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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우리들의 슬픔

우면산의 여름 44 : 광복! 그 굴욕의 명칭 6

 

 

 

 

우면산의 여름 44 : 광복! 그 굴욕의 명칭 6

 

 

 

                                                                                   반포 본동 아파트 놀이터

 

요즘 새벽 운동은 자전거를 타고 강남을 돌아 반포 본동 아파트에 도착하면 대략 6시쯤 된다. 이곳은 여러가지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는 놀이터가 있다. 우면산을 주말에 한번씩 오르다가 최근에는 산사태로 거의 우면산을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 이곳에서 30분 동안 각종 운동을 하고 출발하곤 한다. 이곳에는 농구장, 배드민턴장, 허리돌리기, 윗몸일으키기, 그리고  어린이용 미끄럼틀, 그네, 철봉, 시소 등이 설치되어 있다. 처음 아파트를 지을 때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파트 단지내에 설치된 이런 운동기구는 거의 이용하지 않고 가까운 헬스크럽이나 골프 연습장을 이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곳은 바닥에는 잔디가 자라서 관리가 안되어 있고 뿐만 아니라 시설들이 이미 설치가 오래된 것이라 철제 기둥이나 판제가 썩었고 페인트도 벗겨져 있다. 일부 나무 기둥은 밑둥이 썩어 부러지기 일보 직전인 모습이다. 물론 곧 재건축을 할 예정인 아파트 단지라 시설보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새벽에 이곳에서 운동하는 사람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고 나이드신 분들만 한 두분씩 걷기 산책을 하면서 지나가거나 내가 운동하다보면 남이 운동하니까 그냥 지나가기가 아까운지 운동기구에 올라 허리 돌리기 몇 번 하다가 간다. 한 할아버지는 이 시간대에 꼭 나오는데 운동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간다. 건강에 관심을 가질 나이들인지라 아침 운동을 한다는 것이 건강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나이든 사람이 헬스크럽에 나가면 사람들이 좋아할리 없기 때문이다. 

 

이곳 아파트는 입주 당시 처음부터 대단한 인기를 누리던 곳이라 당시 돈많은 부자들이 입주한 아파트라 오랜 기간 영화를 누려왔던 곳이다. 아파트에 주차되어 있는 자가용들도 대부분 중형차 이상이고 외제차도 여럿 보인다. 지금은 그 당시 부자들은 대부분 빠져 나가고 대부분 중산층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생각된다.  

 

 

 

 

제주 강정마을이 분쟁의 핵심지역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좌파 지식인을 포함하여 종북.친북세력들이 부산 한진중공업 분쟁에 이어 제주로 몰려들고 있다. 강경진압을 시도하던 경찰이 시위대에 7시간씩이나 구류되고 서귀포경찰서가 시위대에 포위되어 장시간 고립되기도 하였다.

 

역사를 보면 현실에 안주하던 정책이나 주장은 대부분 역사의 발전을 멈추게 하였거나 퇴보시키는 행동이었다. 변화를 거부하고 현실에 안주한다는 것은 외부의 변화에 뒤쳐지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결국에는 우물안 개구리 신세가 되거나 아니면 외부 세력에 제압당하는 결과를 초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미군 함정이 정박하고 그래서 중국의 위협을 고려하고 유엔이 지정한 자연환경을 살려야 하는 곳이라며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며 투쟁에 동참하고 있다. 중국과 북한이 싫어하는 것은 거부하며 그들이 북한의 지령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평택 미군기지 투쟁시에 나타났던 인물들이 이곳에도 나타난 모양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과거 서독처럼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한 간첩들이 우굴거리고 사회 곳곳에 좌익,친북,종북 세력들이 북한의 조종을 받고 열심히 반사회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대학생들이 북한의 인권 문제를 방영하고 토론하는 장소에 나타나서 집회를 저지하기 위해 전선을 짜르는 등 방해를 하며 북한을 옹호하고 있다. 그들은 한마디로 남한의 민중이 아니라 간첩에 동조하는 친북세력들이다. 내부의 적을 방치하면서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공권력을 무력화시키며 국방과 외교, 반미투쟁으로 사회적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북한의 인권이 얼마나 비참한 현실인지 그들은 모른채 하면서 오로지 반정부 투쟁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해방 후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패거리들이 김일성의 지령에 의해 반탁에서 찬탁으로, 그것도 여의치 않차 남한 각지에서 무장 폭동을 일으키며 남한 사회를 혼란으로 몰아갔던 사례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국가와 민족은 커녕 오로지 북한의 지령에 따라 그들의 언행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해방 후의 나라꼴이나 지금의 나라꼴이나 거의 비슷하다. 

 

 

 

 

김정일의 러시아 방문에서 거론되는것이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가스를 한반도로 연결하는 가스관 설치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것은 러시아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스관은 한,북,러 등이 설비에 공동투자를 해야하며 운영과 관리문제도 북한의 돌발적인 행동에 대비하여 충분한 검토와 안전한 방안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또 그 가스관은 해저가스관을 통해 일본까지 수출되어야 하며 액화상태로 중국, 동남아, 중동, 유럽 그리고 미국까지도 공급될 수 있는 방안도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북한을 무력화시키는 방안은 러시아와 중국이 북한과 남한에 대하여 공동된 의견일치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며 이는 한국의 외교의 능력에 달렸을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중국과 러시아에 대하여 그들이 필요로 하는 동반자 역활이 가능하도록 관계를 설정해야 하며 북한이 스스로 철권통치를 포기하고 북한 주민을 위한 정권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결구도만이 능사가 아니며 당근과 채찍으로 지혜롭게 그들을 품을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자본주의의 온기를 북한 전역에 확산시키고 그들의 사이비 종교집단 같은 주체사상을 무너뜨리며 자유스런 자유진영의 삶을 맛보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대결은 대결을 낳고 무력경쟁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그들에게 아무리 많아 퍼주어도 그들은 체제 유지를 위해 개방을 쉽게 하지 않을 것이며 철권통치 체제는 변하지 않는다.

 

그 철권통치를 무디게 만드는 방법은 고려 광종 때 처럼 고려 사회를 천지개벽시킨  '노비안건법' 같은 획기적인 처방일 것이다. 그래서 김일성.김정일 우상화와 유일사상체계를 무너뜨리며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진정한 인권과 자유를 찿도록 유도하는 고차원적인 처방이 필요할 것이다. 탈북자들에 대한 파격적인 우대와 자수하는 간첩들에 대한 처우, 김일성 궁전과 동상에 대한 무력화, 유일사상체계의 문제와 허점, 북한내 동조세력 양성, 반김정일.김정은 세력에 대한 은밀한 지원, 개방.개혁을 통한 자유화 물결 유도, 남한의 경제적인 풍요와 사회 환경 홍보, 전단지 등 대북 선전물 지속적인 발송 등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자유와 자본의 맛을 들이게끔 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북한 주민들이 만약 사상적인 붕괴가 초래되는 순간이 온다면 한꺼번에 무너질 수 있는 곳이 바로 북한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아도 백성을 탄압하던 독재정권은 결고 오래갈 수가 없다. 북한 김일성을 추종하던 박헌영이 어떻게 김일성에게 숙청되었는지를 남한의 좌익,친북,종북 세력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토사구팽'이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이용해 먹을대로 이용해먹고 버리는 꼴이 되는 것이 남한내에서 노동자, 민중을 외치며 대정부투쟁에 직간접으로 관여하여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북의 하수인, 바로 그들일 것이다. 

 

 

 

 

광복, 그 치욕스런 명칭은 계속된다.

 

좌익의 무장 폭동

대한민국 건국이 가시화되자, 좌익 공산 세력들은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기 위한 극렬투쟁에 나섰다.

 

소련 공산당의 지침을 받은 좌익 공산 세력들은 처음부터 미국이 남한에서 손을 떼도록 만들 목적으로 사회 혼란을 일으키며 미군정의 활동을 방해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좌익들은 1946년 7월부터 미국을 반동적이라고 규정짓고 반미운동을 적극 전개할 것을 선언하고 폭력 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미군정을 향하여 권력을 좌익 계열이 만들어 놓은 인민위원회에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조선공산당 박헌영 계열의 좌익들은 노동자와 농민을 선동하여 9월 총파업과 대구를 중심으로 한 10월 폭동을 일으켰다. 남로당은 북한 주둔 소련군 정치국으로부터 직접적인 지휘를 받고 자금을 받았다. 공산당 산하의 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와 전국농민조합 총연맹(전농)을 중심으로 한 파업은 전국적으로 번져나갔고, 한국 사회를 혼란으로 몰아갔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는 공산 좌익들이 대규모 무정폭동을 일으켜 대구경찰서와 달성경찰서를 습격하였고, 경찰 무기로 무장한 좌익들은 무차별적인 습격.방화에 나섰고, 경찰과 우익 인사에 대해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대구 폭동은 경북 및 경남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경북 22개군 중 16개 군, 경남 18개군 중 10개 군에서 폭동이 발생하였다. 한마디로 풍전등화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경찰관 39명, 민간인 44명 등 총 83명의 사망자를 포함한 큰 희생이 발생하였다. 공산좌익들은 이 폭동을 '위대한 10월 인민항쟁'이라 불렀다.

 

 

 

좌익의 반미 투쟁

좌익 공산 계열은 1947년 2월부터는 철도 파업과 폭동 방식을 통해 미군정 거부운동에 들어갔다. 좌익의 궁극적인 목표는 미군정으로 하여금 소련에 양보케 하여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킴으로써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려는 것이엇다. 1947년 3.1절 집회를 독자적으로 개최한 좌익 공산 계열은 3월 22일 주요 도시와 공장에서 공산당 계열인 '전평' 주도의 총파업 및 대중 폭동을 일으켰다.

 

또한 공산 계열은 7.27 군중집회와 각종 폭동을 통해 사사건건 한국 사회를 혼란으로 몰고갔다. 미 군정청이 일제시대의 9개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설립법'을 만들자, 박헌영의 공산당은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부의 지시를 받아 '국대안(국립대학교안) 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대대적인 반대 투쟁을 벌였다.

 

박헌영은 김일성과 소련을 방문한 이후 '일국일당의 원칙'에 따라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좌익 계열을 통합하여 남조선 노동당을 만들어 놓았었다. 그들의 투쟁 목표는 남한에 공산주의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공산화된 통일을 이룩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남한의 민족 진영 지도자들은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되지 않은 나라를 만듦으로써 소련 및 공산화된 북한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한의 독자적인 정부수립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