 사람 모두 청문회와 비지금 조성으로 법정에 섰고 갖가지 묘욕을 다 당한 불행한 대통령이었다. 김영삼은 실명제를 실시하고, 군 하나회 숙청 등 군부통치를 종식시키고 남북 정상회담까지 성사될 예정이었으나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허사가 되면서 아들을 포함하여 각종 비리에 연루되는 등 물의를 야기하다가 결국 98년 국가부도사태를 맞는 불행한 대통령이 되었고, 김대중은 햋빛정책으로 북의 문호를 개방시키고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평화체제를 구축하려 하였으나 북에만 이용당하는 꼴이 되었고 거액을 사용하고 퍼준 댓가로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평화상을 받는 한편 군부독재를 청산한 대통령으로, 노무현은 개혁을 시도하려하였으나 이념투쟁으로 세월을 낭비하였고 결국 비리에 연루되어 고향집 뒷산 부엉이 바위 위에서 자살한 비운의 대통령이 되었다.

 

왜 우리들의 대통령들은 이처럼 모두 불행하고 비운의 대통령만 나올까? 그것은 우리들이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일요일 아침, 환경미화원 아저씨

 

 

 

대통령에 대한 기억

 

노무현은 개혁을 외치며 한국 사회 주류세력에 맞서다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을 당했던 대통령이다. 김대중은 햇볕정책으로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을 한 대통령이다. 김영삼은 오랜 군사정권을 끝냈고, 하나회를 척결했고, 금융실명제를 도입했지만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가져온 대통령이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세 대통령은 그렇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내 기억은 훨씬 단순해진다. 전두환은 ‘쿠데타 대통령’이고, 노태우는 민주화 물결에 굴복한 ‘6·29 대통령’이다.

기억은 이런 것이다. 다섯 대통령이 재임할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결국 이런 한 줄짜리 기억으로 남는다. 이 한 줄은 그들에 대한 최종 평가가 된다. 여론의 경중을 가려 중요한 것을 걸러내는 언론의 기능을 ‘게이트키핑(gatekeeping)’이라 하는데, 사람의 기억만큼 단순하면서 냉정한 게이트키핑이 없다. 개개인의 이런 기억은 역사적 평가로 수렴되고 그 과정에 해당 권력자가 개입할 틈이 없기에 무섭다.

내 경우 한 줄로 요약하기 어려운 대통령은 박정희가 유일하다. 쿠데타 대통령으로 기억하자니 경제성장이 떠오르고, 산업화 대통령으로 정리하자니 그는 분명 민주화에 거스른 독재자였다. 역대 대통령이 다 공과(功過)를 갖고 있지만, 유독 박정희에 대한 기억이 복잡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대통령을 너무 오래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대통령에겐 그런 프리미엄이 없다. 주어진 시간은 5년뿐이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남은 건 1년 반이다.

5년 뒤, 10년 뒤 이 대통령은 어떤 한 줄로 기억될까? 대통령에 대한 기억은 주로 그에게 보냈던 기대를 반영한다. 노무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혁을 외쳤던 사람이다. 뭔가 바뀌리라 기대한 사람들이 표를 던져 대통령에 당선됐고, 그 기대에 부응하려는 노력과 기존 질서가 충돌한 사건이 탄핵이었기에 그의 ‘한 줄’은 탄핵 대통령이다. 김대중이 ‘IMF 위기를 극복한 대통령’ 대신 ‘남북 정상회담을 한 대통령’으로 기억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이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2위 정동영 후보에게 더블스코어에 가까운 표차로 압승을 거뒀다. 새 대통령에게 거는 사람들의 기대가 비교적 일치했다는 뜻이며, 그것은 ‘경제 대통령’이었다. 선거 과정에 제기됐던 여러 문제는 ‘성공한 CEO(최고경영자)였으니 경제만큼은 잘하겠지’란 기대에 모두 묻혔다. 취임 후 지지율 그래프도 유독 경제 상황과 밀접하게 연동돼 움직여왔다. 그렇다면 답은 자명하다. 이 대통령을 기억하는 ‘한 줄’은 경제와 관련된 평가일 것이다.

이런 ‘경제 대통령’이 공교롭게 재임 중 두 번이나 경제위기를 맞았다. 2008년 위기는 비교적 잘 넘겼고, 그래서 임기 4년차를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높은 40% 후반의 지지율로 시작했다. 지금 두 번째 위기는 2008년보다 상황이 나쁘다. 대응수단이 제한적이고, 국제공조도 원활치 않다. 국정 장악력이 약해지는 임기 후반인 데다 측근 비리마저 터져 레임덕 얘기가 시작됐다.

당연히 지지율은 바닥을 향해 가고 있다. 청와대는 돌파구를 찾고 있을 터이다. 남북 정상회담 같은 대형 이벤트에 손이 갈 때다. 국정 동력을 유지하려 파격적인 어젠다를 구상 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뭘 내놓든 이 대통령은 ‘경제를…한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다.

측근 비리, 서울시장 선거, 남북 정상회담, 이런 건 어쩌면 ‘대세’에 크게 지장 없는 곁가지다. 남은 1년 반은 무조건 경제 회복에 매달려야 할 시기다. 그래야 ‘경제위기 두 번 극복한 대통령’으로 기억에 남을 수 있다.

태원준 정치부 차장

 

 

                                                                                    서울 청계천

 

이 대통령 사저 구입과 1% 부자들의 탐욕

 

이명박 대통령이 사저용으로 사들인 수십억 대 부동산을 둘러싼 논란이 전개된 10일 미국과 유럽에서 ‘기업가의 탐욕’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기업가 출신 대통령으로 재산 형성과정에 대한 논란이 자심했고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조치까지 취했었다. 그런 그가 퇴임 후 거처할 부동산을 시쳇말로 생뚱맞은 방식으로 구입해 국회와 시민사회에서 갖가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많다는 것은 비판받을 일이 아니라는 논리가 우세했지만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미국 유럽 등지에서 ‘1% 기업가의 탐욕’에 대한 규탄과 분노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1930년대 대공황이후 최악의 상황을 우려하거나,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와 관계없는 이야기인가?

이 대통령의 사저 구입 논란이 제기된 날 국내에서는 조 단위 부호의 숫자가 늘어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88만원 세대가 수백만 명이며 양극화가 심화된다는 참담한 현실과, 천문학적인 재산을 지닌 부유층 증가에 대한 소식은 큰 대비를 이룬다.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 14배나 많은 국민의 세금이 들어간다는 이 대통령 사저 관련 뉴스도, 유권자인 서민의 갖가지 고통에 대한 뉴스와 엇박자를 이룬다. 최근의 안철수 현상은 정치권이 유권자를 외면한 짓을 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확인된 상황이다. 미국 등지의 자본 권력에 대한 규탄, 시정 요구가 커지는 것과 한국에서 정치를 똑 바로 하라는 요구는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대통령의 사저 구입 행태는 크게 잘못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부동산을 구입한 특성에서 연상되는 속담이 있다. ‘제 버릇 개 못준다’가 그것이다. 이 속담의 의미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 대통령이 기업 CEO 출신인 탓인지 부동산 투기, BBK 등을 둘러싼 의혹이 컸고 그것을 희석시키기 위해 자신의 재산 수백억 원을 사회에 환원하는 노력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사저를 구입하는 방식은 부동산 투기꾼들이 흔히 하는 방식과 닮았다는 비판을 자초한다.

대통령 부부가 아들 이시형씨 명의로 사저 부지를 매입한 투명치 못한 방식이 동원되면서 부동산 투기, 증여세 탈루, 부동산거래실명제법 위반 논란이 일고 있다. 정치권은 벌집을 쑤신 듯하다. 이런 논란을 예상치 못했다면, 여권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이 대통령의 부동산 관련 지식이나 경력에 대해 과거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청와대가 실무를 맡았다는 이번 일은 이 대통령 부부는 물론 아들까지 관련이 된 것으로 보아 이 대통령이 직접 챙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이런 추정이 사실이라면 사람은 자기 주특기대로 살아간다는 논리가 더욱 힘을 얻게 된다.

이명박 정부 들어 고위 공직자 청문회에서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 탈세 등의 문제 제기가 끊이지 않았다. 과거 정부의 공직자 윤리기준보다 너무 후퇴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줄기차게 제기되었지만 이 대통령은 최근까지 ‘털어서 먼지 나는 인사’들을 연이어 고위 공직자로 추천해왔다. 국민의 청렴한 공직자 요구를 짓밟는 대통령의 모습은 자신의 사저 구입에서 확인된 불투명한 방식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공직 사회 부정부패가 자심해졌으며 특히 낙하산 인사가 우글대는 금융기관 등에서 부정부패가 만연하다는 기사가 최근 줄을 잇는다. 이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속담을 떠오르게 한다. 대통령이 CE0 시절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각종 의혹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보통사람이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할 범죄를 저지른 고위층이 처벌은커녕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본 공직사회의 도덕적 환경이 어떨 것인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못해먹는 놈이 바보라는 탁한 논리로 자욱한 것 아닌가?

 

 

                                                 우리 동내 간판은 레스토랑이지만 술집이다, 주택가로 파고들고 있다.

 

고려 무인시대를 보자

최충헌이 죽자 그의 맏아들 최이가 교정별감에 올라 권력을 이양받았다. 최충헌은 원래 상장군 송청의 딸이게 장가들어 최이와 최향을 낳았고, 손홍윤을 죽이고 빼앗아온 여자인 임씨에게서 최성을 낳았으며, 강종의 서녀 왕씨에게서 최구를 낳았다.

 

이들 4명의 아들 중에서 이와 향이 권좌를 넘보고 있었다. 따라서 최충헌이 죽고 난 다음 이 두 형제간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최충헌은 병상에 눕자 형제지간에 다툼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곁에서 자신을 돌보고 있던 맏아들 최이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때부터 최이는 병을 핑계삼아 아버지를 찿지 않았고, 다만 측근 김약전을 보내 최충헌의 병시중을 들게 하였다.

 

그 무렵 최향 쪽에서는 최이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잇었다. 쵳우헌의 측근들 중에 최이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대장군 최문준, 상장군 지윤심, 장군 송유절, 낭장 김덕명 등은 촤충헌이 죽고 나면 최이로부터 보복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최향을 후게자로 올립하려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최이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최충헌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거짓으로 통보하여 최이를 유인하엿다. 그러나 최이는 그 말을 의심하고 가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몇 차례 더 최이에게 최충헌이 찿는다고 말했고, 그 때문에 최이는 그들을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음모가 탄로난 것으로 판단한 김덕명은 최이에게 모의 내용을 고발하였다. 이에 최이는 김덕명을 자기 집에 숨겨 놓앗는데, 다시금 최준문과 지윤심이 찿아와 최충헌이 급히 찿고 있다고 전언하였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이는 그 두 사람을 체포하고, 유송절도 잡아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들 세 명을 뷰배하고, 최향과 최향의 장인, 처남, 노비 등도 유배시켰다.

 

그 며칠 후 최충헌이 죽자 최이는 교정별감에 올라 고려 최고의 권좌를 이어 받았다. 

 

 

 

                         

 

 

최이의 초명은 우이며, 아버지 최충헌을 도와 최씨 가문의 권력 유지에 많은 역활을 했다. 최충헌이 죽을 당시에는 벼슬이 추밀원부사에 올라 있었으며, 최충헌이 병상에 누운 후부터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1219년 교정별감에 오른 후에는 최충헌이 불법으로 빼앗은 전답과 노비들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엇으며, 최충헌이 저장하고 있던 많은 보물들을 고종에게 바쳤다. 또한 한림에 많은 선비들을 등용하여 무신정권 성립 이후 가장 많은 문신들을 배출하는 등 인망을 얻기에 많은 노력하였다.

 

이 무렵 최향은 유배지 홍주에서 큰 저택을 짓기 위해 대대적인 건축공사를 벌였다. 최이와 홍주 수령이 이를 금지시켰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또 주변 무뢰배들을 모아 반란을 홱책하고 부사 윤문거와 법조 이종, 판관 전량재 등을 살해하였다.

 

최향의 행패가 이렇듯 극심하였지만 주변 관리들은 그의 위세에 눌려 어떤 조치도 강구하지 못했다. 이에 최향은 더욱 기세가 등등해져 유배된 유송절과 자신의 측근인 김수영, 박문자 등을 홍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근방 수령들에게 격문을 보내 군사를 내어 자신을 응원할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수하들을 시켜 관가 창고를 열고 좁쌀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향의 수하들과 관원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고, 중앙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병마사 채송년과 지병마사 왕유, 부사 김의렬로 하여금 최향 무리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관군이 동원되어 토벌작전을 벌이자 최향은 수하들을 이끌고 근처 북산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고을 사람들이 병정들을 데리고 그들을 포위했다. 그러자 최항의 수하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최향은 바위에서 떨어져 동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때 병정들이 동굴 속을 수색하자 칼로 제 목을 찌르고 죽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나 병정들이 이를 눈치채고 달려들어 그를 포박하여 옥에 가둬 놓았더니 얼마 뒤에 죽어 버렸다.

 

그가 죽은 후 안찰사 전의는 김수영, 박문자 등을 체포하고 각처에 공문을 보내 유송절과 긔 무리들을 체포하여 모두 사형시켰다.

 

최이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으며, 저의를 시켜 잔당들을체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전의는 최이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산, 결성, 여양, 대흥 등 일곱 고을의 현감들을 처음에는 최향과 공모하였다가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자신들의 죄를 면하기 위해 격문을 돌린 자를 체포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이에 일곱 고을 현감들이 모두 사형에 처하여 졌고 홍주에서 조금이라도 최향과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은 모조리 붙잡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