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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84 : 고려의 역사 152 (제20대 신종실록 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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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84 : 고려의 역사 152 (제20대 신종실록 5)

두바퀴인생 2011. 10. 9. 08:10

 

 

 

 

한국의 역사 384 : 고려의 역사 152 (제20대 신종실록 5)

 

 

제20대 신종실록

(1144~1204년, 재위 1197년 9월~1204년 1월, 6년 4개월)

 

2. 60년 장기집권의 기반을 닦은 최충헌(계속)

 

 

결과는 충헌의 승리였다. 수적으로 약한 충수의 세력은 얼마간 항전하다가 도주하였고, 충수도 수하들과 함께 달아났다. 하지만 충수는 뒤쫓아간 충헌의 수하들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충수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충헌은 생포하지 않은 부하들을 심하게 원망하였다. 하지만 이미 충수의 목이 잘린 상태에서 그같은 후회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도성의 백성들은 최씨 집안이 권력이 놓고 형제간에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다고 손가락질하였다.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하여 권력을 남용하자 그의 종 만적이 6명의 친구들과 짜고 난을 도모하였다. 만적은 노비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 땅에서는 경인년(정중부의 난) 이래 고관대작이 천민 노예들에게서 많이 나오고 있다. 대장이나 정승이 본래 종자가 따로 있겠는가. 시기만 만나면 누구던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도 어찌 채찍 아래에서 뼈 빠지게 천한 일만 하겠는가?"

 

만적은 개성의 노비들이 모이면 일시에 난을 일으킬 수 있다고 장담하며 거사일을 잡았다. 하지만 막상 거사일에 모인 숫자는 불과 수백 명밖에 되지 않아 거사는 미뤄졌다. 며칠 후 그들은 다시 보제사에 집결하여 조직적으로 난을 일으키기로 했는데, 그만 율학박사 한충유의 종 순정이 한충유에게 고변하는 바람에 만적을 비롯한 주모자들이 체포되어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사건 이후부터 최충헌은 개경 전역에다 수하들을 배치하여 백성들을 감시하도록 했으며, 궁궐에 들어갈 때도 수백 명의 군사를 대동하고 다녔다.

 

또한 박진재의 세력이 자신 못지않게 커가자 그를 불러 양다리의 심줄을 잘라내고 유배시켜버렸다. 그 외에도 세력을 키우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버렸다.

 

이 같은 공포정치를 실시하며 조정을 독식하던 그는 1203년에 중서문하 평장사에 올랐다가 1205년에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문하시중이 되었다.

 

그 때 그는 이규보를 등용하여 정중부의 난 이후 거의 자취를 감췄던 문인을 등용하였으며, 1209년에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국정 전반을 그곳에서 처결하게 하였다. 그리고 1211년 내시낭중 왕준명 등이 궁궐 내에서 그를 살해하려는 음모에 휘말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 일을 방관한 희종을 내쫓고 명종의 아들 강종을 세웠다.

 

이후 1218년에 나이 70세가 되어 스스로 치사할 것을 청원하였으나 강종은 그에게 칠순이 넘어도 관직에 머물도록 허락하는 궤장을 내렸다. 하지만 이듬해 병이 들자 그는 궤장을 반납하였고, 병세가 악회되어 7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렇게 그는 죽음과 함께 사라졌지만 그이 권력은 아들 최이(우)에게 세습되어 향후 60년 동안 최씨 무신정권은 계속된다.

 

신종실록은 희종실록, 강종실록과 함께 1267년 원종 8년에 편찬되었다. 편찬작업은 이장용이 주관하였고 유경, 김구, 허공 등이 실무를 맡았다.