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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85 : 고려의 역사 153 (제21대 희종실록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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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85 : 고려의 역사 153 (제21대 희종실록 1)

두바퀴인생 2011. 10. 10. 02:02

 

 

 

한국의 역사 385 : 고려의 역사 153 (제21대 희종실록 1)

 

 

 

제21대 희종

 

희종(熙宗, 1181년~1237년)은 고려 제21대 국왕(재위: 1204년~1211년)이다. 는 영(韺), 는 불피(不陂), 시호희종인목성효대왕(熙宗仁穆成孝大王). 신종선정왕후의 맏아들이다.

 

생애

1200년, 태자로 책봉되고 1204년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1205년최충헌(崔忠獻)을 진강군개국후(晋康郡開國侯)에 봉하였으며 1206년에 다시 진강후(晋康侯)에 봉하고 흥녕부(興寧府)를 세우게 하였으며

 

1207년 최충헌의 청으로 유배자 300여명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 방면하였다.

 

1208년 개성 대시(大市) 좌우의 긴 행랑(行廊) 1,080영(楹)을 다시 짓게 하였는데 오부방리(五部坊里)와 양반의 집에서 미속(米粟)을 내게 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1211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당시 정권을 휘두르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도리어 최충헌에게 폐위를 당하여 강화로 쫓겨났다가 뒤이어 자란도(紫鸞島)로 옮겨졌고 1215년 다시 교동으로 옮겨졌다가 1219년 서울에 봉영(奉迎)되었다. 이렇게 서울에 돌아와서 딸 덕창궁주(德昌宮主)를 최충헌의 아들 성(珹)과 혼인시켰다.

 

1227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최우(崔瑀)에 의하여 다시 강화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져 1237년에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승하하였다. 시호는 성효(誠孝)이며 능은 강화도 양도면에 위치한 석릉(碩陵)이다.

 

참고로 '고려왕조사' 등을 저술한 고려사학자인 류재하 씨의 주장에 의하면 현재 문화류씨 곤산군파가 이 희종의 후손이라고 한다. 곧, 개성왕씨 족보인 성원록에 보면, 희종의 손자인 광평공 혜의 자손이 유(柳)씨가 되었다고 하는데, 문화류씨 곤산군파가 이 후손이라는 것이다.

 

가계

  • 성평왕후 임씨(成平王后) - 종실 영인후 왕진(寧仁侯 王稹)의 딸.
    • 창원공(昌原公)
    • 시령후(始寧侯)
    • 경원공(慶原公)
    • 대선사(大禪師)
    • 충명국사(冲明國師)
    • 안혜왕후(安惠王后) - 고종의 왕비.
    • 영창궁주(永昌宮主)
    • 덕창궁주(德昌宮主) - 최충헌의 아들인 최성과 혼인.
    • 가순궁주(嘉順宮主) - 신안공 전과 혼인하여 딸 경창궁주를 낳음. 경창궁주는 고려 원종의 비로 들어감.
    • 정희궁주(貞禧宮主)

 

 

 

 

 

 

제21대 희종실록

(1181~1237년, 재위 1204년 1월~1211년 12월, 7년 11개월)

 

1. 왕권회복을 꿈꾸는 희종과 최충헌 제거 계획

 

희종은 신종과 선정왕후의 맏아들로 1181년 5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덕, 이름은 영, 자는 불피이다. 1200년 4월에 왕태자에 책봉되었고, 1204년 1월에 병상에 누운 신종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희종 역시 신종과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왕권은 없었으며, 국사 전반에 관한 모든 결정은 최충헌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희종은 신종과 달리 부왕의 선위를 받아 왕실의 예법에 따라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측면에서 즉위에 대한 대의명분이 분명했다. 이 같은 사실은 왕권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최충헌을 비롯한 그 일파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기 시작하였다.

 

 

                                     

 

희종 즉위 원년인 1204년에 장군 이광실 등 30여 명이 최충헌 부자를 살해하기 위해 급사동정 지귀수의 집에 모여 모의를 하다가 발각되었고, 1209년 4월에는 청교역리 3명이 최충헌 부자를 살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가 귀법사 승려의 고발로 실패하기도 했다. 이 때 주모자들은 공첩을 위조하여 각 사찰에 위조 공문을 보냈는데, 귀법사에 공문을 전달하려 갔던 자가 그곳 승려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거사계획이 탄로났던 것이다.

 

귀법사 승려로부터 자신을 살해하려는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최충헌은 영웅관에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대대적인 범인 색출 작업에 들어갔고, 청교역의 관리들이 음모를 주동했음이 밝혀졌다. 이에 청교역리들이 잔혹한 고문을 당하다가 우복야 한기도 공모자라고 말하는 바람에 최충헌은 한기와 그의 세 아들을 죽이고, 장군 김남보를 비롯하여 9명을 공모자로 몰아 함께 처형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주변 인물들을 모두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 당시 범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하였던 교정도감은 그 후부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기관으로 자리잡는다. 무신들의 합좌기구인 중방은 이 순간부터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최충헌은 스스로 교정도감의 별감으로 있으면서 그곳에서 국사를 처리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최이(우), 최항, 최의가 교정별감직을 세습하면서 왕권을 대신하게 되었다.

 

청교역리들의 최충헌 살인 모의사건이 발생한 지 1년 만인 1210년에는 직장동정 원서와 재상 우승경이 최충헌을 암살하려 한다는 투서가 날아들어 다시 한 번 살상극이 벌어진다. 투서를 접수한 최충헌은 즉시 원서와 우승경을 체포하여 문초하였고, 원서는 자신은 결백하다며 투서는 유익겸의 짓일 것이라고 하였다. 유익겸은 언젠가 원서에게 은병 2개를 빌려간 일이 있었는데 몇 해를 지나도 갚지 않았고, 이에 분개한 원서는 그의 집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원서의 고백에 따라 최충헌이 사람을 보내 유익겸의 집을 수색하게 하였더니 그곳에서 정말 투서의 초안이 발견되어 원서와 우승경은 죽음을 면하였다.

 

이렇듯 사람들이 최충헌의 권세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원한을 갚으려 했을 만큼 최충헌은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래서 활동의 민가 1백여 채를 허물고 자신의 집을 지었는데, 그 규모가 대궐과 맞먹을 정도였다. 이 저택의 북쪽에 '십자각'이라는 별당을 지었는데, 그 공사를 위해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원성이 자자하였다. 그리고 백성들 사이에는 최충헌이 남자아이 다섯 명과 여자 아이 다섯 명을 잡아다가 오색옷을 입혀서 집터의 네 귀퉁이에 묻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때문에 아이 가진 부모들 중에는 먼 곳으로 도주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 건달들이 아이를 유괴하여 숨겨두고 이 소문을 언급하면서 아이들의 부모에게서 돈을 강탈하는 사건도 잇따라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최충헌은 어사대를 시켜 다음과 같은 방을 붙이기까지 하였다.

"사람의 목숨이 가장 귀중한 것인데 어찌 생매장하여 재앙을 물리치려 하겠는가. 만약 어린아이를 잡아가는 자가 있거든 관아에 고발토록 하라."

 

방이 붙은 뒤에는 아이를 유괴하여 돈을 요구하는 사건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웃지 못할 이 일을 통해 최충헌의 권력 남용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알 수 있다. 눈에 거슬리는 자는 가차없이 반역으로 몰아 죽이고,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압력을 행사하여 빼앗았으며, 개인적인 일을 위해 국법이 필요하면 왕을 위협하여 반드시 관철시켰다.

 

하지만 최충헌의 이 같은 서슬 퍼런 칼날 아래서도 다시금 그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됐다. 더구나 이번에는 왕도 가세했다.

 

1211년 그동안 최충헌의 왕권 능멸을 지켜만 보고 있던 희종은 측근 내시들과 모의하여 최충헌을 제거하고자 거사를 결행한다. 비교적 오랫동안 치밀하게 계획되었을 법한 이 사건은 그해 12월 경자일에 벌어졌다.

 

그날 최충헌은 왕을 배알하기 위해 수창궁으로 가서 내전으로 들어가 희종을 배알하는 사이, 중관의 내관들이 최충헌의 수하들에게 왕이 술과 음식을 내렸으니 함게 먹자고 말하면서 궁궐 깊숙한 곳으로 유인하였다. 그들이 순순히 내관들을 따라오자 미리 잠복하고 있던 10여 명의 승려와 무사들이 그들을 습격하였다. 이 때문에 순식간에 내전의 복도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최충헌의 수하 몇 명이 칼에 맞아 쓰러졌다.

 

이렇게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최충헌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자객이 들이닥친 것으로 판단하고 희종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하지만 희종은 내실의 문을 닫고 최충헌을 내실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희종은 내시들이 최충헌의 목을 베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희종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안 최충헌은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다가 급하게 지주사 다락에 몸을 숨겼다. 그때 최충헌을 죽이기 위해 승려 몇 명이 내전 쪽으로 달려왔고, 세 번이나 그 주변을 기웃거렸지만 최충헌을 찿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이처럼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는 동안 내전에서 변고가 발생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김약진과 최이의 장인 정숙침이 내전으로 달려가 최충헌을 구해냈다. 그때 최충헌의 수하들과 승려들은 칼부림이 벌어지고 있던 중이었다.

 

한편 궁궐 밖에서 최충헌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교정도감 군사들이 궁성 밖에 집합해 궁궐 진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최충헌의 생사여부를 몰라 궁성 진입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최충헌과 동행했던 노영의란 자가 대궐 지붕 위에 올라가 "우리 대감님은 무고하다'"고 소리치자 군사들이 그제야 궁궐 안으로 밀려들었다.

 

이렇게 하여 최충헌은 가까스로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최충헌을 구한 김약진은 궁궐로 군사를 몰아 임금을 비롯한 모든 내인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최충헌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최충헌은 상장군 정방보 등을 시켜 사약 정윤시와 중관들을 체포하여 인은관에 가두고 국문하라고 하였다. 국문 결과 주모자는 내시낭중 왕준명으로 밝혀졌고, 참정 우승경과 추밀원사 홍적, 장군 왕익 등이 공모했음이 드러났다.

 

최충헌은 이들을 모두 죽이거나 유배시키고, 이들의 모의를 후원한 희종을 폐위시켜 강화도에 유배시켰다. 이 때 희종의 나이 혈기왕성한 31세였으며, 재위 7년11개월만이었다.

 

강화도에 유배된 희종은 다시 자란도에 이배되었으며, 태자 왕지는 인주로, 덕양후 왕서는 교동으로, 시녕후 왕의는 백령도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최충헌은 아들 최이와 평장사 임유를 시켜 명종의 아들 한남공 왕정을 왕으로 세웠다.

 

희종은 그 후 유배지에서 머물다가 노년에 법천정사로 옮겨 1237년 고종 24년 8월 5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묘호는 처음에는 정종이었으나 뒤에 희종으로 고쳤다. 능호는 석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