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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우리들의 슬픔

우면산의 여름 45 : 광복! 그 굴욕의 명칭 7

 

 

우면산의 여름 45 : 광복! 그 굴욕의 명칭 7

 

 

                                                                                    새벽 하늘

 

처서가 지났건만 날씨는 낮에는 물론이거니와 저녁이면 폭폭찌는 찜통이다. 입이 삐뚤어진다는 모기도 사라질 것 같지만 밤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모기 때문에 마누라가 투정을 부리면서 내 방을 찿아와서 모기를 잡아달란다. 방에는 벌레잡는 등도 켜저 있고 모기향, 모기채, 모기전기제품 등 다양한 장비들이 구비되어 있지만 게을러서 그것도 잘 켜지 않으니 작은 모기가 발부분을 집중적으로 달려든 모양이다. 중국산 모기채를 휘두르고 전기모기향을 피우고 몇 마리 잡으면 그냥 또 잔다. 음식물 찌꺼기통에는 날파리들이 가끔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날아다닌다. 음식물 찌꺼기 자체에 날파리 알이 잠복하고 있고 특히 바나나 같은 당분이 많은 찌꺼기에는 어김없이 날파리가 생긴다. 모기채로 잡으면 '타다딱' 하면서 벌레가 타는 소리가 요란하다. 소리가 나면 모기가 잡힌 줄 알고 다시 잠을 자는 마누라가 나 때문에 행복한 줄이나 알런지 모르겠다.  

 

혹시 자연을 사랑하는 제주 희망버스 죄파들이나 개발을 무조건 저지하면서 기업체, 공사현장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협박과 공갈로 돈을 뜯으며 불로소득을 챙기는 비리와 부패로 가득찬 각종 환경단체 파렴치 족들이 모기잡는 이 글을 보면 항의가 들어올지도 모르겠다. 농작물이 멧돼지 등 야생 동물들에게 다 망가져도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람들, 동물을 사랑한다면서 골목길 고양이들에게 음식을 내다 주고는 각종 고기와 소주에 회식하고 골목길을 청소도 하지 않는 사람들, 해양으로 뻗어나가지 않으면 앞날을 장담하기 힘든 이 나라가 대양해군을 위한 기지를 건설하는 데 반기를 들며 자연을 파괴하지 말고 분쟁지역으로 만들지 말자며 경찰을 능멸하고 해군 장병에게 욕설과 손찌검, 발로차며 농성을 벌이는 좌파 간첩과 그 하수인들, 그리고 뭣도 모르면서 앞장서서 선봉대 역활을 자처하는 광신도 같은 행동대원들,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날아가는 희망비행기에 탑승하려는 친공.친북.종북 단체들, 서울 도심 곳곳에 희망버스로 몰려들어 극심한 데모를 벌이는 좌익 분자들 모두가 같은 대한민국을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북한 김씨 세습왕조의 하수인이 되어 북한 인권탄압에는 침묵하며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하여 북의 지령에 따라 한국 사회를 갈등의 심연으로 몰고가 한국전쟁 직전의 혼란한 상황으로 만드는 게 그들의 꿈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종국에는 한국 정부와 군부의 무력화와 정치.사회적으로는 남남갈등을 부추겨 북에게 적화통일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민족과 민주, 국민과 인권, 평화와 자주, 약자의 대변인, 미군 철수와 군대의 무력화를 추구하여  종국에는 좌파정부의 수립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민족, 민주, 국민, 인권, 평화, 자주를 존중하지 않는다. 모두가 감언이설이요 혹세무민이다. 오로지 정권탈취가 그들 공산사회주의의 최종 목표이며 그런 후에 북한처럼 일당독재와 세습왕조를 추구하며 공산지배층의 호의호식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다.

 

역사를 보아도 창업의 공신들이나 앞잡이들은 대부분 모두 숙청되었다. 가까이는 해방후 그토록 남한 사회를 혼란으로 몰고 갔던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숙청되는 것이나, 소련파와 팔로군 출신들이 숙청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국 전한 창업 황제 유방은 한나라를 세운 후에 창업 공신이었던 한신과 팽월을 숙청했고, 스탈린, 모택동은 공산주의와 자신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수천 만명을 살해했던 살인마들이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고급관료가 총살형을 당하고 있고 수용소에는 수많은 주민들이 소리없이 잡혀가 사라지거나 수용소 토굴속에서 노예처럼 갇혀 있다 죽어가고 있다. 탈북자가 나날이  늘어나고 압록강, 두만강를 건너가 만주 땅에서 개.돼지처럼 몸을 팔며 한족 첩이나 성노리개로 빌붙어  숨어 살고 있거나, 만주와 중국 곳곳에 유랑하며 거지처럼 살아가는 탈북자들이 수도 없이 많이 숨어 살고 있다. 북한 전역에는 꽃제비들이 걸식과 유랑하다 들판에서 굶어 죽고, 국경 장터에서는 떨어진 낱알과 음식찌꺼기를 줏어 먹는 어린이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어린이들과 노인들, 너희들은 그것이 지상천국이며  은혜로운 수령님의 나라냐?

 

반부패 전도사처럼 행세하며 진보진영의 기수이던 곽노현 교육감이 지난 선거에서 후보단일화를 위해 야권 후보로 나섰던 박명기 서울대 교수에게 비밀막후 협상 후 사퇴의 댓가로 7억원의 뒷돈과 교육발전 자문위원장 자리를 주겠다며 약속하고 단일화를 획책하고 난 다음 선거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그런 후에  나중에는 돈을 주지 않자 항의하며 녹취록을 공개하려 하자 그제서야 돈을 건넸던 파렴치한이다. 그러나 지난 8.24 서울시 무상급식 투표에서 이긴 것에 대한 표적 수사라며 대가성을 부인하고  희생양이라며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사실이 드러나자 침묵하면서 자신의 처신을 저울질 하고 있다. 검찰 수사 결과를 지켜 볼 일이지만, 좌파들은 이처럼 이중적이며 표리부동하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불법을 서슴치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양 세인들을 현혹시키면서 권력 탈취후에는 돌변하는 것이 그들의 통상적인 수법이며 언행이고 태도이다.

 

 

                                                                 차 위의 고양이, 간첩은 당신의 곁에서 저처럼 노려보고 있다.

 

 

좌익, 친공, 친북, 종북 좌파 세력들이 준동하는 모습을 보면 꼭 해방 후 정국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암담한 마음에 다시 광복 후 이 나라 실정을 파헤쳐본다.

광복, 그 굴욕의 명칭은 계속된다.

 

미군정의 좌우합작 실패

미군정은 냉전이 본격화되기 전까지는 미소공동위원화를 통해 소련과의 합의를 이끌어내고 좌우합작을 통해 얄타 체제 및 모스크바 협정에 따라 한반도 문제를 해결한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신탁통치를 극렬히 반대하는 이승만, 김구의 우파나 불법 폭동을 일삼는 박헌영의 좌파를 배제시켰다. 그리고는 독립촉성회 부의장이던 김규식과 인민공화국 부주석이던 여운형과 같은 중도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 세력을 내세워 소련과 협상하려 하였다.

 

그러나 전국민적으로 신탁통치 반대 열기가 거셌고, 이승만,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 계열의 결집력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미군정의 좌우합작 노력은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다. 그리고 여운형의 중도좌파조차도 소련의 지시를 받는 박헌영의 공산당으로부터 배제되어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미군정의 뜻과 달리 좌우합작위원회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 과정에서 미군정은 정식으로 독립정부를 구성하기 이전에 과도적인 입법기구를 설치하였다. 과도입법의원은 민선 대표 및 관선 대표 9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것은 독립에 대비하여 남한 지역에서 국민들의 의사를 수렴하고 정치 참여를 확대시킴으로써 민주주의 경험을 쌓기 위한 것이엇다.

 

과도입법의원이야말로 성인 모두가 참여하여 리 단위에서 대표를 선출하고, 그 대표가 입법의원을 간접 선출하는 민주적 방식으로 이루어진 대의기구였다. 이처럼 국민의 민의를 물어본 최초의 선거 결과는 이승만 중심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17명, 한국민주당이 14명 등으로 제1, 제2당이 되었다. 민선 당선자의 대부분이 민족 진영의 우익 인사였다. 미군정이 암묵적으로 후원한 좌우합작위원회는 많은 후보를 냈지만, 당선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위원회의 실패에 이어 과도입법의원에서도 민족 진영이 승리하자, 미군정은 더 이상 소련과의 합의에 의한 통일 정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자유.민족 세력의 건국운동

반탁을 통해 즉각적인 독립정부를 구성하자는 데에는 민족 진영의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독립정부를 우선 남한만이라도 구성할 것이냐, 아니면 북한까지 참여하는 정부를 추진할 것이냐를 두고 민족 진영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신탁통치 반대라는 데는 공동전선이 이루어왔지만, 소련의 영향을 받은 북한을 포함시킬 수 있느냐를 두고 의견을 달리하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소련의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남북 총선거는 실제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하자고 하였다. 그렇지만 김구, 김규식은 이를 끝내 거부하고 김일성과 회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김구를 비롯한 남북협상파는 이미 남한에서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가 준비되던 1948년 4월,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으로 올라가 김일성을 만나 담판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남북협상이라는 회담 자체부터가 김일성의 남한 사회 분열책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김구, 김규식은 남한에서 진행되고 있던 제헌의회 선거에 대한 거부와 미군 철수 등에 관한 결의 등에 찬동하는 등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에게 끌려다니다가, 본격적인 회담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채 국민들의 비난 속에 내려와야 햇다.

 

게다가  남한으로 송전을 계속하겠다던 북한이 약속과 달리 5월 14일부터 전기 공급마저 중단하고 말았다. 전국적 전력 생산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북한으로부터 갑작스런 전기 공급이 차단됨에 따라 남한 경제는 마비되었다. 그에 따라 남한은 미국이 제공한 발전용 선박에서 공급받는 전기를 통해 겨우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남북협상이 실패하고 대한민국 건국 움직임이 강화됨에 따라 김구, 김규식은 정국의 주도권을 잃고 말았다.

 

 

 

미군정 시기와 한국 사회의 변화

 

미군정의 성격

한국이 해방되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인의 영웅적인 민족임을 치겨세우면서 높이 평가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독립국가의 기능과 책임은 한국인 스스로 담당하게 될 것임을 천명했다.

 

미군정은 일본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이 주도하는 극동군 사령부 산하의 존 하지 장군이 이끄는 미 제24군이 맡았다. 미군정청의 각종 정책은 미국무부의 지시를 받고 이루어졌다. 미군정은 한국에 대한 지식도 많지 않았고, 준비도 없었기 때문에 혼란스런 한국사회에서 군정을 실시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이내에 한민족이 독립국가를 구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했다. 정부 이양에 앞서 군정 업무도 가능하면 한국인 중심으로 추진해 나가자고 하였다. 1946년 9월부터 미군정은 한국인의 역활을 확대시키고, 미군정의 민정 장관에는 좌우합작 중심 인물인 안재홍이 임명되엇다.

 

물론 이과정에서 일제시대 행정 겅험을 가진 관리와 경찰들이 대거 다시 등용되었고 그것은 미군정의 효율성과 전문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군정의 성급한 조치는 친일파 제거라는 이승만 정권의 청산작업이 처음부터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일제시대는 행정직 중 고급 직위의 18%, 중간급 직위의 32% 정도만을 한국인이 맡고 있었지만, 미군정하에서는 주요 정책 결정직을 제외한 모든 영역을 한국인들이 맡게 되었다. 1947년 6월부터 행정기관은 '남조선과도정부'라 불렀고, 19개 각 부처 책임자와 각 도지사는 모두 한국인이 맡았다.

 

 

미군정의 자유화 정책

미군정은 봉건적인 조선시대와 식민지 일제시대를 살아온 한국민에게 커다란 역사적인 전기가 되었는데, 비록 3년이라는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 사회는 서양  문명이 주도하는 사회로 급속도로 탈바꿈을 하고 있었다.

 

일본군 무장해제와 치안 및 질서 유지라는 차원에서 시작된 미군정은 한국의 사정에 어두웠고 사행착오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좌익의 무장폭동 등 어려운 사회적 조건 때문에 혼란도 불가피하게 나타났다. 신탁통치와 좌우합작을 추진하려 했던 미군정과 그것에 반대하고 즉각적인 독립노선으로 나아간 한국 지도자의 갈등도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시대를 통해 행정 체제, 교육 제도 및 군사 제도에서 발전적인 변화가 나타났고, 봉건시대 내지 전시동원 시대의 사회, 마을이나 씨족 공동체 및 국가라는 틀에 묶여 있던 일반 개인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건국 지원

세계적 차원에서 펼쳐지는 소련의 적화야욕이 드러나면서 냉전이 격화되자, 1947년 3월 공산주의를 막는 것이 미국의 행후 정책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트루먼독트린이 발표되었다. 그에 따라 소련과 합의에 의한 신탁통치로 한국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미국의 전략도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미국은 남한에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1947년 7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소련과 는 합의에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넘겼다. 미국은 1947년 11월 유엔 결의안을 통해서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에서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선거 결과에 따라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결정을 통과시켰다. 이는 유엔을 통해 소련의 기도를 분쇄하고 한반도 통일 정부를 수림하고자 하는 것이 미국의 기대였지만 그것은 소련이 유엔감시단의 북한 지역 입국 거부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스탈린의 야욕과 탐욕에 비해 트루만의 우유뷰단과 우매함이 크게 드러나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1948년 1월부터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구성되어 한국에서의 선거 관리를 맡았다. 소련의 거부로 위원단이 북한 지역에서는 활동할 수 없게 되자, 유엔은 다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우선적으로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 의해 제헌의회가 구성되고, 제헌헌법이 마련됨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질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미국은 제2차 대전 체제에서 평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국 주둔 미군을 철수시키려고 하였다. 미국은 한국 내 독자적인 방위 체제 구축을 위해 한국과 1948년 8월에 '잠정작인 군사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을 체결하고, 한국군의 무기 장비 조달과 군사 훈련에 대한 대부분의 비용을 부담하였다. 그리고 1949년 10월에 맺은 '상호방위원조법'에 의거하여 방위물자 및 교육 지원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미군이 지원한 군사 물자는 대부분 제2차 대전시 미군이 사용하던 M-1 소총, 칼빈 소총, 박격포, 3.5 무반동총, 105밀리 곡사포, 차량 등 낡은 장비들이 대부분이었고 그것도 소화기 위주의 경장비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은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군사물자를 지원받고 있었으며 소련의 최신형 T-34 전차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또 중국 모택동으로부터는 조선인 출신 중국 팔로군을 넘겨 받았고 그들은 모두 실전 경험이 뛰어난 부대들로 한국전쟁 발발시 북괴군 최선두에서 남침의 주력을 담당한 부대로 활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