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우리들의 슬픔

우면산의 여름 42 : 광복! 그 굴욕의 명칭 4

 

우면산의 여름 42 : 광복! 그 굴욕의 명칭 4

 

                                                                           새벽 하늘 가로등과 달

 

 

 

독립운동가와 동포들의 귀국

 

일제 식민체제가 붕괴되자 우리 민족 모두는 새로운 독립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제 한국은 오랜 전쟁과 동원 체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활기찬 사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국내에서 독립운동과 문명개화운동에 전념하던 민족 지도자들과, 해외에서 오렛동안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한 독립운동 세력들은 모두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데 뛰어들었다.

 

국내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전시 동원 때문에 주로 문화, 교육, 언론 운동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은 1919년 이래 명맥을 유지해온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 인물은 미국에서 민족독립운동을 해왔던 이승만이나, 임시정부를 지켰던 한국국민당의 김구, 이동녕, 조소앙과 민족혁명당의 김규식, 김원봉, 이청천 등이었다. 그들은 1948년 가을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귀국하였다.

 

일본과 만주 혹은 태평양 지역 등지에서 나가 있었거나 군인이나 노동자로 동원되었던 약 320만 명의 한국인 가운데 약 250만 명이 고국으로 되돌아왔다. 귀환한 동포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서울, 부산 등 대도시에서 새로운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총인구의 10%에 해당하는 해외 거주 엘리트 및 해외 경험을 가진 노동자들의 귀국은 한국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식민지 이전의 마을 공동체적 봉건사회가 아닌 근대적인 시민사회로 나가는 데 커다란 동력이 되었다. 한마디로 격동의 세월이었으며 혼란과 대변혁의 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한편 조선에서 거주했던 75만의 일본인들도 대부분 자신들의 재산을 긴급히 처분하거나 남겨둔 채 일본으로 떠나갔다.

 

 

 

북한 주민의 월남과 좌우 대결

소련군에 의해 점령된 북한 주민들은 소련군이 주최하는 전체주의적 각종 집회에 동원되어야 했고, 집회와 학교에서는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외쳐야 했으며 일본 군가 대신에 이제는 소련 군가를 따라 불러야 했다. 조선민주당의 조만식 등 공산주의 체제에 동의하지 않는 민족주의 계열 및 기독교 계열의 인사나 단체는 활동의 제약을 받았으며 특히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강화되었다.

 

반면 남한 지역에서는 미국과 싸웠던 일본의 전시 선전 때문에 반미적 정서가 확산되어 있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갑자기 미군이 진주하자 미군을 적극 지지하게 된 낯선 상황 변화는 많은 혼돈을 초래하였다. 더구나 1개월 정도 먼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을 보고 서울에도 곧 소련군이 올 것으로 판단했던 사람도 많았고, 섣부르게 소련군 환영 준비도 했다. 게다가 소련은 일제 시대 일제와 우호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서울의 영사관을 통해 비밀리에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고 통제하면서 공산주의 확산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해방된 남한 지역에서는 미국식 민주주의냐, 아니면 소련식 공산주의냐를 두고 대립하고 있었지만, 시민사회는 해방과 함께 자유스런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미군 진주 이후부터 미국의 영향력과 미국의 자유주의 문화가 남한 사회에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그에 따라 구한말부터 시작된 서구식 교육과 기독교 등이 다시 횔력을 찿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남한 사회에서는 소련 공산주의 체제를 피해 북한에서 내려온 지식인, 기업인, 종교인 들을 중심으로 반소련, 반공산주의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반공적인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냉전의 전개

소련은 일본 패망 이전부터 미국, 영국과 대립하기 시작하였고 자신들이 점령한 동유럽 지역에 공산주의 체제를 이식시키고 위성국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소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폴란드에 친소련 정부를 세우기 위해 당시 영국에 망명해 있던 망명 정부를 부정했다. 그리고 폴란드 공산당을 내세워 독자적인 공산주의 정부를 구성하였다. 나아가 체코, 루마니아 등 점차 다른 동유럽 국가들까지 그들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리고 터키, 그리스 등에서도 공산주의 세력을 선동하여 소련을 모국으로 삼고 소련의 지시를 받는 국가를 만들고자 시도하였다.

 

이에 따라 미.영 등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을 위시한 공산 진영 간에는 급속도로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 수상 처칠은 '철의 장막'이라 부르며 소련에 의한 경찰지배가 확산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도 1947년 3월 '트루만 선언'을 통해 소련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고 약소국가들의 독립과 자유를 유지하는 것이 미국의 핵심 정책임을 밝혔다. 그에 따라 미.소의 대립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본격적인 체제 경쟁인 냉전으로 격화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자유 체제의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을 펼치고,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결성하였다. 이에 소련은 베를린을 봉쇄하는 등 반발을 하면서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함으로써 나토에 대응하였다.

 

한편 소련은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자 하였다. 소련군은 몽골을 점령해 10만의 군대을 주둔시키고,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점령, 차지하였다. 중국의 대련과 여순항을 조차하고 철도운영권을 얻는 등 만주 지역에 대한 우선적인 이권을 확보하였다. 그외에도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뚱을 적극 지원하면서 중국내 공산주의 확대와 공산 혁명을 적극 지원하였다.

 

 

 

 

한반도 전역의 공산화를 기도한 소련

 

한반도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공산주의 세력은 급격히 커졌다. 서울의 소련 영사관은 한국의 좌익들을 지원하고 지도할 수 있었고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라는 지령을 받은 박헌영은 공산주의 세력을 확대하면서 실질적으로 통제하였다. 그리고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 공산주의자 김일성을 소련의 주선하에 비밀리에 만나 협조체제를 구축하였다.

 

당시 한국은 통일 된 민족 독립국가가 되기 위해 미.소의 협조가 절실했다. 그러나 소련이 한반도 북부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와 미.소간에 본격적인 냉전체제 전개로 통일된 독립국가를 만드는 것은 점차 불가능하게 되었고 소련은 한반도 전체를 동유럽과 같은 위성국가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려 하였다.

 

그래서 소련과 남한 공산주의 세력은 남한마저 공산주의 체제로 구축하려 하였는데, 이에 박헌영 등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남한도 북한처럼 소련의 연방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소련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라 혁명적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 전쟁 후반기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 그리고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모두 한반도의 체제 분단은 물론, 그것과 연결된 김일성의 남한 침공인 민족해방전쟁(6.25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