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면산의 여름 43 : 광복! 그 굴욕의 명칭 5
반포 본동 아파트 놀이터에서 바라본 새벽 동녁 하늘
자만과 추락 오세훈 서울시장이 끝내 '33.3%의 벽'을 넘지 못했다. |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24일 밤 최종 투표율(25.7%)을 확인한 뒤 서울시청에서 "시민들의 소중한 뜻이 담겨 있는 투표함을 개봉조차 할 수 없어서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하며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김형우 기자 free217@donga.com |
논의 끝에 사퇴 시기 문제는 당과 협의해 결정하기로 했지만 오 시장이 고집을 굽히지 않고 있어 상황은 지극히 유동적이다. 여권 관계자는 "오 시장이 홍 대표와의 심야 회동에서 '사퇴 시기는 당에 일임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또 다른 고위 관계자는 "(오 시장이) 버틸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번 주민투표를 계기로 지난해부터 발화된 여야 간 '복지논쟁'은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복지논쟁과 무관하게 보수진영과 한나라당은 상당한 후폭풍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주민투표의 무산은 '오세훈의 패배'가 아닌 '보수진영의 패배'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번 주민투표로 한나라당은 30%가 넘는 투표율을 보인 강남 3구(강남 서초 송파)의 지지기반 정도를 확인하는 데 그쳤다.
무상급식 투표 결과 오세훈 시장이 기로에 섰다. 투표율이 예상을 밑돌아 약속대로 시장직을 그만 둘 것으로 전망된다. 9월 이전에 그만두면 10우러에 재보선 선거가 치르지고 10월 이후에 그만 둘 경우에는 내년 4월 총선과 같이 재보선 선거가 치러질 전망이다. 한나라당에서는 아마 내년 4월 재보선을 생각하고 잇으나 일부 서울시 의원들이 전원 낙선의 고배를 당할 것을 우려하여 반대하는 등 진통과 대혼란이 일어날 전망이다. 의회와 마찰을 빚은 오시장의 고집과 자신감이 이번 사태를 몰고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번 무상급식 문제가 시장직을 걸 정도로 심각한 정치적인 사안이었는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좀 경솔한 처신이며 앞으로 자신의 정치생명에도 치명적인 오점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여권에는 나름대로 미국의 케네디 같은 지도자를 꿈꾸며 참신한 이미지로 정계에 투신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으며 스스로 젊은층의 대표주자로 개혁기수로 자처하는 서울대 출신 수재들인 나경원, 원희룡 등 쟁쟁한 기수들이 오시장의 뒤를 이어 서울 시장에 도전할 모양이지만 그들과 같이 정치 일선에서 명운을 걸어야 하는 오시장 입장에서는 이번 사태가 치명적인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복지를 주장하며 선동적인 포플리즘 정치를 일삼는 야권에 일격을 당한 꼴이 되었고, 여권인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이번 사태로 인해 내면 총선과 대선에 먹구름이 잔뜩 낀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울 시민은 다시 한 번 우롱당하고 있다. 이번 투표를 포함하여 내년 재보선 등 선거 비용은 모두 서울시 예산이다. 불참은 무관심이다. 모두가 반대가 아닌한 관심도 없는 정책사안을 투표를 하겠다는 발상이 어떤 예상치를 근거로 시작하였는지는 몰라도 오시장은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되고 말았다. 서울시 의회가 지난 선거에서 당선된 야권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을 때 이미 오시장과 갈등의 소지는 충분히 예상되었고 야권의 복지 포플리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전면 무상복지를 외치는 인간들일수록 자기 주머니 돈으로 무상복지을 하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국민의 세금이니 마구 복지를 남발해도 유권자들은 다양한 복지를 희망하기에 자신에게는 좋은 이미지만 남기고 소요되는 비용은 천문학적인 금액이 되어도 관심도 없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재정규모, 개인 소득과 비례하여 복지에 대한 어떤 기준도 필요하고 단계적인 중장기계획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또 이번 주민투표가 전례가 되어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도 주민투표를 외치고 있다. 민주주의란 탈을 쓰고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다수의 의견이면 무조건 모두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투표가 만능은 아니다. 재정과 복지가 균형을 이루고 정부의 지출규모를 줄이며 점진적인 복지시행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남유럽이나 미국의 사태를 볼 때 우려되는 것은 우리의 정부나 개인부채는 천문학적인 규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의 위협은 상시 도사리고 있고 국제 경기는 금융불안을 포함하여 앞날을 예측하기도 힘들다. 수출이 늘어나도 남는게 없고 서민들의 삶은 계속 팍팍한 삶이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다. 앞으로 이번 사태를 준용하여 각지에서 주민투표가 성행되지 않을 까 걱정도 해 본다.
반포 본동 아파트 놀이터
광복! 그 치욕스런 명칭은 계속된다.
모스코바 3상회의 결정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
소련군과 미국군의 한반도 분할 주둔 이후 한국 국민을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사건은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미.소.영 3개국의 모스크바 외무장관 회담의 결과였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발표된 것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최고 5년 기한의 미.영.중.소 4개국 협의하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신탁통치 결정은 곧 독립국가가 건설될 것으로 기대했던 국민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독립국가 건설의 희망에 부풀었던 국민들은 또다시 외국에 의한 통치가 시작되는 굴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신탁통치가 실시된다는 것은 곧 소련이 동의하고 인정하는 체제만이 한국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신탁통치 결정이 알려지자마자 즉각적으로 전국적인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민족 세력의 중심에 있던 이승만은 신탁통치라는 것은 자주독립의 능력이 없을 때나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명확한 반대를 표명했고, 김구도 반탁운동을 또 다른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규정지었다. 조선공산당이나 건국 동맹 등 좌익 계열들도 신탁통치란 민족적 치욕이라고 반대하였다.
마치 3.1독립운동 때 처럼 휴업, 철시 등과 같은 전국민적인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펼쳐졋다.'신탁통치 반대 서울시민대회'와 같은 각종 반탁시위가 계속되었다. 김구 중심의 임시정부 계열은 민족의 자유를 위해 즉각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하자는 취지에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더 나아가 미군정을 부정하는 불복종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한편 이승만은 신탁통치 반대를 확고히 하면서도, 더 근본적으로 '미.소 합의에 의한 한국 문제 해결'이라는 미국의 정책 노선을 바꾸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였다. 왜냐면 그러한 정책은 소련의 영향력을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좌익의 태도 돌변
신탁통치 결정에 대해 온 한민족이 전국적인 반대를 분명히 했던 것과는 달리, 좌익은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방향으로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였다. 소련의 지시를 받고 비밀리에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온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좌익 계열은 며칠 만에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조선공산당과 좌익 계열은 1946년 1월 2일부터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코바 협정을 지지하며 오히려 반탁운동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하엿다. 좌익들은 신탁통치를 '세계민주주의 발전에 있었서 또 한걸은 진보이다."라고 주장하고 반탁운동은 대중을 기만하는 정책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이처럼 좌익 세력은 민족 국가의 독립은 외면하고 소련의 지시를 받아 김일성의 사주로 찬탁으로 돌변하게 된 것이다.
북한 지역에서는 소련의 공식적인 지시 이외에는 그 어떤 의사 표명도 자유롭지 못했다.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등 민족 계열만은 반탁을 분명히 하였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단체와 조직은 일제히 신탁통치 찬성을 주장하였다.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남한 사회에서는 이에 찬성하는 공산주의 및 좌익 계열과 그것에 반대하는 민족 계열 간에 극한적인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하엿다. 우익 민족 계열은 '대한독립촉성국민대회'를 조직하고, 좌익 공산 계열은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였다. 1946년 3월 1일 3.1운동 27주년 기념식에서 민족주의 계열은 동대문운동장에서 약 10만이 참석하여 대집회를 열었고, 이에 맞서 공산 계열은 1만 5,000명이 참여한 집회를 남산에서 따로 열었다. 집회 후에는 좌.우 간에 폭력 유혈충돌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공산주의자 및 좌익 계열은 겉으로 위장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소련과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남한 사회에서 분열을 초래한 공산혁명의 하수인에 불과했다.
민족 진영의 뒤늦은 각성
우파적 민족 진영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같은 조직은 대대적인 반탁운동을 통해 비로소 지방 조직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좌익에 비해 우익 민족계열의 조직화는 미약한 상태였다. 반탁학생연맹의 활동과 함께, 북한 지역에서 공산주의를 경험하고 남한으로 내려온 월남인들이 민족세력의 조직화에 큰 힘이 되었다. 그들은 서북청년단 등의 반공 조직을 통해 공산주의로부터 자유 체제를 지키는 투쟁에 앞장섰다.
남한 지역에서는 국민적 반탁 열기 때문에 미.소 협의나 미군정에 대한 정책추진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남한 지역의 국민 의사를 임시적으로 대표하는 협의체로 미군정이 자문기관으로 설립한 대한민국 대표 민주의원에서 조차도 44대1이라는 압도적 차이로 반탁을 결의하였다.
그러므로 1946년 5월에 신탁통치 방식을 결정할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자, 반탁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어졌다. 결국 반탁 세력을 임시정부 구성에서 배제시키라는 소련의 입장과, 반탁도 민주주의적 의사 표현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미국의 입장이 대랍했다. 미소공동위원화는 몇 차례의 회의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 없이 공전되다가 결국 1947년 8월 완전 결렬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은 곧 남.북한 지역에 소련과 미국 주도의 독자적 정부 수립을 촉진시켰고, 미국으로 하여금 신탁통치 방식을 포기하고 유엔으로 한국 문제를 이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전국민적인 반탁운동은 남한 지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독자적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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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희망없는 아시아 전략적 실패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전략적인 판단과 예측이 매우 어두운 나라였다. 동과 정의 차이, 문화와 관습, 사상과 이념 등의 차이로 동양인들의 내면을 읽지 못하는 그들의 취약점일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는 미국의 우매한 전략적인 실수로 인해 반토막 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데, 태평양 전쟁에서 너무나 많은 인적자원의 손실로 인해 큰 부담을 느끼고 있던 미국은 일본 본토 상륙전을 전개할 경우 또다시 엄청난 인적 피해가 우려되는 만큼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해 주기를 정상들과 회담에서 여러차례 희망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당장 급한 쪽이 서부전선 독일과 전쟁이었다. 소련의 심장부인 스탈린그라드까지 진격한 독일군을 반격을 하면서 독일군 괴멸과 서부 유렵의 영역 탈취에 바쁜 그들로서는 당장 대일전에 참전은 불가하였다. 그러다가 소련은 서부 유럽전선에서 결국 독일이 패망하자, 즉시 동유럽 점령 지역을 소련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권을 내세워 대부분 공산화시켰고, 그제서야 태평양 전선에서도 극동아시아 일대를 공산화시킬 계획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한편 미국은 이러한 소련의 의도를 인지못하고 자신들의 인적 자원의 희생을 감소시킬 대안으로 소련군의 참전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소련으로써는 극동 지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힐 수 있는 믿기지 않는 호기였다. 그래서 소련은 종전이 가까워 올 무렵에서야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사할린을 침공하였으며 동시에 원자폭탄에 의해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자 만주 지역의 관동군 무장해제를 미군과 협의에 따라 담당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하필이면 일본 관동군이 소련의 침공에 대비하여 편제를 조정하면서 북한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대본영 예하부대를 관동군 소속으로 변경시켰던 것이다. 이에 소련군은 북한 지역의 관동군까지 무장해제의 담당지역으로 확대되었고, 한반도의 운명은 기구한 역사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소련이 북한에 진주하여 소련군에서 근무하던 무명의 김일성을 내세우며 친소련 정권을 수립하며 일체의 민족적인 단체와 독립국가 수립 세력을 탄압하였고, 주민들은 각종 집회와 통제로 소련식 전체주의적인 체제로 급속히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미군은 소련군이 북한이 진주한 시기보다 한 달이나 늦게 한반도 남쪽 인천에 상륙하였다. 북한 지역에 소련군 진주는 관동군 무장해제 지역이므로 미군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여기서 미국은 한반도가 한민족의 한 나라였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일본군 관동군 무장해제에만 주력하였고 소련의 음흉한 흉계를 사전 인지하지 못햇던 것이다.
역사를 보면 미국은 아시아 전략에서 대부분 실패하였는데, 청조말 중국과 극동 지역에서 대부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실패하였으며, 중국의 국공내전에서도 부패한 장개석의 국민당을 지원하다가 실패하였고, 6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을 지원하다가 결국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뻐져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보고 물러나면서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또 중국의 티베트 점령과 유혈사태, 신강.위그루 독립운동과 유혈사태, 외몽고. 내몽고 포기, 인도-파키스탄 분쟁, 인도-중국 국경분쟁, 필리핀 미군기지 철수, 오키나와 미국기지 분쟁, 동남아시아 공산화 방치, 아프칸 전쟁 실패, 대일본 정책 등에서 전략전인 사고도 부족하고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
이런 미국이라는 나라가 앞으로 한반도에서 과연 얼마나 중국과 소련, 북한의 의중을 알고 전략적인 성공을 성취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중국의 대국화와 러시아의 흉계,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과 성장, 북한의 능멸전술과 핵무기 위협 등 산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건국 200년 후 제1,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으로 세계 최강의 강대국이 되면서 전 세계 자원을 싹쓸이 하고 부를 끌어모으면서 지금까지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고 있으나, 최근 경제발전으로 국력이 성장한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군국주의, 러시아의 지속적인 남진 정책 등과 맞물려 가장 우려되는 것은 미국의 심각한 경제적인 붕괴가 곧 미국의 추락을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동시에 중국은 미국이 휘청거리는 모습이 보이면 미국의 패권경쟁에서 한 판 승부는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미국의 핵우산 아래서 지금까지 기적같은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지금은 비만을 걱정하며 살고는 있으나, 개인들의 삶의 질은 점차 더 어려워 지고 있는 가운데 불안한 평화를 누리고 있으며, 최근 한국 정치, 사회에서 강도를 더해가는 국론 분열과 좌익 세력들의 성장 등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그래서 과감하고 지혜로우며 능력있는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고, 국방 제분야에서 연일 도출되고 있는 불안하고 무력한 전비태세, 각종 비리와 군에 대한 국민적 반발, 군을 우습게 아는 사회 풍조 등 각종 국방취약점, 무역과 자원을 모두 해외만 의존하는 불안한 경제구조, 복지 포플리즘 확산, 정부 및 개인의 재정부채 증가, 초고령/저출산의 기형적인 사회, 부패와 삶의 지수가 꼴지 기록하고 있는 현실에서 언제까지 버틸 것인지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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