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면산의 여름 48 : 광복! 그 굴욕의 명칭 10
소련의 적극적인 군사 지원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소련은 유럽에서의 공산세력 확대에 주력하는 한편, 아시아에 있어서는 중공이 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장악할 때까지 조용히 정세를 관망하면서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위한 시기의 성숙을 기다린다는 전략을 수립하고 있었다.
소련의 북한 진주는 시초부터 한반도에서 당분간 남북한의 분단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우선 38도선 이북에 장차 한반도의 적화통일과 남진정책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한 강력한 군사기지를 확보하고, 시기가 성숙할 때까지 전력을 비축하려는 공산기지화 정책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소련의 북한 점령정책은 1945년 8월 이후 북한지역에서의 소련식 공산정권의 토착화를 위한 김일성 중심의 체제 형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소련은 북한으로 진주하자마자, 곧 북한 내 민족계열의 인사를 숙청한 다음 1946년 2월 8일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2년 후인 1948년 2월 8일에는 최신 소련장비로 무장한 인민군을 창설하는 등 적화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체제와 무력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소련은 이미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을 때부터 스티코프 소련대표를 통하여 제기해온 미·소 양군의 한반도 철수 문제를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이는 가급적이면 빠른 시일 내에 미군을 한반도로부터 철수시킴으로써 남한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감소시켜 힘의 불균형을 조성한 후 한반도를 공산화시키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었다.
1948년 9월 12일 북한은 최고인민위원회의 간부회의에서 남북한 점령군의 조속한 동시철수를 촉구하는 호소문을 채택하여 미국과 소련측에 각각 발송함으로써 소련측의 철수 주장에 명분을 실어 주었다.
1949년 8월 소련의 원자폭탄 실험과 10월의 중국대륙의 공산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 진영의 한반도를 둘러싼 극동지역의 역할관계에 일대 전기를 맞게 하였다. 소련의 핵 실험 성공과 중공정권의 등장으로 공산세력은 극동에서 새로운 팽창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으며, 이는 아시아에서의 미·소 대립에서 소련의 지위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와 같은 호기를 이용하여 북한정권 수립이후 북한군의 근대화 및 전력보강 작업에 착수하였던 소련의 스탈린은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과 함께 회의를 개최하고 북한군의 전력화를 구체화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950년 4월 또다시 비밀리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과 함께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공모하였다.
미국의 소극적인 군사 지원
동북아 정세에 많은 역사적 파장을 던진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발표한 미국의 극동방위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방안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한반도가 특정한 단일국가의 독점적인 지배하에 들어갈 경우 정치적으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우려하여 한반도에 대한 연합국의 공동작전과 신탁통치 문제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포츠담회담 훨씬 이전부터 싹트기 시작한 미·소간의 대립적 관계는 신탁통치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였으며, 신탁통치안은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간의 대립을 표면화하는 직접적 계기가 되고 말았다.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정책은 1947년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과 중국 대륙의 국공간의 사태발전을 계기로, 미국이 한국문제와 더불어 동북아 지역의 전반적인 상황으로 재검토하면서부터 더욱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종전 후 급속한 감국과 국방예산의 감축으로 지상병력의 부족을 나타내게 된 미국은 1947년 5월부터 주한미군의 철수를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미군 철수(1949년 6월)후 날로 심화되어 가는 남·북한간의 군사적인 불균형과 북한의 남침 징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오히려 남한의 북침 가능성을 우려하여 한국군의 증강과 군사 원조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미국은 방어를 위한 최소한도의 군원인 육군 병력 6만 5천 명을 기준으로 한 소요장비와 소수의 해군함정을 제공하는 데 그쳤다. 이는 북한의 군사력을 현저하게 증강시킨 소련의 군사정책과는 대조적이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에 있어서도 소련이나 북한이 남한의 내부적인 혼란을 틈타 간접적으로 침투나 교란활동은 벌일 수 있을 것이나 전면적인 무력침공은 일으키지 못할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다. 더욱이 미국은 중국문제에 대한 불간섭 원칙을 계속 견지하면서 일본열도를 미국의 전략적 방위선으로 하여 공산세력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중국문제에 대한 불간섭과 일본열도의 확보라는 전략개념 하에 설정되었던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미 국무장관에 의한 미국의 태평양방위선 선언에 의하여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 선언에서 미국은 알래스카-알류산 열도-오끼나와-류큐-필리핀을 연결하는 태평양방위선의 확보가 미국의 안전에 필수적임을 밝힘으로써, 이때 한국은 미국의 전략적인 극동지역 방어선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이때 미국은 이때에 태평양방위선 외곽지역에 대한 침공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이에 대한 유엔의 지원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음으로써 미국이 필요할 때 참여할 수 있는 융통성을 두고 있었다.
남.북한의 정세
남·북한의 정세는 여러 측면에서 상호 상반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소련의 비호 하에 실권을 장악한 공산당이 북한 사회를 철저하게 공산조직으로 체계화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남한에서는 미국이 공산주의 활동마저 용인함으로써 정국이 좌우로 분열되었고 공산분자들의 잇단 폭동사건으로 민심의 동요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북한은 정권수립 후부터 모든 북한 주민들에게 한반도의 적화통일 사상을 주입시켜 전쟁을 준비하는 데 급급하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모든 산업을 국유화하여 비교적 튼튼한 산업구조를 바탕으로 산업시설을 복구하고 생산을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며, 1948년부터는 2개년 경제계획에 착수하여 산업중산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남침에 필요한 준비에 주력하였다.
남한은 미국이 현실을 외면한 채 민주주의의 이상만을 내세워 정책을 추진한 결과 여러 방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이 주동이 된 제주 4.3사건과 여순 10.19사건 등으로 사회 혼란을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화폐 발행고가 불과 2년여 만에 7배로 증가하고 산업분야도 크게 위축되어 거의 방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물가는 3년 동안 무려 33배나 폭등하여 국민들의 생활고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냉전으로 인한 세계의 블록화
이 같이 남·북한간에 정치와 경제면에서 격심한 이질성과 격차를 나타내고 있는 가운데, 1948년 말경부터 북한에서는 군사력 증강작업에 착수하였으며 이때부터 북한은 소련제 탱크와 기계화 부대를 중점적으로 편성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1949년 초부터 수시로 38도선 일대의 국군의 진지를 공격하여 탐색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이 대규모의 무력남침을 자행할 수 있을 정도로 군사력이 증강된 것은 1949년 여름이 지나서였다. 북한군의 전력이 현저히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1949년 7월∼8월 경 소련장비들이 대규모로 밀반입되기 시작하고 또 중국대륙으로부터 5만 명에 가까운 중공군 출실 한인들이 귀환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와 같이 날로 심화되어 가는 남북한 군사력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군사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한국군의 현대화와 군사력 증강의 요구에 대해서는 매우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미국은 오히려 한국의 북침 가능성을 우려하여 군사원조에도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 미국은 육군병력 6만 5천 명을 기준으로 한 소요장비와 소수의 해군함정을 한국에 지원하였으며, 이 외에 약 479명으로 구성된 미 군사고문단을 설치하였을 뿐이었다. 따라서 이때의 한국군은 현대전 수행을 위하여 필수장비인 전차나 대전차무기조차도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한국군은 1948년 말 이후 각처에서 준동하고 있던 공비를 토벌하기 위하여 많은 병력을 전국에 분산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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